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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ye Cit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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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재지 | 위례자치시 중구 위례대로 110 | ||
면적 | 605.20㎢ | ||
하위 행정구역 | 25구 | ||
시간대 | UTC+9 | ||
인구 | 9,784,112명 | ||
인구 밀도 | 16,166.74명/㎢ | ||
시장 | 하재성 (초선) | 개혁보수당 | |
위례자치시의회 | 개보 | 80석 | |
민주 | 15석 | ||
열린 | 15석 | ||
구청장 | 개보 | 18석 | |
민주 | 4석 | ||
열린 | 3석 | ||
상징 | 시화 | 개나리 | |
시목 | 은행나무 | ||
시조 | 까치 | ||
홈페이지 | www.위례자치시.com |
위례자치시는 대부여국 한산주 북부에 위치한 도시이자 6대 자치시 중 하나이다. 인구 밀도로는 광역자치단체 1위를 차지한다.
현재 인구는 1,000만 명이 약간 안 되는 수준으로, 양광부 주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한 메갈로폴리스가 된다. 위례의 인구수는 몇 년 전부터 많은 인구 유출로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1000만 명 선이 깨져 세계 도시 인구 순위에서는 많이 밀려났지만, 그 대부분의 인구가 양광부 유입되었기 때문에 한산주의 인구는 아직까지 증가세다. 한산주 인구 중 약 50%가 양광부 및 위례시에 집중되어 있기에 세계적으로도 수도권 밀집도가 높은 편이다.
위례를 포함한 한산주 북서부 도시권 인구는 2,500만여 명으로 세계 10위권에 해당해 대략 도쿄, 자카르타, 델리, 카라치, 상파울루, 충칭, 상하이 등의 도시권보다는 적고, 뭄바이, 뉴욕, 멕시코시티, 마닐라, 라고스, 다카, 카이로의 도시권과 맞먹는 인구를 가지고 있다.
위례자치시청사 | 도환별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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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시대
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한 땅이었다. 수도로서의 최초 기록은 백제의 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이다. 위례성은 당시 도읍을 둘러싼 도성으로, 이는 지금까지 유지되어있다.
이 시기의 위례성은 오늘날의 위례자치시 송파구 일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확실시된 상황이다. 후대로 오면서 그 주위로 영역이 확장되자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하다.
그러다가 백제가 항복한 후 웅진(공주)으로 쫓겨간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중 한주(한산주) 소속이 되었다. 딱히 신라와 친한 관계는 아니었던 북방의 발해와 접한 국경선 전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지방군인 10정을 9주 중 다른 8개 주에는 1정씩 배치했으나 한주에는 특별히 2정 배치했다. 김헌창의 난의 후속타로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 아래에서 도적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독 총명에게 잡혀 죽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함규의 영역이었는데 궁예를 거쳐 왕건에 복속됐고 함씨들의 조상이 됐다.
고려
강남은 광주(廣州), 강북은 양주(楊州)로 나뉘었다. 한편 문종 때에는 강북 지역이 남경(南京)으로 지정되어 양주와 대등해졌다. 이 때,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였다.
남경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인정받아 문종과 숙종 연간에 천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칭송받을 때는 오덕구(五德丘)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이 오덕구란 중앙에 북악산(면악산), 북에 감악산, 남에 관악산, 동에 아차산(남행산), 서에 북악산(철마산?)이 오행에 걸맞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오늘날로 치면 서쪽으로는 연세대 뒤의 안산, 동쪽으로는 동대문 일대의 낙산, 남쪽으로는 신용산, 이촌 일대까지였다고 한다. 충선왕 대에 다시 한양(漢陽)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한양이나 한성(漢城)이라고 불리웠다.
고려 말에는 더욱 천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이유는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과 예성강의 퇴적 현상으로 개경의 수운 활용이 난감해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은 남경에 궁을 증축하려 했으며, 우왕 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왕이 남경에 거둥하였다. 공양왕 때에도 왕이 일시 머물렀으며, 서경과 마찬가지로 분사를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강북이 잘 나가기 시작하는 동안 강남은 여전히 광주의 깡촌 신세로 남았고, 이 곳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려면 1980년대까지 천 년이 더 남아있었다.
