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공화국의 역사

Fidel Castro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월 18일 (금) 00:39 판

가상국가 쿠바 공화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선사시대

쿠바 섬에는 원래 최소한 천년전, 그리고 아마도 6~8천년전에 남부· 중부·북부 아메리카에서 건너왔던 원주민이 물고기를 잡거나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후손인 타이노족(族)·시보네족으로 불리는 5만여 명의 원주민들은 고도로 발달된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거주하고 있었다. 타이노족은 농경생활을, 시보니족은 농경과 수렵, 채취 생활을 하는 종족이었다. 일부에서는 구리 무역이 성행했다고 주장해 오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유물 이 아메리카 대륙 본토에서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지배

1492년 10월 27일, 제1차 항해중이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현재의 쿠바 섬을 발견하고 이 섬을 스페인 영토로 잠시 점유하고, 왕자 후안(Juan)의 이름을 따서, 후안 섬(Isla Juana)이라고 명명했다. 1511년 스페인 제국의 정착지가 스페인에서 파견한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에 의해서 바라코아에 최초로 세워졌다.
1512년 벨라스케스는 300명을 이끌고 이스파니올라를 떠나 쿠바로 향하여 본격적으로 스페인령임을 선포하고는 2년동안 일곱 곳의 개척지를 건설했다. 미래에 수도가 될 산 크리스토발 데 라 아바나(San Cristóbal de la Habana, 1515년 설립) 등 다른 마을도 그 뒤를 이었다. 2년동안 스페인인은 수천 명의 원주민을 죽였으며 벨라스케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원주민을 모두 서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당시 쿠바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1516년 벨라스케스가 멕시코로 네 번의 원정을 후원하여 그 중 1519년에서 1521년까지의 에르난 코르테스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에 쿠바는 남미로 가는 스페인의 관문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엔코미엔다 제도가 구축되면서 커다란 사유지가 형성되었고, 스페인은 기독교로의 개종에 저항하는 약 10만명의 원주민을 억압하고 종교 교육의 구실 아래 인디언에 대한 노예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
1542년에 엔코미엔다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혹독한 착취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질병에 의해 인디언 인구는 5,000여 명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사금(砂金)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원주민들은 1528년의 대(對)스페인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을 거쳐, 1세기 만에 모두 사라졌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감염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지배적인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이런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노예 노동력의 수를 유지했다. 북미의 노예 매매와 다르게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별로 함께 살게 되어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문화 중 몇몇 측면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목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고 소와 관련된 생산가죽이나 말린 소고기는 18세기에 담배가 쿠바의 주요 돈벌이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산업이 되었다.

미국 - 스페인 전쟁

스페인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이 식민지 관리를 거의 못하게 되자, 당시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 서반구에 개입하지 말라 "라는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유럽열강들의 아메리카 개입 반대를 천명했고 쿠바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허나 다른 중남미 식민지는 포기한 스페인이지만 쿠바의 독립만큼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는 **10년 전쟁(1868~1878)**에서 쿠바독립군을 격파한걸 증명한 셈이다. 그 전쟁 중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및 다수의 크리욜료들이 사망하였고 "야라의 외침"으로 유명한 세스페데스 역시 이 전쟁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쿠바의 독립운동가 안토니오 마세오는 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이후 사망한다. 한편 미국 역시 쿠바를 전략적 중요한 요충지인걸 파악했고 노리고 있었다. 이후 1895년 쿠바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독립군들은 일사천리의 길을 뚫으려고 했으나 스페인의 기습공격으로 현 쿠바의 명실상부 쿠바의 아버지, 쿠바의 영원한 문학국부 호세 마르티가 그 자리에서 총격으로 사망한다. 이후 메인 함 사건으로 1896년 전쟁을 발발했다. 이후 미국은 카리브해 전역을 점령하게 된다.

미국 영향 아래, 쿠바

1898년에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은 쿠바에 군정을 실시하고 3년뒤인 1902년 쿠바를 건국시켰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쿠바의 독립운동가이자 친미주의자인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독립한 쿠바의 헌법에는 미국이 재정·외교문제를 감독할 권리를 주고 플랫 수정안을 승인해 완전한 독립국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1906년 팔마는 재선에 성공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에 휩싸이고 이에 따라 반란이 일어나고 정부군이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팔마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쿠바를 재점령한다. 1909년 쿠바는 다시 독립하지만, 미국의 영향력은 그대로였다.

