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강역:동아의 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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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주국
Empire Of Manchuria, Manchuria
대만주국 국기.png 만주국 국장.png
국기 국장
五族協和的 王道樂土
"오족협화적 왕도낙토"
상징
국가 만주국 건국가
국화 보춘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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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건국 1932년 3월 1일
제정 성립, 강덕제 즉위 1934년 3월 1일
만주 내전 1950년 6월 25일
만주내전 정전협정 체결 1953년 6월 28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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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신징특별시
면적 1,191,081km2
내수면 비율 0.3%
접경국 중공,중화민국,소련,몽골,한국
인접국 중화민국,소련,중공,일본,한국,몽골등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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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징특별시 1개 시 10도시구 8농촌구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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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43,23만 3,954명
인종 구성 한족,만주족,야마토족,몽골족,한민족
공용어 협화어,만어(중국어),몽골어,고유만주어
모국어 중국어
국민어 고유만주어
공용 문자 한자,가나,몽골문자,키릴 문자,한글
종교 국교 없음(정교분리)
분포 불교,유교,국가신토
군대 만주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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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내견적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만주국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제
만주국 협화명예회장 아이신기오로 푸제
내각총리대신 장쉐량
만주국 황태자 아이신기오로 위옌
여당 만주국 협화회
연립여당 X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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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외환보유액 X
신용등급 X
화폐 공식 화폐 만주 위안
ISO 4217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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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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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국 -

개요

만주국(滿洲國)은 1932년 3월에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 동북 지방(만주)에 세운 괴뢰국이었으나, 일제(日帝)의 패망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현 황제는 푸이의 동생인 푸제이며 연호는 흥기(興起)이다.

역사

만주 자체는 만주국 수립 훨씬 이전인 1905년부터 일본의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만주국을 수립하기 훨씬 이전인 1905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만주를 지속적으로 침탈하며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만주국의 수립은 일본의 대륙정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으로 뤼순과 다롄을 점령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통하여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의 조차권을 넘겨 받고 이 지역 이름을 관동주라 정한다. 관동이라는 명칭이 산해관 동쪽을 일컫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동 반도 일대에 러시아가 관동주라는 이름을 붙였고 일본은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 면적은 3,462km2이고 주요 도시는 해군 기지 뤼순과 무역항 다롄이다. 그리고는 관동주청를 신설(1905년 10월 17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관동총독부'는 이듬해 9월 1일 폐지되어 하급 부서의 '관동도독부'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총독'이 '도독'으로 바뀐 것이 전부이다. 이후 1919년 4월 다시 관동청으로 변경된다.

만주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관동군이다. 만철은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기 위해 새로 창설된 6개 독립수비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만철은 이름과 달리 일개 철도회사가 아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만주 버전에 가까웠다. 실제 업무 범위는 철도 경영 외에도 광업, 해운, 항만, 부두, 발전, 숙박, 창고업, 제철, 조사 활동에 이르며, 출자 회사, 조성 회사, 지방 시설, 교육시설까지 포함한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일본의 실질적인 국책 회사이다. 실제로 1923년 이후 패망까지 일본 제국 전체의 모든 법인 중에서 자본금 규모 1위의 법인이었다. 일본 3대 재벌 못지않은, 그보다 더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었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가 50% 지분을 가진 회사로 시작했다가 이후 100% 보유한 사실상의 국책 기업이 된다.

