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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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죽음과 주사위는 모두에게 공평하다. |
사무엘 푸츠 |
죽음이란 생명체의 삶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명체의 장기 활동, 심장 박동 중단, 혈액 순환 중단 등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 또는 의식을 되돌릴 수 없는 상태. 말미암아 신체가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죽음의 기준과 판단
상술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의 영구적인 정지'라는 정의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기능이 정지했더라도 종종 회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영구히 회복되지 않는 상태인 것은 어느 시점부터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 과거에는 이 판정이 엄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를 치렀어도 사실은 죽은 게 아니어서 사실상 생매장이 되어버리거나 장례 중에 깨어나는 사태도 있었다.[1]
과거에는 심장이 정지하는 심장마비가 오면 살릴 방법이 없었으므로 심장사(心臟死)가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의 기준이었다. 따라서 목이나 가슴의 맥을 짚어 본 뒤 박동이 느껴지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심폐소생술, 심장충격기 같은 응급요법과 다양한 심장 관련 의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심장이 아주 일순간 정지해도 빠른 처치로 소생이 가능하다는 게 알려지면서 죽음의 정의는 심장의 정지에서 더 근본적인 뇌의 기능 정지로 옮겨 갔다.[2] 뇌의 다른 부분이 손상되었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부분은 멀쩡한 식물인간 상태와, 뇌의 전반적인 기능이 모두 정지한 뇌사(腦死)가 이에 속한다. 특히 식물인간은 일부에서 환자가 의식을 갖고 있으며 몇몇은 깨어나기도 하는 사례가 보고되면서, 196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는 뇌파와 호흡계까지 정지한, 완전한 뇌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3]
그러나 식물인간 상태의 사람을 안락사시키거나, 뇌사자를 장기기증에 사용해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뇌사와 심장사를 복합적으로 판단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모든 세포의 기능 정지까지 주장되었다. 참수 등 '즉사'로 판정되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그 즉시 죽음이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숨을 참는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게 아닌 것처럼 뇌를 향한 혈류가 끊어져 영양소의 공급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세포 자체가 ATP 등의 형태로 저장해 둔 에너지원이 존재한다.[4] 참수를 해도 심장은 바로 멈추지 않으며, 뇌도 활동한다.[5]
체내의 모든 세포의 생명 활동이 멈추고, 자체 효소와 부패균의 활동으로 세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죽은 지 충분한 시간이 지나 모든 세포가 죽은 사람, 죽어서 화장을 한 사람은 현재로서는 살릴 방도가 전혀 없으며, 퍼센티지로 치면 인체의 100%가 기능 정지 및 복구 불가 상태라는 의미이므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사망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6] 물론 이론상으로는 확률이 아예 0은 아니라서 다시 짜맞춰 원상복구가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나온 묘사처럼, 생명체의 주인을 유전자로 두고 인간의 육신을 '유전자를 후대에 전파하기 위한 운반 수단'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자식이 있어 자신의 유전자가 복제, 전달된다면 죽지 않은 것이 된다. 반대로 내 후손의 대가 끊기면 죽는 것이다.
미래에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수많은 죽은 세포 하나하나를 살릴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면 위 정의는 재검토될 것이다. 레이 커즈와일 등 기술적 특이점 지지자나 안티에이징을 연구하는 하버드대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는 머지 않은 미래에 죽음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경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죽음의 기준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가령 뇌는 매우 심각한 수준의 산소 결핍에서도 생존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과거에는 뇌에 산소 공급이 얼마 이상 끊기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미국 뉴욕 대학교 랭온 헬스 병원(NYU Langone Health)의 중환자 치료 및 소생술 연구 책임자인 샘 파니아(Sam Parnia)는 "죽음을 회복 불가능한 사건으로 여기기보다는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일시적인 산소 결핍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즉, 일반적으로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시점이고 그것을 넘어가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죽음이란 연속적 과정이고 어느 한 지점을 짚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간의 죽음에 대한 통념은 이러한 의료 지식의 발달을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은 일반적으로 매우 공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그 공포에 절망하지 않고, 이를 이겨내고자 노력해 왔다. 죽음에 대한 저항과 그 고찰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증거들로 뒷받침되어 왔다.