미국의 보호 허나, 경제가 몰락하다.

1917년에는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서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다음날인 1917년 4월 7일,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후 쿠바는 승전국이 되었지만 쿠바에게 돌아온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경제는 사탕수수를 중심으로 한 농산물 산업과 관광 산업으로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공황이 터지자 미국의 영향이 컸던 쿠바의 경제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새로운 시도

1933년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며,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의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 이들은 플랫 수정안을 무효라 선언하고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중사들의 반란, 그리고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쿠바

100일만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주축으로한 쿠데타로 무너졌으며 카를로스 멘디에타 이 몬테푸르의 임시 정부도 바티스타에 의해 무너졌다. 그 이후 대통령인 마누엘 마르케스 스털링도 무려 6시간만에 실각했고 그 뒤 집권한 카를로스 멘디에타, 호세 아그리 피노 바넷, 미겔 마리아노 고메즈는 하나같이 임기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실각하였으며, 페데리코 라레도 브루의 3년동안의 집권을 거쳐 1940년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바티스타는 교육 기관 확대, 경제 발전으로 쿠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에는 라몬 그라우가, 1948년에는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기간동안 쿠바의 경제는 크게 발전하여 도시의 중산층이 부유해졌으나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허나 이때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등장

1926년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이민온 한 지주의 아들로 비론이라 하는 쿠바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피델 카스트로는 지주라는 배경답게 중산층 이상은 되는 집안이었고 고등 교육도 받았다. 이후 법대에 들어가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이후 학생 운동에 입문한다. 그곳에서 반제국주의,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공부는 딱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토론하는 것과 웅변의 대가라서 이후 학생운동권의 인사가 된다.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혁명지도자로 거듭난다.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에서 무장봉기해 몬카다 경찰서를 습격했으나 실패해 잡히고 말았다. 당시 바티스타 정권은 군인 1명이 사망하고 게릴라 10명의 총살로 보복했다. 그런데 마침 카스트로를 생포한 군 수색대장이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카스트로는 덕분에 즉결처분은 면할 수 있었다. 법정에서 15년형을 선고받은 카스트로는 "너희들이 현재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라는 간지폭풍의 명언을 통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한 사건은 그의 이름을 오히려 드높였다.

그란마 호 상륙 작전

바티스타는 뜨겁게 달아오른 여론에 굴복하여 2년 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가 특별사면을 행하자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했다. 카스트로는 동생 라울을 통해 소련 정부로부터 무장 혁명에 필요한 무기 지원과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퇴역장교 알베르토 바조를 교관으로 삼아 기습 작전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영원한 맹우 체 게바라(Che Guevara) 와 만났으며, 이렇게 해서 정예화된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1956년 82명의 동지들과 함께 그란마호를 타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다시 쿠바로 잠입했다. 그러나 이를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군에 의해 일행은 섬멸되었고, 가까스로 도주한 10여명만이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기나긴 게릴라전을 시작하게 된다.
1957년 미국의 허버트 매튜스 기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카스트로와 인터뷰를 하고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카스트로는 하루아침에 무명의 게릴라에서 독재에 항거 투쟁하고 있는 ‘현대판 로빈 후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지하 세력을 구축해 그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야과하이 전투, 그리고 쿠바혁명

쿠바의 도시 전체에 탄탄한 지하 무장 세력을 구축한 카스트로 혁명군은 1958년 12월 체게바라를 선봉으로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기선을 제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전국에 숨어 있던 지하 혁명 세력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 정부군을 습격했다. 사방에서 적을 맞은 바티스타 정부군은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줄지어 투항하게 되었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혁명군은 마침내 1958년 12월 31일, 아바나에서의 시민봉기와 함께 아바나를 함락시켰고 독재자 바티스타는 쿠바를 떠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공산 쿠바