이 때문에 만철 성립 당시부터 초대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의 입에서 "만주는 영사, 만철, 도독부의 이른바 3두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어 통일성이 결여될 것이고, 여기에 육군과 해군까지 가세하면 5두 정치가 될 우려가 있다." 하는 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만주에 해군은 얼씬도 못했고 육군에서도 사실상 독립하여 대본영 직할이였던 관동군이 육군의 개입을 배제하고 만주를 지배하였다.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관동군의 폭주는 고토 신페이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영역. 결과적으로는 신페이가 예측한 영사, 만철, 도독부에 관동군이 추가된 4두 정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 때문에 '만철 총재는 관동도독 밑에 있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도독부 고문으로서 외무대신의 감독 아래 도독부의 행정 일체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만주 경영 및 행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만주 경영 외에 만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조사부를 통한 관동군의 씽크탱크 기능이었다. 만주 경영 초기에 만철은 '동아경제조사국'을 설치하여 25년간 중일관계와 동아시아 전반, 나아가 세계 경제 전반의 동향 조사 및 연구를 맡았다. 이 자료들은 이후 만주국 성립에 없어서 안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성립과 함께 관동군의 정책 입안 부서 구실을 하며 '경제조사회'에 흡수 된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사 범위는 유럽까지 확대, '대조사부'로 확대되었다. 조사부는 인원이 2천명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이었으며, 예산 규모가 대폭 확대되면서 파격적인 대우에 매혹된 제국대학 출신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관동군은 1919년 관동도독부가 폐지되고 관동청이 설치되면서 관동주 방위와 만철선 보호임무를 목적으로 하는 독립된 재만 군사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철도 수비뿐만 아니라 일본의 만주 권익 보호, 대소 전략 수행의 주체로서 임무를 점차 담당해 나갔던 것이다. 이 병력은 만주사변 전에는 2년 단위로 교체 파견되는 주차사관과 6개 대대의 수비대대를 합쳐 약 1만 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27년에 일본군은 국민당의 1차 북벌로부터 일본 거류민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차 산동파병을 단행했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철수했지만,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진행되던 와중인 1928년에 2차 산동출병을 단행,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면서 제남 사건을 일으켰다. 제남 사건 자체는 흐지부지하게 끝났으나 일본은 만몽분리정책을 추구하면서 만주와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본의 권익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등 강경파는 만주로 퇴각하던 중화민국 육해공대원수 장쭤린을 암살하는 등 극단적 수단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관동군의 일부 과격파 장교들은 여전히 이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과격파 장교들은 내부적인 문제로 당면한 경제 위기와 국내의 사회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바로 대외적 모험 정책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이때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들에게 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국방사상 보급 운동'을 통해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보라며 "국내에서 눈을 외부로 돌려야 한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 그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좀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선동했고, 국가적으로는 일본 농민 50만 명쯤 만주로 이주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1930년 말에는 만주 재류 일본인의 수가 22만 8,700명에 달해 해외에 거주하는 최대 일본인 집단이 되어 사실상 일본 내지의 과잉인구를 배출하는 배출구 구실을 하였고, 그들은 이미 만주의 절대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일본의 만주 점령 계획은 어디까지나 소련에 대한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 중 하나일 뿐이였다. 이를 위해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가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결탁, 이미 침략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유조호 사건)이 일어났는데 육군 중앙부에 통보된 것은 18일 심야의 일이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19일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관동군은 사건 발생 18시간 만에 봉천(심양), 안동, 장춘, 우장 등 남만주철도 지대의 중요 지점을 모조리 석권해 버렸다. 또한 관동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야시 센주로의 조선 주둔 일본군은 국경을 넘지 말라는 중앙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21일 만주로 진입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변 불확대와 국지 해결 방침안을 결의하였다가 사건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추후 승인하는 형태로 관동군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당시 정부가 군에 대한 견제력을 잃은 것이며, 군 중앙에서도 관동군을 통제하지 못했다. 이렇게 군대가 정부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현상은 관동군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군대 조직에서 관습이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일본의 졸전과 패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장 육군과 해군이라는 엄연한 한 나라의 정규군들이 서로 다른 나라의 군대라도 되는 것처럼 적대를 한 끝에 육군에서 자체적으로 해군 전력을 키운다고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개발하는 미친 사례까지 등장했을 정도이다.

