카카오톡 가상국가인 유피스 제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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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

역사 시대
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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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
오늘날의 유피스 땅에는 갈리아 켈트로 여겨지는 소위 골족이 터전을 잡고 살았다. 켈트는 방대한 켈트계 제어 사용자 민족 집단들 전체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켈트 계열 민족들은 아일랜드를 비롯한 브리튼 제도에서 프랑스와 남부 독일 일대는 물론 발칸 반도 북부에서 아나톨리아는 물론 일부는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골족과 근연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이탈리아 북부의 켈트계 세력은 오랜 기간 이탈리아 반도를 공격해왔고 로마 공화국은 이들과의 대립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지휘관이자 역사적인 명장 중 한 사람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전쟁을 주도하여 단기간에 갈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아르베르니 분화되어 있던 골족에 속하는 부족들 중 하나 부족의 수장이 골족을 규합하여 부족연합군을 결성하고 갈리아에 주둔하게된 로마군을 연파하며 갈리아 전역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한 때 패배 직전의 위기에 몰리고 갈리아를 포기할 상황에 처했지만 근성으로 버텨내었고 아바리쿰을 함락시킨 뒤, 알레시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항복시키고 갈리아 전역을 재평정하였는데 이후로 갈리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로마화하였다. 갈리아는 이러한 형태로 라틴화되었으며 이것이 현대 유피스인 민족의 라틴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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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푸아티에 전투 |
로마 제국이 서로마, 동로마로 분화되고 서로마의 세력이 차츰 약해지면서 서로마의 영역이었던 갈리아 지역에는 게르만 계열의 민족들이 무수히 거쳐가게 되었다.
갈리아에는 게르만 계열의 민족들 중 하나인 프랑 크인들이 진입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오늘날의 로렌, 라인란트 등지에서 세력을 확대하다가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인들을 이끌던 시기에 서로마가 완전히 붕괴하는 틈을 타 갈리아로 진입하여 갈리아의 서로마 주둔군 장군이던 시아그리우스를 수아송 전투(486년)에서 격파하고 시아그리우스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북부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메로빙거 왕조의 실질적인 시작이며 이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세력을 급속히 확대하여 남부 갈리아 상당부분을 지배하던 비시고트 왕국을 공격하여 부이예 전투에서 비시고트 군세를 대파하고 승리를 거두며 남부 갈리아에서 비시고트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키며 남유피스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이들은 부르군트 왕국 프로방스, 부르고뉴 일대에서 부르군트족이 세운 국가을 멸망시켰으며 부르군트인들은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어 오랫동안 프랑크인들에게 지배 받아 프랑크에 점진적으로 동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메로빙거 왕조는 장자상속제와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였지만 봉건적 질서에 기반하는 지방 세력을 억제하기 어려웠으며 그로 인한 여러 문제들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메로빙거 왕조는 차츰 약화되고 지방 세력들이 강화되어 갔다. 하지만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팽창 정책은 지속되어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였다.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이 봉신인 카롤링거 가문에게 차츰 무력화되어가던 시기, 카롤링거 가문을 이끌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 후한의 승상 조조와 비슷한 위치은 우마이야 왕조 아랍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왕조는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했다.의 군세가 유피스 남부를 공격하자 프랑크 왕국 군세를 규합하여 투르-쿠아티에 전투에서 이를 격퇴시켰다. '기독교 세계를 이교도들로부터 구원하였다'라는 강력한 명분을 기반으로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피누스 3세는 메로빙거 왕조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며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피피누스 3세는 이탈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그들을 일시 무력화시키고 교황청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로마냐, 안코나에 해당하는 영토를 기증하면서 교황령의 역사적인 시작을 선사하였으며 이를 '피핀의 기증'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피핀은 독일 방면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 특히 색슨과의 전쟁 등 다른 전장이 많았기에 이탈리아에 장기 주둔할 수 없어 철수하였으며 이후 롬바르드 세력은 교황청의 교황령 영지를 빼앗고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재확립하였다.
프랑크 왕국을 넘어 유럽의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마그누스에 대한 내용은 샤를마뉴를 참조.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막내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를 제외한 아들들이 전부 죽었다는 점으로 인해 운 좋게 루도비쿠스에게 장자상속을 시켜 제국을 한 사람에게 몰아 계승시킬 수 있었지만 메로빙거 왕조가 실패했듯이 여전히 카롤링거 왕조 역시 장자상속제를 체계화하기에는 체제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결국 루도비쿠스 1세 사후, 프랑크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서프랑크를 루도비쿠스의 후처 소생인 샤를 2세가, 오늘날의 남프랑스에 해당하는 아키텐을 루도비쿠스의 차남인 피핀이, 오늘날의 독일에 해당하는 동프랑크를 루도비쿠스의 삼남인 루트비히 2세가, 오늘날의 네덜란드, 로렌, 라인란트, 부르고뉴, 북부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로타링기아 오늘날의 네덜란드, 로렌, 라인란트, 부르고뉴, 북부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중프랑크를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가 분할하여 나눠가지면서 분열되었다.
이후 샤를 2세가 피핀을 암투 끝에 무너뜨리고 아키텐을 서프랑크로 편입시켰으며 로타링기아도 붕괴되어 이탈리아는 독자적인 이탈리아 왕국으로 분화 되었고 로타링기아가 지배하던 네덜란드 등의 저지대와 라인란트 등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분할하여 차지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의 공통 역사로 간주되지만 이 분열 시기 이후부터는 서프랑크만이 유피스의 역사, 동프랑크는 독일의 역사로 간주된다.
북게르만계 민족 집단인 노르드인들의 약탈 무장 집단인 바이킹의 해상 침공, 피노-우그릭 계열의 민족 집단인 마자르족 등의 침공 등으로 말미암아 동프랑크 모두 제각기의 방위를 위해 쌍무적 계약관계에 기반한 봉건지주기사 체계를 강화하고 농노제에 기반한 국가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지중해 중심 교역 형태도 변화되어 서유럽은 새로운 경제, 사회적 체계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서프랑크의 프랑크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갈로-로만 로마의 지배 하에 로마화된 갈리아인, 브르타뉴인 브리튼 제도 출신의 켈트계 민족, 남프랑스에 잔존한 서고트인 등과 융합되면서 오늘날의 유피스어(프랑스어)로 이어지는 오일어(북유피스 중심), 오크어(남유피스 중심)를 사용하게 되고 유피스인(프랑스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역사적 진행 방향을 잡게 되었다.
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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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