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영국의 역사

Kskk4411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7월 28일 (일) 10:44 판

휘영국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휘영 문명

기원전 1700년경, 중국에서는 황허 문명이 시작되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휘영 문명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휘영은 날씨가 온화하고 비가 자주 내려서 일찍부터 농업을 주로 하는 곳이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다른 문명들도 그렇듯 빠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점차 사람들이 모여살게 되면서 4개의 부족(마을)이 형성되게 되었다.

천명은 점차 사람들이 휘영으로 모여들던 때에 어디선가 나타났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역사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천명은 농사기술과 무기제조기술 등을 휘영에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천명은 1년간 휘영에 머물다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기록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돌연 사망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모두 후대의 기록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맹체

천명이 나타나 휘영에 사람들이 모여든 이후, 천명의 농경기술, 무기술 등을 받아들인 휘영은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휘영이 점차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며 태평성대를 이룬 어느 날, 천명은 갑자기 휘영을 떠났고, 이후 휘영에는 3명의 지도자와 3개의 씨족이 생겨난다. 천명의 딸을 자임한 아리희, 농경의 결실을 이룬 개소훅, 수준 높은 제련 기술을 가진 탕모사. 이들은 휘영을 다스리는 지배층으로 군림하며 휘영 연맹체를 세워 그들의 주민들과 다른 이민족들의 접촉을 차단한다.

아소한

아소한[1]은 천명의 딸 아리희를 중심으로 아리씨가 모여 만든 부족으로, 신과의 연결을 통해 휘영연맹에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제의를 담당하였다. 대대로 천명의 딸을 통해 부족장이 이어왔으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제의에 참여한다. 천명의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이용해 연맹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신성을 이용해 범죄를 처벌하는 등 질서 유지 역할도 수행했다.

이스가

이스가는 농경기술을 가진 개소훅을 중심으로 개씨가 모여 만든 부족으로, 연맹에서 농경과 식량을 담당한다. 식량의 배급과 분배를 주관하였으나 아소한 부족이 들은 천명의 말씀에 따라 배분했다. 이 때문에 정작 생산한 이후 가져가는 양은 적었고, 아소한 족이 다수를 차지하자 불만이 쌓였다. 실제로 부족연맹체 지도자 회의체였던 갈리탄 회의에서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시리툰

불을 다루어 금속을 제련하는 기술을 가졌던 탕모사를 중심으로 탕모씨가 모여 만든 부족으로, 연맹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했다. 대대로 아소한 부족과 결탁해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대신 방위에 대한 독점과 농산물에 대한 높은 지분을 보장받아왔다. 금속을 제련해 만든 무기를 통해 정치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왔다.

천강 시대

휘영 연맹에 철기가 유입되자, 연맹의 모습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3명의 부족장이 공동으로 이끌던 연맹체는 왕을 옹립하기로 하면서 각 부족에서 번갈아가며 왕을 내었다. 점차 휘영은 황허 문명과 교류하며 한자를 수입해왔고, 부족들의 명칭도 변화해갔다. 아소한은 성강(聖康)족으로, 이스가는 사량(祀糧)족으로, 시리툰은 갈루(褐鏤)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휘영 연맹체 역시 '하늘이 내려준 편안한 땅'이라는 의미의 천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휘영에서 점차 영토를 늘려갔고, 연맹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이때의 사회 모습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출토된 유물이나 중국 역사서의 기록 등을 통해 추정한 결과, 여전히 성강족 우위의 연맹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왕이 제사장의 역할에 관여하지 못했고, 국왕에 대해 제사장이 조언하는 제도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권은 미약하여 흉년이 들거나, 이민족의 침략을 받거나, 제사장의 신탁이 안 좋게 나오면 국왕은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물론 성강족에서 배출된 왕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사장의 신탁으로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이후 성강족에서 국가를 정비하고 세습제로 변화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천강은 중국대륙에 존재하던 후나라의 침략으로 한반도 남부로 쫓겨갔으며, 이 과정에서 국방을 지키지 못한 갈루족이 힘을 잃고 사량족과 성강족이 담합하여 성강족이 왕족, 사량족이 왕비족으로 고착화된다.

