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 공화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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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3월 27일 (금) 11:34 판

하이델베르크인.jpg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의 두개골

선사 시대

1907년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로서 독일 지역에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설이 입증되었다. 중석기 시대에 그들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조개를 채집하기도 했으며, Sippe 씨족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혁명의 여파는 독일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라이프찌히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때부터 씨족 중심의 원시 사회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귀족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경 소아시아로부터 철이 들어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업과 목축업이 분업되었다. 소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이때부터 전쟁으로 생긴 노예가 그 노동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노예가 로마 제국처럼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 시대

게르만족 사회

게르만족 벽화.jpg

  • 게르만 부족들의 민회를 새긴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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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를 그린 벽화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경에 게르만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 과정으로 인해 생겼다. 게르만족은 처음 부족연맹체로써 등장했다. 바이에른족알레마니족프랑켄족튀링겐족프리젠족작센족 등 같은 부족에 속한 사람들은 관습·종교·문화·법적 전통을 갖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혈족명으로 다른 부족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초기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정확한 생성과 소멸은 알 수 없다. 한 부족과 다른 부족을 구분짓는 종족적 특징들이 반드시 지속되거나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족간 합병이나 분할도 빈번했다. 이때 게르만 전사들은 귀족으로 발전했다. 초기 게르만족에 대해서 그나마 알려주는 사료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일부 나와 있다. 게르만족은 숲 속에서 살았는데 토지는 공유제였다. 경작시 공동체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분할되었다. 토지분할이 매해 일어나, 소유권은 영속적이지 않았다. 농업상의 필요에 의해 토지의 사유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지리적 조건 탓에 그들은 사냥과 목축업에 더 주력했던 것 같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은 민회에서 결정하였다. 독일 역사가들 중에는 이를 귀족사회라고 주장하는 파가 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따르면, 북동부의 게르만족은 민회 대신에 "제사장-왕"의 지위가 있었다. 민회는 서부 게르만족의 것이었다. 그들은 평시에는 공동의 행정기관이 없었으며, 전시에 지도자가 선출되기는 했으나, 제도화된 힘은 아니었다. 아무튼,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중요한 계층은 농민 전사층이었다. 귀족 계급도 "요청에 따른 복종"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귀족 계급 형성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이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라인강을 중심으로 로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로마게르만족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대패한 뒤로는 라인 강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라인강 진출은 게르만족에게 앞선 로마 문명을 전달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라인 강 주변의 트리어마인쯔쾰른 등지에는 로마군이 주둔했으며, 군용 도로가 건설되었다. 게르만족은 조금씩 로마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면, 게르만족 전사들은 점차 대규모로 로마군에 입대하게 된다. 심지어 부족 전체가 로마군으로 입대하는 사례가 발견되기까지 한다. 로마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그들은 로마군의 장비와 생산도구들을 불하받아, 급속히 귀족 계급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씨족적인 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