죽음에 대한 인식(필연적)은 보통 7세에서 11세 사이에 형성된다.[7] 이것을 알아낸 방법도 약간 특이한데, 연구자들은 연구 대상인 아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다음에 같은 나라 아이와 다른 나라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고 둘 중 어느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이전 연구에 따르면 죽음을 이해하는 성인은 죽음의 공포를 느낄 때 자신과 동류인 사람들, 즉 자기 공동체의 일원과 가까워지려고 하는데[8] 이를 이용한 것이다. 죽음을 어렴풋이 인식하는 아이들은 교묘한 속임수나 힘, 또는 전지전능한 누군가(부모 등)를 통해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9] 그러한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삶을 어둡게 보는 염세주의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이런 염세주의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합쳐져서 심화한 것을 죽음 공포증이라고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철학, 예술, 종교 등 인류의 심층적인 정신 활동 중에서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발달한 것들이 많다.
인간이 죽음의 공포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경험한 여러 철학자 내지 사상가들[10]은 죽음과 뗄 수 없는 탄생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적지않게 회의감을 표하였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11]는 기조의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필연적인 죽음과 그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이기도 하다. 이러한 염세적 허무주의를 기반으로 출산과 탄생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과거에 비해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다.
에피쿠로스는 우리는 (죽는 순간 죽음을 경험할 주체가 사라져서)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에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흔히 이를 죽음의 공포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곤 하나, 그런 것은 아니고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에게 죽을 때 '죽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으니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 하며 시간을 낭비할 바에 쾌락을 좇으라고 말한 것이다. 그 쾌락은 색욕이나 식욕 같은 원초적이고 낮은 쾌락이 아니라 자아실현 같은 높은 수준의 쾌락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주장한 것이므로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온갖 미신들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숫자 4를 꺼리는 문화(4자 금기)가 가장 대표적인데, 대한민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 숫자 4와 죽을 사(死)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4를 죽음의 숫자, 불길한 숫자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건물의 4층 표시가 F로 대체된 경우가 많으며, 특히 병원에서는 4를 모조리 없애기도 한다.[12]
원인
불로불사는 가능한가?
다양한 노력
실제로 불로불사하는 생물
학문적 관점
철학
인문학
생물학
의학
종교적 관점
그리스도교
이슬람
불교
관련 문서
각주
- ↑ 때문에 관 문서에서도 보듯 서구권에서는 그런 사태를 대비하는 장치가 존재했다. 동아시아에서는 꽤 오랫동안 장례식을 치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 ↑ 물론 지금도 심장의 역할은 막대하며, 관념적으로도 심장은 생명과 자주 얽힌다. 후술할 뇌가 정신적 생명의 상징이라면 심장은 육체적 생명의 상징으로 주로 대응된다.
- ↑ The
- ↑ 물론 이와 반대로 생명 활동에 필요는 하나 필수까지는 아닌 부위를 잃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도 있는데 이는 과다출혈이나 고통으로 인한 쇼크사라고 보는 게 맞다.
- ↑ 하지만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 잘린 머리를 들고 걸었다든지, 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당연한데 머리가 잘리면 뇌의 전기 신호가 몸으로 전달되지 않으므로 몸은 반응할 리가 없고, 말을 하려면 성대가 있어야하는데 참수 시 성대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역시 전설은 전설이다.
- ↑ 단, 설령 생명 활동에 꼭 필요한 부위가 파괴되었다고 해도 이런 게 이루어지기 전에 신체의 일부를 타인에게 이식받았다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 ↑ Florian, V., & Mikulincer, M. (1998). Terror management in childhood: Does death conceptualization moderate the effects of mortality salience on acceptance of similar and different other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24(10), 1104-1112
- ↑ Pyszczynski, T., Greenberg, J., & Solomon, S. (1997). Why do we need what we need? A terror management perspective on the roots of human social motivation. Psychological inquiry, 8(1), 1-20에서 재인용
- ↑ Pyszczynski, T., Greenberg, J., & Solomon, S. '슬픈 불멸주의자', 이은경 역, 흐름출판, 2016, pp53-54
- ↑ 대표적으로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에밀 시오랑, 데이비드 베너타, 그리고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등이 있다.
- ↑ 혹은 태어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낫다.
- ↑ 4층뿐만 아니라 병실의 4가 들어간 호수, 진료 대기표의 4가 들어간 번호 등을 모두 건너뛰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