천강은 철기를 바탕으로 선진문화를 꽃피웠는데, 혼인제도에서 혼인을 할 때는 신랑이 신부에게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고, 바람을 피우면 둘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도둑질을 하면 300배로 배상하게 하는 등 엄격한 법률이 시행되었고, 매년 3월에는 제사장이 주관하는 풍년기원제인 영사(靈祀)와 9월의 추수감사제인 사제(謝祭)가 열렸다.

중국 후나라의 침략으로 웅계(지금의 백원도 공주 부근)로 옮긴 천강은 계속된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왕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지속되고 있었다. 갈루족은 이 틈을 타 성강족 출신의 왕을 사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성강족은 신탁을 이용해 왕을 구제해왔고, 왕비를 배출한 사량족 역시 별다른 반대 없이 왕의 집권을 묵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30년에 걸친 대흉년에 민심이 점차 흉흉해지며 각지에서 불만이 터져나왔고, 이 와중에 미리수(현재의 금강)이 범람해 가옥 5,000호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대홍수가 발생한다. 하지만 국가는 이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민심이 폭발하여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 이런데다 중국의 후나라가 다시 침입해오면서 천강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멸망하고, 성강족과 사량족은 지리산으로 숨어들게 된다. 갈루족은 유민들 중 일부를 이끌고 그릿벌(지금의 태양광역시 부근)으로 이주한다.

삼국 시대

천강의 치세가 끝난 한반도에는 제대로 된 국가가 생기지 못해 엄청난 혼란이 찾아왔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한반도에는 절도, 살인, 간음 등 범죄가 들끓었고, 찬란했던 휘영 문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런 즈음 그릿벌로 이주한 갈루족은 그곳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우고 부신(釜新)이라 했다. 하지만 도읍이 너무 뜨거워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하여 서라벌(지금의 해성도 경주 부근)으로 도읍을 옮긴다.

지리산에 숨어있던 성강족은 사량족과 연합하여 주민들에게 선진 농경기술을 전파하고 천강 시절 평화롭던 때의 추억을 자극하면서 세력을 다시 규합했다. 범죄와 무질서에 지친 주민들은 천강의 평화롭던 시절을 추억하게 되었고, 결국 웅계에서 성강족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성강족은 전부터 이어져온 천명의 딸은 제사장으로, 대대로 이어져 온 아들은 왕으로 분리하면서 제정분리를 통해 권력을 분산 후 독점하는 노선을 취하고, 사량족은 왕비족으로 다시 정착한다. 하지만 천강 시절 실정을 기억하는 토착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웅계에서 정착해 세력화에 성공한 부여씨, 해씨, 사택씨를 귀족으로 봉하고 아리씨 중심 4귀족 체제를 완성한다. 이들은 국호를 예진(睿進)으로 하고 체제를 안정시켰다.

이 즈음 천강이 남쪽으로 쫓겨갈 때 북쪽 연걸(지금의 의광도 평양시 부근) 부근에 남아있던 유민들은 독자세력을 이루고 중국에서 얻은 우수한 철기 기술로 국가를 세웠다. 이들은 그동안 3부족에 억압되어 세력이 약했던 5부족(소선족, 양휘족, 강하족, 상준족, 병각족)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로, 각 부족이 자신의 범위를 자치적으로 다스리되 국왕과 중앙의 통제를 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국왕은 5부족 족장회의에서 선출되는 인물이 맡았으며 왕비는 선왕비가 추천하여 5부족장회의에서 동의한 사람으로 추대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들은 국호를 광라(廣羅)라 하였다.

삼국이 힘을 키우는 동안 반양(지금의 남원도 광양 부근)에는 토착세력 연맹체인 태서(泰瑞)가 연맹체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태서, 금강태서, 아라태서, 함양태서, 광양태서, 성월태서의 6태서 연맹체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이들은 질좋은 철괴를 예진과 부신에 수출하며 둘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삼국의 발전

예진

예진은 천강을 이끌었던 성강의 경험을 그대로 물려받아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달리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는 데 성공했고, 성강족이라는 족보다는 아리씨라는 가문의 개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천강의 주민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상이 퍼지면서 부신과 광라, 태서에 대한 통합 욕구가 의식 안에 쌓여갔다.