1932년 1월 28일에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습격을 받는 마옥산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관심을 만주에서 떼어내 상하이로 옮겨놓은 사이에 하얼빈 점령이나 만주국 건국을 촉진하려는 계략이었다. 관동군의 의뢰를 받은 상해주재 무관 보좌관 다나카 소령에게 매수 당한 중국인들이 범인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각국의 시선이 세계적인 경제 대도시인 상하이에 집중된 사이에 만주국 건국에 착수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의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장악한 관동군은 정부와 군 중앙의 견제를 뿌리치고 만주 각처에서 이른바 '만몽(滿蒙) 신국가'의 건국 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1932년 2월 창춘(長春)에서 이른바 '신국가 건설회의'를 조직, 국호는 '대중(大中)', '대동(大同)'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최종안으로 '만주국'이 선택되었고 대동은 연호로 사용되었다. 또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패도정치와 대응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신국가의 정체(政體)를 두고서는 공화파, 군주파, 민주파로 나뉘어 격론을 하였는데, 일단 당분간 "형체상 공화국, 실질은 군주제에 의한 민주제를 채용"하여 국가원수의 명칭을 "집정(執政)"으로 하는 공화국으로 출발하기로 하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절대군주제나 입헌군주제로 바꾸기로 하였다. 그리고 집정으로는 청나라가 망하고 폐위된 황제 선통제를 옹립했다.

이리하여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성립을 선언하면서 신징(新京)을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으며, 탕강자에 머물고 있던 푸이(선통제)는 3월 9일 장춘에 도착, 이 날 오후 시청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대전(大典)에서 장징후이로부터 순금의 옥새를 봉정받고 집정 취임을 선포하였으며,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오후 5시에 의식을 마쳤다.

신흥 만주국은 일본 이하 17개국에 대해 승인을 요구하는 대외통고를 발했다. 그러자 열국은 단지 통고를 받았다는 회답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한 것은 1932년 9월 15일이었지만 이에 이르기 위해서는 5.15 사건에 따른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암살이라는 불상사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서 엘살바도르, 바이마르 공화국, 폴란드, 이탈리아 왕국, 코스타리카, 불가리아 왕국, 스페인 제2공화국, 헝가리 왕국,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일부 나라가 승인하였다. 당연히 국제 연맹의 승인은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곧 만주국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 당시 중국령이던 열하성(熱河省)을 병탄했다.

만주국의 국토는 앞서 말한 동북 3성과 열하성에 이르러서 면적이 한반도의 6배였으며, 영불독 3국을 합친 것보다 컸다. 그리고 인구는 3천만 명이나 됐다.

1934년 1월이 되자, 당초 어정쩡하게 '집정'이라는 이름으로 봉합했던 국가원수 명칭을 만주국 건국 만 2년을 맞는 1934년 3월 1일부로 제정을 선포할 방침이 정해졌다.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칭제할 때와 비슷하게도 푸이를 황제로 세우라는 청원서를 조작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러면서 "절대 (청조) 복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종전대로 "왕도정치"를 행하는 것이지 전제정치(專政)을 꾀하는 것이 아님"을 달아두긴 했다. 아무튼 이 해 3월 1일 푸이는 "국호를 대만주제국,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친다"는 조서를 반포하였으며, 이른 아침 현재의 창춘인 당시의 신징(新京, 신경) 교외에 설치된 제단에서 교제(郊祭)의 의식을 마치고 정오에 만주국 황궁에서 즉위식을 가지면서 정식으로 대만주제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3월 2일에는 연회가 열렸고, 4일에는 신징에서 열병식, 5일에는 하얼빈에서 관함식을 가졌다.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 명이었지만, 1941년에 가면 인구가 5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항복하자, 만주국은 선택의 기로에 빠졌다. 자신들도 항복하느냐, 관동군과 계속 이어가느냐. 사실 무조건적으로 항복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16일, 황제인 푸이도 항복성명을 미군정에게 전하며, 미군이 만주국에 들어섰다. 하지만, 푸이는 일본처럼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위해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며, 국가 자체도 냉전이라는 새 체제경쟁으로 접어들고 있었기에, 만주국은 대만주제국에서 대만주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괴뢰정부에서 진정한 국가로서 출범하게 된다.

1950년 6월 23일,만주공산당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급작스런 봉기를 일으키며, 6월 25일 만주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 3년뒤인 1953년 6월 28일, 정전협정을 맺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67년 10월 17일 선통제 푸이가 사망하며 자녀가 없던 푸이로 인해 푸제가 황위를 상속하며 제2대 황제인 흥기제로 즉위했다.