인구 추이
![]() (1949년~2018년) | ||||||||||||||||||||||||||||||||||||||||||||||||||||||||||||||||||||||||||||||||||||||||||||||||||||||||||||
1950년 | 1,693,224명 | |||||||||||||||||||||||||||||||||||||||||||||||||||||||||||||||||||||||||||||||||||||||||||||||||||||||||||
1955년 | 1,568,746명 | |||||||||||||||||||||||||||||||||||||||||||||||||||||||||||||||||||||||||||||||||||||||||||||||||||||||||||
1960년 | 2,445,402명 | |||||||||||||||||||||||||||||||||||||||||||||||||||||||||||||||||||||||||||||||||||||||||||||||||||||||||||
1965년 | 3,470,880명 | |||||||||||||||||||||||||||||||||||||||||||||||||||||||||||||||||||||||||||||||||||||||||||||||||||||||||||
1970년 | 5,433,198명 | |||||||||||||||||||||||||||||||||||||||||||||||||||||||||||||||||||||||||||||||||||||||||||||||||||||||||||
1975년 | 6,879,464명 | |||||||||||||||||||||||||||||||||||||||||||||||||||||||||||||||||||||||||||||||||||||||||||||||||||||||||||
1980년 | 8,350,616명 | |||||||||||||||||||||||||||||||||||||||||||||||||||||||||||||||||||||||||||||||||||||||||||||||||||||||||||
1985년 | 9,625,755명 | |||||||||||||||||||||||||||||||||||||||||||||||||||||||||||||||||||||||||||||||||||||||||||||||||||||||||||
1990년 | 10,603,250명 | |||||||||||||||||||||||||||||||||||||||||||||||||||||||||||||||||||||||||||||||||||||||||||||||||||||||||||
1995년 | 10,550,871명 | |||||||||||||||||||||||||||||||||||||||||||||||||||||||||||||||||||||||||||||||||||||||||||||||||||||||||||
2000년 | 10,311,314명 | |||||||||||||||||||||||||||||||||||||||||||||||||||||||||||||||||||||||||||||||||||||||||||||||||||||||||||
2005년 | 10,167,344명 | |||||||||||||||||||||||||||||||||||||||||||||||||||||||||||||||||||||||||||||||||||||||||||||||||||||||||||
2010년 | 10,312,545명 | |||||||||||||||||||||||||||||||||||||||||||||||||||||||||||||||||||||||||||||||||||||||||||||||||||||||||||
2015년 | 10,022,181명 | |||||||||||||||||||||||||||||||||||||||||||||||||||||||||||||||||||||||||||||||||||||||||||||||||||||||||||
2018년 | 10,765,623명 | |||||||||||||||||||||||||||||||||||||||||||||||||||||||||||||||||||||||||||||||||||||||||||||||||||||||||||
- 1200만 상한
지명
어원
위례성(慰禮城)의 어원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설이 제기된 상태다. 우선 한자의 뜻 자체를 풀이하여, 예를(禮) 다하는(慰) 성(城)이라는 추측이 있다. 온조 등 고구려에서 탈출한 난민들의 정착을 도와준 마한 임금에 대한 성의 표시라는 해석이다. 초창기에도 그들의 도성을 위례성으로 칭했던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의견이지만 마한 멸망 이후에도 계속 썼다는 것이 걸린다.
또한 '울'(울타리)이라는 고유표현을 음차해 위례라고 쓴 것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이것은 몽촌토성에서 목책 흔적이 나온 이후에 본격적으로 힘을 얻은 의견이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등장 이후 이 의견도 상당부분 모순점이 많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서라벌의 뜻과 마찬가지로. 큰 성, 또는 왕성이라는 뜻이라는 추측이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어라하라고 불렀는데 이 어라하의 음차를 위례로 파악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경우 어떻게 어라하의 음차가 위례가 되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영어 표기
위례 영어 표기는 시장이 바뀔 때마다 바뀌었다. 문별 前 시장은 위례를 Yurye(유례? 우례?)로 표기하였다. (오거돈 시장 때는 쓸 일이 없었다ㄱ..읍읍) 그러나 하재성 現 시장은 위례 영어 표기를 갈아엎었다. 하재성 시장은 실제 위례신도시 명칭에 쓰이는 Wirye를 공식 영어표기로 채택하여 공식 SNS 등에 사용 중이다.