부족 사회를 탈피하고 가문 내에서 선출해 세습하던 천명의 딸과 왕의 지위는 근성태왕(서기 308년 ~ 370년, 재위 335년 ~ 370년)이 세습제로 변경해 왕위와 가문의 권위를 강화했고, 천명의 딸은 모계로, 왕은 부계로 세습하면서 가문의 여인과 남자들을 모두 묶어두는 데 성공한다. 근성태왕은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부신과의 동쪽 경계를 소백산맥 너머로 확장시켰고, 광라와의 북쪽 경계를 지금의 의창도 너머까지 확장했다. 또한 남쪽으로 확장을 계속하여 지금의 남원도 전역까지 복속시켰고, 바다 건너 제주까지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는다. 이때 불교가 전래되어 천명 사상과 결합하는데, 천명은 동방의 부처이고 천명의 딸은 천명의 명을 받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현세에 강림한 보살로 변형된다. 근성태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전국에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며 예진을 더욱 강성하게 이끌었다.

이후 광라와 부신의 연이은 침공으로 수도를 사비로 옮기며 위축되었으나, 6세기 말 성산왕의 중흥 노력으로 국력을 근성태왕 시기까지 회복하고 태서를 흡수하며 군사력을 강화한다.

부신

부신은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지만, 애초에 갈루족이 가지고 있던 선진 제철기술로 철기 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바다 건너 열도와 일찍부터 교역하며 항해술과 천문학을 발전시킨 토착세력과 연대하여 수준 높은 과학기술을 꽃피웠다. 그러나 예진이 이미 고대국가로 정착한 이후에도 여전히 갈루족과 토착 부족(사강족, 화란족)이 번갈아 왕위를 맡는 부족국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예진의 근성태왕이 소백산맥을 넘어 공격해온 후 산맥 너머와 교역이 가끔이나마 시작되면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법흥태왕(서기 501년 ~ 578년, 재위 520년 ~ 578년)에 이르러 왕위를 갈루족 단독 왕위계승을 확립하고 갈루족의 성씨를 탕모씨에서 단씨로 바꾼다. 예진을 통해 불교를 공인한다. 애초에 토착신앙이 강하지 않던 부신에서는 불교가 강하게 힘을 쓸 수 있었고, 빠르게 토착화되면서 왕즉불 사상과 함께 미륵신앙 등 다양한 변형사상이 등장한다. 법흥태왕은 소백산맥을 넘어 예진과의 경계를 지금의 충주까지 넓혔고, 북쪽으로는 정한도 남부까지 진출한다.

부신은 천문학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인공 호수 월지를 축조하고 천문관측기구 첨성대를 설치하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경주 지역에 남아있다. 또한 수준 높은 금 제련기술을 가지고 있어 많은 금관과 금 장신구를 남겨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광라

광라는 비록 천강의 지배층을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천강이 부재한 시절 중국과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오면서 선진 문물을 빠르게 수용하였다. 그리고 산지가 많은 국토의 특성상 사냥에 능해 군사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중국의 후나라를 공격해 요동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한반도 북부에 토착세력으로 존재하던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키고, 황수왕(서기 333년 ~ 380년, 재위 352년 ~ 380년)은 고씨의 단독부자상속을 일찍이 확립하고 블교를 빠르게 공인하였다. 하지만 농경이 어려워 약탈과 교역에 의존하던 경제 특성상 생계 자체가 매우 불안정했고, 이는 강력한 왕권 출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삼국은 천강의 주민이라는 사상 아래 우호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시기에 따라 적대하거나 동맹을 맺는 등 관계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4세기에는 예진 우위의 구도가 진행되었고, 5세기에는 광라, 6세기에는 부신의 주도로 한반도 역사가 진행되었다.