카스트로는 정권을 잡은 뒤 제일 먼저 미국계 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어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여 대다수가 미국인 소유로 되어 있는 설탕, 석유 회사를 접수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또 집단농장 운영을 통해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동시에 군비를 강화해 미국의 침공에 대비했다. 집단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문맹퇴치정책을 통해 모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교육과 양질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보건과 복지정책 향상을 통해 중남미 지역에서 최고의 의료서비스와 주민복지정책을 추구했다.
이 같은 혁명정부의 노력과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으로 중남미에서 가장 뒤진 국가였던 쿠바는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교육과 체육, 의료 분야에서는 선진국에 버금가는 수준을 이뤘다. 60년대 말 일부 종속 이론가들은 쿠바를 그들 이론의 실천국가로 간주할 정도였다.

위기를 넘기고 카리브 해의 수장이 되다.

처음에는 쿠바 혁명의 개혁과정을 주시하기만 했던 미국은 1960년 7월부터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하자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1961년 1월에 국교까지 단절하게 되었다. 카스트로는 이에 소련과의 관계 확립에 주력했다. 소련 정부는 쿠바 혁명정부를 미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쿠바혁명정부방위위원회를 발족시켜 카스트로 지원에 나섰다. 또 대규모 자문단을 쿠바에 상주시켜 미국과의 대립을 본격화했다.

카스트로 정권의 반격

미국 케네디 정부는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비밀리에 마이애미 거주 쿠바 출신 젊은이들을 규합한 후 CIA 요원들의 지도 아래 군사훈련을 시켜 쿠바 침공을 시도했다. 1961년 CIA 요원들에게 특수훈련을 받은 1400여 명의 쿠바 출신 군대는 피그만 침공을 감행했다. 이때 미국은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과소평가해 금방 전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10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전원이 카스트로의 혁명군에게 생포되는 참패로 끝났다. 피그만 침공 1년 반 뒤 카스트로는 53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받고 포로들을 미국에 송환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지만..

쿠바의 치세, 3합관계와 카리브 해협기구로 카리브 해의 수장이 되다.

피델 카스트로의 웅변과 토론,그리고 복지혜택와 대외정책으로 중남미의 반미단체들은 호응을 이끌고 이후 반미단체들이 친미중남미 국가들을 전복하고 반미정부가 들어서면서 중남미와 카리브 해, 그리고 쿠바의 3합관계를 맺는다. 이후 쿠바의 경제는 이 3개의 질긴 연합의 지속가능 경제발전으로 날로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 1976년, 중남미와 카리브 해 등 연합기구를 만들어 이른 바 "카리브 해협기구"를 설립한다. 이후 쿠바는 경제성장 3위로 치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반미국가들도 협동경제지속발전 정책을 펼쳐 국가 간의 리득을 보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선진국으로 도입하게 된다. 허나 이 과정에서 이른 바 보석의 기적르로 이룩한 경제라는걸 잊어선 안된다. 이.경제의 중심은 중남미와 카리브 해의 국민들의 노력이 있기에 생긴 결실이며, 3합관계의 끈끈한 관계로 지속가능정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한편 체 게바라는 여러 앓던 천식이 악화되고, 여러 질병과 여러 악재로 결국 1976년 1월 11일 자결 하고 만다.

쿠바, 대호황을 이루다.

1980년대 쿠바는 중공업의 대대적인 발달로 경제 성장률 무려 28%까지 올라갔으며 1983년 미국과 화해를 하며 다시금 수교를 맺는다. 이후 카리브 해협기구는 반미국가들 중에 남미의 브라질, 아르헨티나,칠레등 탈퇴하고 나머지들로 구성되었으며, 쿠바는 카리브 해의 수장을 이어가게 된다. 1985년 이후 저금리,저유가,저달러로 3저호황을 맞게 된다. 이후 1987녀 1인당 GDP 1만달러로 올라가게 된다. 이후 쿠바는 cnc공작기계의 자동화를 이루면서 공업발달이 높아지며, 1차산업과 2차산업의 다중발달을 촉진한다.
이 와중에 의료서비스와 복지, 그리고 의료기술 역시 발달되어 세계 의료1위로 올라간다.(이후 현재까지 1위의 타이틀을 내준 적이 없다 그만큼 의료기술력은 독보적이다)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흔들리다.
이후 90년대 초반 1인당 GDP 2만달러가 넘어가면서 GDP 2천억달러가 넘어가게 된다. 허나 중남미의 민주혁명, 독재타도 시위로 카리브 해협기구는 점차 그 지위력이 약해졌고, 결국 기구는 해체된다. 이에 90년대 중반 피델 카스트로 공산정권에 대해 불만과 불심은 날로 커지는데...