위상
위례의 도시 경쟁력은 여러 지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AT커니에서 발표하는 Global Cities Index의 경우 위례는 200개 도시 중 12위를 기록 -일본의 모리기념재단이 발표하는 Global Power City Index(GPCI)의 경우 위례는 런던, 뉴욕, 도쿄, 파리, 싱가포르에 이어 6위를 기록 -미국의 부동산 컨설팅그룹 JLL이 발표하는 "세계 도시, 성공으로 가는 길" 연구에서도 전체 7위를 기록하여 최상위 그룹인 "Big 7"에 포함되었다. -위례의 총 소득 GDP는 세계 4위이다. -2019 세계 금융도시 중 서울 36위 기록 -레저넌스 컨설턴시(Resonance Consultancy)가 발표한 2019 세계 최고의 도시 28위 기록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59위
위례는 급속한 개발의 힘도 강하게 미쳤기 때문에 한산주 전주나 경주에 비해서는 '부여 전통의 미'는 제대로 살아있다고 보기 힘들고, 개발 차원에서도 예전 난개발의 측면이 많이 나타나 '잘 짜인 계획 도시'라는 평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하재성 시장이 재개발 시즌을 맞아 계획도시화를 진행하려고 삽질중이라ㄴ..) 이국적인 동양의 정취를 느끼고자 위례에 들른 외국인 관광객들은 남대문이나 광화문 등을 보고 "과거와 현재가 잘 어울러진 메트로폴리탄"이라는 평을 하기도 하고 "옛날 건물은 광화문 남대문밖에 볼 게 없다"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남대문시장같은 재래시장에 외국인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20세기 초반 이전만 해도 사대문 바깥쪽은 논밭과 산들로 어우러진 녹지였다. 이 지역들은 과거 양광부 소속의 지역들이었다가 위례로 편입된 지역들이다. 지금은 사대문 밖 지역 중에서도 가장 호화롭고 부유한 지역인 강남 4구 지역도 양광부 지역 소속이었다. 도시로 변한 건 20세기 이후이니 사대문 밖에는 전통적인 볼거리가 적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인 뉴욕이나 LA가 엄청난 관광객을 유치하듯이 위례도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료 기관마다 기준이 다르기에 순위는 당연히 바뀌며 euromonitor international같은 전 세계 시장 조사를 리드하는 리서치사에서 평가한 도시 순위에는 10위권 안에 들지 못했다. 또한 다른 기관에서는 2015/16년 순위로 13위 정도로 랭크되었다. 도시전략연구소에서는 2017년 6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위례는 이미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놀러오는 도시 중 하나다. 다만 꼭 관광객 수가 도시 순위를 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로마나 시드니 같은 도시보다 관광객이 많다고 더 볼거리가 많다든지 하는 건 아니며 반대로 우리가 쿠알라룸푸르보다 수가 적다고 볼거리가 많다거나 인프라가 좋다는 게 아니다. 또한 위례 통계 정보 시스템을 통해 알아보면 대략 위례에 온 외국인 관광객 중 절반 정도가 중국인이다. 이러한 관광객의 대부분이 쇼핑 관광을 즐기다 보니 관광객 규모 대비 수익률이 높은 것도 주목해야 한다. 신세계그룹, 현대백화점, 이랜드그룹 등의 유통업체들도 위례에 대형 SC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볼거리는 약간 부족하더라도 각종 면세점과 백화점들은 관광객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위례 열풍은 관광계의 큰 손인 중국인들을 대거 포섭하면서 꾸준히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게 되었다. 명동에서는 이미 유니온페이(인롄카드)와 알리페이의 광고가 명동을 도배할 정도. 그렇다고 동아시아에서만 관광객이 찾아드는 것은 아니고, 서구 관광객들도 300만 명이 넘는 적당한 수준을 유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