삼국 간 교류와 삼국 통일

삼국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예진은 천명의 딸을 통해 부신과 광라에게 영향을 주려 하여 광라와 부신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우호적 관계일 때는 웅계에 모여 천명의 딸(이때부터 천녀라 불렀다.)을 통해 천명을 기리는 제의를 올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천명사상은 통일예진 말기까지 이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7세기에 이르러 예진의 사황태왕(서기 620년 ~ 666년, 재위 629년 ~ 666년)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꿈꾸었고, 천녀의 신탁 권위를 빌려 삼국통일의 위업을 시작한다.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국력을 꾸준히 키운 예진은 태서를 흡수하고 부신을 정복하기에 이른다. 이때 부신은 민왕(서기 603년 ~ 611년, 재위 607년 ~ 611년) 이후로 왕족의 권력다툼이 심해지고 있었는데, 민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삼촌들이 권력을 휘둘렀을 뿐 아니라 평소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아 그 합병증으로 일찍 숨을 거두면서 왕위계승이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강왕(서기 588년 ~ 632년, 재위 611년 ~ 632년)은 왕족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만큼 왕권을 휘두르기 어려웠고, 지배층은 이 틈을 타 횡포를 저지르면서 지속적인 민중들의 분노가 쌓여 각지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순왕(서기 622년 ~ 655년, 재위 632년 ~ 650년)은 사황태왕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 즈음 광라는 대장군 부소연(? ~ 646)의 난으로 보국왕(서기 583년 ~ 646년, 재위 588년 ~ 646년)이 승하하고, 왕세자 역시 크게 다치면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대장군 부소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장군 부소연을 따랐던 장군 연개영휘(? ~ ?)가 예진으로 대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귀화하면서 광라의 국력은 크게 요동친다. 심지어 연개영휘와 그 아들 연개숭적은 예진의 광라정벌 특별군의 대장군을 맡으면서 광라 정벌의 선봉장이 되었는데, 이때 연개 가문을 따르던 일부 성 주민들이 문을 열고 항복하면서 파죽지세로 연걸로 진격했고, 무방비로 습격을 받은 보성왕(서기 604년 ~ 679년, 재위 646년 ~ 655년)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예진이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사황태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도읍을 사비에서 영안(지금의 다원이다.)으로 옮기고 태학을 세우는 등 각종 정책으로 통일예진을 안정시켰다.

통일예진 시대

통일예진은 삼국으로 쪼개져있던 한민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고 민족융합정책을 통해 한반도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특히 대대로 이어져오던 천녀는 정치적 권세와 힘을 잃고 종교적 지도자로만 남게 되는데, 이마저도 불교의 승려들에게 밀리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성덕여왕(서기 738년 ~ 서기 790년, 재위 750년 ~ 790년)은 깊은 불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 천녀가 불교에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진다. 성덕여왕은 수도를 재정비하는데, 궁성인 일월성을 중심으로 남으로 주작대로, 북으로 현무대로를 닦고 주작대로 서쪽에 대규모 불사를 진행, 성향사를 건립한다. 성향사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보살상이 성덕여왕을 본떠 만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온 바가 있다. 예진의 불교문화는 이를 기점으로 더욱 융성하여 음력 4월에는 대규모 연등회를 열고 9월에는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대규모 법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도 하였다. 왕실의 성씨도 아리씨에서 이씨로 바꾸게 된다.

음악도 번성하여 아악청을 설치하고 휘영 국악의 토대를 마련한다. 악기를 정비하고 이때 만들어진 해금, 대금 등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외에도 불교미술, 건축 등 불교를 중심으로 문화가 융성하였는데, 이는 문화 문서에서 자세히 서술하도록 한다.

성덕여왕 이후로 통일예진은 두 명의 여왕을 더 배출하는데, 인덕여왕인광여왕이다. 이 배경은 왕족 남자가 없어 이어져 오던 것으로, 이 이후 여왕 슬하에 아들을 보면서 왕위의 계승은 다시 안정세를 되찾았다. 성덕여왕부터 인광여왕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약 130년 간 안정을 누리던 예진은 효광왕(876 ~ ?, 재위 881년 ~ 902년) 시기에 백두산이 대분화를 일으키며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때 중국 유목민족인 오원의 침입을 받아 만주 영토를 상실하고 대동강까지 영토가 위축된다. 이후 중앙 왕실이 피폐화된 민생을 돌보지 않아 민심이 악화되자 중앙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서기 909년 송악(지금의 평양)에서 세력을 키우던 대장군 왕희가 수도로 진격하면서 예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광려 시대

예진을 무너뜨린 왕희는 죽양(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하여 서기 909년 광려(廣麗)를 건국한다. 왕희(849 ~ 919, 재위 909 ~ 919)는 대동강 이남까지 위축된 영토를 적극적 북진 정책을 통해 청천강 이북까지 확장하였다.