쿠바 98개혁

98년 2월, 쿠바의 아바나에서 민중들의 불만과 불심으로 결국 쿠바 전역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확산과 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 피델 카스트로 공산정권은 민중들의 불심을 잠재우기 위해 전국민주정치개혁 즉 98개혁을 실시한다. 이 개혁은 피델 카스트로 공산정권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개혁으로 각 지방에서의 직접투표권을 실행하고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격인 대의원 총선거의 직접투표권을 실행한다. 이후 고등교육무상정책으로 민중의 불심을 낮아지게 하면서, 피델 카스트로 공산정권은 후에 민중 1기정권(이라 부르고 피델 카스트로 민중 1기정권이라 쓴다)이 되어 독재에서 민주집중제,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선로하게 된다. 허나 공산주의와 부분적 시장경제는 지속 유지하고 있으며 국민의 삶의 질을 우선 시 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새로운 기류, 민중 2기정권

민중 1기정권이 끝나고 이후 의회의 발효로 2002년 국가평의회 의장을 직접투표하는 대선를 진행한다.
이후 쿠바의 영웅이라 불리는 후안 알메이다 보스케 (Juan Almeida Bosque )가 늙은 나이로 당선이 되어 7대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다. 또한 쿠바 공산당 역시 대대적인 개편을 하게된다. 피델 카스트로는 공산당 2대 서기장으로 취임한다. ( 1대 서기장 역시 피델 카스트로이며 그 기간은 1959~2002 ) 이후 민중 2기정권이 탄생된다 민중 2기정권은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서유럽 10개국 외 자본주의 국가 30개국과 수교하며, 전체 GDP 3천억달러로 넘어간다.

민중 3기정권

후안 알메이다 보스케의 6년 임기가 끝나고 2007년 대선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8대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다. 허나 국가의 정책 핵심인 당정에서 막후로 활동하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가 아직도 정치영항력으로 실질적인 지도자로 국정을 운영해오고 있다. 2010년 경제는 4천 5백억달러가 넘어섰고 이후 지하철 노선로가 발달되어 쿠바의 이동수단이 다른 선진국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었다. 한편 쿠바는 다른 개발도상국들 보다 교통시설이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뉘고 있다.

민중 4기정권

라울 카스트로의 임기가 끝나고 2012년 대선으로 당시 부의장이었던 호세 마차도 벤투라가 9대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한다. 쿠바의 교통은 원활하게 편안해졌으며 민중 4기정권은 대한민국의 인터넷 속도보급형식을 보면서 이후 인터넷 속도정책을 이루었다. 또한 광역네트워크가 설치되어 인터넷속도 세계 4위로 우뚝 섰으며 인구는 2천 4백만으로 급속도 성장한다. 이후 전체 GDP 6천8억달러로 넘어섰으며, 중국 - 러시아와의 교류증진으로 더욱 더 가속화하였다. 그리고 2017년 공산당 3대 서기장으로 피델 카스트로 재취임하여 58년 독재를 이어가고 있다.

새국민 정부, 새로운 시도

2017년, 호세 마차도 벤투라가 임기를 마치고 대선으로 미겔 디아스카넬가 당선되었다. 이후 쿠바의 복지 21차 정책을 이루고 중앙집권의 개편을 실행한다. 경제는 GDP7천 9백억달러로 넘어섰다.
미겔 디아스카넬는 이후 정부의 명칭은 민중 5기정권에서 새국민 정부로 개편한다. 2018년 피델 카스트로는 59년 독재를 진행하고 있다. 허나 미겔 디아스카넬의 복지 21차 정책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쿠바에선 자연재해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었으며 정치적인 반발에 의해 피델 카스트로 서기장이 국가평의회 10대 의장 권한대행으로 임기를 이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