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뤼셀 왕국의 역사
고대
로마 제국의 지배
로메이넨 인 네데를란트는 프뤼셀 왕국의 전신인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을 말한다. 당대 최대의 제국이던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57년, 북갈리아를 정복하고 남부 네덜란드(오늘날의 리에주, 안트베르펜 근방) 지역으로 진군하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도 지속적인 저지대 정복사업을 벌였다. 당시 로마 장군이었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저지대를 게르만족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고, 페흐턴 지역에 운하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농업과 목축업으로 생계를 해결하던 저지대인들은 로마의 진출 이후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유목민적 성격을 가졌던 저지대 종족들 사이에 로마인들이 진출하면서 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의 쇠락과 게르만 족의 침입
2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내부로 침입하였다. 저지대 지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지에 요새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게르만족들로 구성된 군대로 국경을 지키게 될 정도로 로마 제국은 쇠락해졌다. 뒤이어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로마 제국 내로 침입하자, 로마는 제국을 경영할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특히 프랑크족은 340년 로마 제국과 협정을 체결하여 저지대 지역 방위를 맡게 되었다. 395년에는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나뉘어졌다. 4-5세기 동안 서로마 제국은 고트 족, 반달 족 등 이민족으로부터 이탈리아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북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철군시키기 시작했다. 406년 로마 군대가 철군하고 주인이 없어진 지역들을 새로이 들어온 이민족들이 차지하면서 로마 제국의 저지대 지역 지배는 사실상 끝이 났다.
암흑시대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기록은 없으나 일부 남은 문헌을 통해 추정하건대, 현재의 네덜란드 주 중부의 귀족들이 현재의 벨기에 주 중부에 공국을 세워 그 수도를 프뤼셀이라 명명하고는 중세 시대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되고 결국에는 부르고뉴 공국에게 통합되어 현재의 프뤼셀이라는 명칭의 근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세
중세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의 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성장하는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 되었다. 저지대 지역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인 플랑드르, 브라반트, 홀란트 등 여러 공국들이 등장하였으며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상공업 발달에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에 저지대 지역은 서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룩셈부르크 지방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공에게 통치받고 있었다. 원래 이 땅을 다스리던 룩셈부르크 가문은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고, 헝가리와 보헤미아까지도 손에 넣었었지만 결국은 혈통이 끊겨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고, 결국 지속적으로 국력이 약화되어16세기 프뤼셀에 통합되게 된다.
근세
프뤼셀-스페인 독립 전쟁
개요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에 이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제국에 귀속된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반란/독립전쟁이다.1568 ~ 1603년간 일어나서 35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최초로 네덜란드-벨기에(프뤼셀)-룩셈부르크의 통합이 이루어졌으며, 베네룩스 3국이 프뤼셀로 발전하여 프뤼셀 왕국을 이루게 된다.
배경
15세기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네덜란드 남부 지방을 통치하게 된다. 그런데 부르고뉴 공국의 남자 자손이 끊겼고 유일한 후계자는 여성인 마리 드 부르고뉴였다.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를 둘러싸고 프랑스가 눈독을 들였으나 마리는 프랑스를 뿌리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태자인 "마지막 기사"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와 결혼하면서 저지대의 땅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에 이어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카를 5세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헨트 출생이었다. 최초의 네덜란드 출신 황제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 카를 5세는 지역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러한 기대는 곧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수많은 서유럽 국가와 오스만 제국 등 수많은 적국과 전쟁을 치루느라 베네룩스 3국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고, 유례없는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게 된 저지대인들은 1539년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원수지간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양해까지 구해가며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고향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되며 시작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베네룩스 3국 모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자유와 관용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부에서 개신교는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특히 네덜란드 지역에 칼뱅파 개신교가 널리 스며들었다. 그러자 카를 5세는 1550년 4월 29일 '피의 칙령'을 내려 개신교 신자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한 후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는 카를의 장남이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카를 5세는 가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베네룩스 3국을 자신의 고항으로 본 반면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란 펠리페 2세는 즉위하자마자 저지대와 룩셈부르크 전역에 가혹한 과세와 개신교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다. 게다가 알바 공과 같은 스페인 파견 총독들의 실정과 전쟁으로 인한 수탈, 거기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의 약탈 등으로 반발이 거세진다. 빌럼 반 오라녜를 위시로 한 귀족들은 일련의 자유를 요구했으나 펠리페 2세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
펠리페 2세의 억압적인 통치가 이어지자 처음에 저지대의 대표적인 지도층이었던 에흐몬트, 흄, 오라녜공 빌렘 등은 펠리페 2세에게 억압적인 통치를 완화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탄원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동안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인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펠리페 2세에 대항한 반란의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반란을 경고하는 귀족들의 청원을 무시했다.