현 총리인 장쉐량은 본래 중국국민당 소속이자 현 황제인 푸제의 전처,탕스샤와 내연 관계이기에 사이가 매우 험악했으나,장쉐량의 아버지인 장쭤린이 봉천군벌의 수장이었고 국민당 가입또한 일본에게 자신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입한 것에 가깝기에 장쉐량은 항상 만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만주가 미군정에 돌입하고 미군에서 그를 만주국 초대 국방부장 직을 제의하였고 장쉐량이 이를 수락하며 만주로 귀환하게되었으며 당시 황태자였던 푸제에게 내연에대해 사과하였고 푸제또한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동조한것을 사과하였다.

이후 만주내전까지 국방부장 직을 지내다가 내전 후반에 소련에 의한 암살 시도로 인해 오른쪽눈이 실명하여 국방부장을 은퇴하였으며 이후 정치계에 진입하여 총리직을 따내게된다.

만주내전

자세한 내용은 만주내전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정치

만주국 정부는 국가 원수로서 황제(皇帝), 자문 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 행정 기관으로서 국무원(國務院), 사법 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있다.

만주국 협화회(滿州國 協和會)는 1948년 8월 15일부터 사실상 일당제 과반 정당으로써 21년동안 만주국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

국무원은 집정의 명령을 받아 행정권을 행한다. 국무원에는 민정·외교·군정·재정·실업·교통·사법의 행정 각부와 국부총리, 각부 총장을 둔다.

법원은 민사 형사의 소송을 심판한다. 이외 기밀·인사·주계·수용에 관한 사항은 국무총리가 각부로부터 분리해서 직접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군사

자세한 내용은 만주국군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경찰

만주국 경찰(滿州國 警察)은 만주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보안국(保安局)

보안국은 만주국의 정보기관이다.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된 뒤에도 만주국 안에서는 여러 가지 반체제 세력이 암약하고 있었다. 과거 군벌의 잔당이나 비적 이외에도 소련,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의 지하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국민당은 만주국의 관리로 많은 당원을 잠입시키고 있었다.

반체제 세력을 단속하는 경찰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극비 정보의 은닉이 어려웠다. 조직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라고 하는 일본의 특별고등경찰보다 더욱 고도의 기밀성을 갖춘 비밀 조직이 검토되었다. 1937년(강덕 4년) 12월 보안국이 설치됐다.

비밀 조직이기 때문에 경찰의 조직의 일개 국으로 위장했다. 관동군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관동군의 특무기관의 지도를 받았다. 보안국의 제일선의 지하 조직은 특별정첩반(特別偵諜班)이라고 불렸으며, 조직의 장인 총반장 및 반장은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 직원 양성 기관으로서 1944년(강덕 11년) 미도리엔 학원(緑園学院)이 극비리에 설치되었다.

동북아시아 최고의 정보기관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 이유는 일제의 정보기술을 그대로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종교

만주국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들에서는 유교나 도교 신앙이 보편적이다. 특히 불교가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다.

황제인 푸이 자신부터가 불경을 즐겨 읽는 독실한 불제자이기도 했고, 사회 지도층에서도 불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다.

민족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종교도 많다. 후이족은 이슬람교, 몽골족은 티베트 불교, 다우르족이나 퉁구스계 제민족은 샤머니즘 신앙, 백계 러시아인들은 정교회를 신봉하기도 한다.

재만 한인의 경우는 유교와 그리스도교, 천도교, 대종교 등이 널리 퍼져있었다. 한인 다수 거주 지역인 간도와 만주 지방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재만 한인 사회는 상당히 강한 종교성을 보인다.

언어

만주어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는 유일한 언어지만, 생각보다 실사용자는 적다.

오히려 표준 중국어 사용빈도가 더 높다. 만주어 특유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 표준 중국어가 다른 민족과도 이야기 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만주어 빈도를 늘리기 위해, 국어(國語)에 중국어가 폐지되고 만주어가 공식으로 등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