1566년 마침내 개신교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칼뱅주의자들은 성당에 있는 성인들의 성상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성당과 성상 등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최남부 혼트스호터에서 최북부 흐로닝언까지 네덜란드 지방과 벨기에 일부의 성당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성상 파괴 운동을 반역으로 간주한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견하여 저지대와 룩셈부르크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알바 공은 "피의 법정"이라 불린 특별 종교재판을 열어 매일 수백명 이상을 처형했다. 네덜란드의 지도자였던 에흐몬트, 호르너같은 귀족들까지 모두 사형당했다. 이들은 저지대의 지도자였지만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스페인의 강압 통치를 완화해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알바 공은 이들이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을 배풀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허나, 또다른 귀족 출신 지도자인 오라녜공 빌렘은 알바 공의 탄압을 피해 아내의 친정인 작센으로 피신했다가 1568년 군대를 이끌고 베네룩스로 귀환했다. 오라녜공 빌렘은 베네룩스 3국의 귀족과 지도자들부터 용병과 농민까지 많은 수의 독립군을 소집하였고 수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통적인 이름인 프뤼셀을 따와 프뤼셀 독립군을 조직하게 된다. 이로서 빌렘이 이끄는 프뤼셀 독립군과 알바 공과 스페인 사이에 프뤼셀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 초기에 오라녜공 빌렘이 이끄는 프뤼셀은 헤일리헤를레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빌렘은 베네룩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 때를 기점으로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 일대는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가 무력화되었다. 비밀리에 반 스페인 국가로부터 재정 과 군사 지원을 받아왔던 프뤼셀과는 달리 스페인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비롯해 많은 국가와의 전쟁 또한 치루고 있었기에 점점 재정이 고갈되어 갔고, 결국 이에 스페인 궁정은 군대에 급료를 지불하지 못했고 이에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은 1576년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각지에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특히 악명 높은 "안트베르펜 학살"이 발생하자 많은 벨기에인들이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협조하지 않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남부 벨기에 지방의 가톨릭 교도들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느니 프뤼셀에 가담하기로 했고,1576년 베네룩스 3국에서 스페인을 축출하기 위해 네덜란드, 벨기에 북부와 룩셈부르크, 벨기에 남부가 서로간의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협력하기로 하는 겐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금은을 들여와 재정을 확충하려 했으나, 반 스페인 국가와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의 방해로 이마저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10년 간의 휴전
결국 재정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스페인은 1580년 프뤼셀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고 자국 국민의 피해가 심했던 프뤼셀은 10년의 휴전에 동의하게 된다. 이 휴전 기간동안 프뤼셀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을 추대하였으며,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스페인은 오히려 더 심해지는 국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 2차 전쟁
1590년, 10년 간의 휴전이 끝나고 스페인은 벨기에 남부를 집중 공격하여 몇몇 성들을 함락시켰지만 이미 기울어가던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603년 프뤼셀의 영토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은 베네룩스 지방에 대한 프뤼셀의 통치권을 인정한 리에주 조약(1604)을 맺게 되고 프뤼셀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황금기
독립은 했지만 국토, 인구, 자원 모두 열세였고 스페인과의 관계도 악화될 만큼 악화돼서 프뤼셀 선박의 스페인 입항이 금지당해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없어 프뤼셀 왕국의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자, 1605년 투자금 750만 길더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더 끌어모은 다음 대양으로 나섰다. 동인도 회사에 최초로 자본을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선주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다. 또한 동인도 주식회사 이외에 160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설립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8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과부하를 막기위해 1607년에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프뤼셀의 금융업은 더욱 발전되었으며,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불과 3%에 불과한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한편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40%가 넘는 이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결국 파산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가지 혁신이 하나의 체계가 되자 프뤼셀은 신대륙과 아프리카, 인도, 중국, 일본 등과의 귀중품(설탕 등)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결국 17세기의 2만여 척에 달하는 세계 전체의 무역선 중 만 오천 척 정도는 프뤼셀 왕국 국적선이었다. 이러한 프뤼셀의 전성기는 황금시대라고 불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