예진 왕실이었던 이씨는 초기에는 광려 왕실과 대립하였으나, 이후 왕실과 통혼하면서 지배층으로 편입되었다. 왕희는 예진 마지막 국왕이었던 경희왕에게 웅진(지금의 공주. 웅계에서 웅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의 본관을 하사하였다. 왕희는 이외에도 여러 지방세력과 통혼하면서 그들을 지배층으로 편입시키려 하였고, 실제로 왕후들을 통해 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였다.

북방에 오월이 세운 월나라와는 적대적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증국 본토에 자리잡고 있던 상나라와는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였다. 광려는 월에 대해 '만주의 우리 영토를 점거하고 있으니 이를 반환하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월과의 국경은 잦은 국지전이 일어나 국경지대에는 민간인이 거의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 우려한 조정은 국경지대를 특수군사행정구역으로 지정하고 민간인의 거주 지원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이주를 장려하였으나, 잦은 월의 침략과 불안정한 안보로 인해 실효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반면 대상 무역거점으로 성장한 한강 하류 해금도(지금의 미추홀광역시 강화도)를 거점으로 한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광려의 경제를 주도했다. 상대적으로 일본 열도와는 거래가 없었는데, 그나마 동래 지방에서 조정이 허가하지 않은 교역이 이루어져 주기적으로 조정의 단속이 진행되기도 했다. 제주 지역은 월남 지역에 있던 쩐 왕조, 인도의 마하왕조와의 교역 거점이 되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가진 국제도시로 성장하였다. 특히 불교경전이 인도에서 직수입되어 제주는 불교의 융성을 주도했다. 초기에는 상좌부불교도 유입되었으나 조정에서 이를 금지하고 대승불교의 수입만을 수용하면서 상좌부 불교의 경전 수입은 사라졌다. 제주 지역에는 이때 세워진 대사찰 터인 주광사지가 남아있고 서귀포시 해안에는 바다를 끼고 거대한 사찰인 대해사가 여전히 남아있다.

광려는 중국 상나라에서 체계화한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관리를 선발하였으나 외척과 지배층의 권력을 세습하는 낙산제(落傘制)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불교 역시 융성하여 4월 초파일 연등회, 9월 팔관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왕사와 국사 제도를 두어 승려를 왕과 국가의 스승으로 우대하였다. 왕후들은 주기적으로 사찰을 찾아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재를 올렸고, 모시던 상전이 죽은 궁녀는 왕사(王寺)였던 안평사에 비구니로 들어가는 관례가 생겼다.

광려는 3차례의 외침을 받았는데, 차례로 월, 강(북방 여전족의 국가), 석(몽골족의 국가)의 침입을 받았다. 월은 상과의 외교를 단교하고 월과 통교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조정이 이를 '대분화를 이용해 영토를 약탈한 비열한 민족과는 통교할 수 없다'하여 거절하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조정은 이때 대장군 개성직을 출병시켜 대응했고, 개성직은 청천강에서 월군을 대파하며 대승을 거뒀다. 이를 계기로 왕실은 개성직에게 강씨를 하사하고 본관으로 송악을 하사했다. 하지만 월은 다시 침입하였는데, 이때는 초기 대응에 실패하여 왕실이 웅진까지 피난하였고, 각지에서 민병대가 창설되어 관군과 합동 작전에 돌입하면서 월군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죽양에 있던 예진의 대사찰 죽향사와 송향사가 전소되었고, 삼남 이북의 농경지가 전부 황폐화되어 삼남지역 곡물로 전국을 부양하게 되자 삼남의 분노가 깊어졌다. 왕실은 이를 불심에 기대어 해결하고자 광려대장경을 제작하였고, 조정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삼남에 대한 세금을 40% 가까이 감면하면서 재정난을 겪게 된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왕실은 국왕과 왕후의 패물을 매각하면서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는다.

11세기경 월나라를 몰아내고 여전족이 세운 강나라는 광라에 형제의 예를 강요하였고, 오랑캐로 여겼던 조정은 이를 거부한다. 그러자 강은 이북지역을 침입해 민가 4천 호를 약탈하고 농경지에 불을 지르고 간다. 또한 바다를 건너 영남 지역까지 침입하여 왕의 장인이었던 석알환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에 조정은 석알환을 무사 귀환시키는 조건으로 형제의 예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오랑캐를 형으로 모실 수 없다'며 왕자 4명과 그들을 따르던 대신들이 집단으로 자결하는 사건(사왕자의 자결)이 발생해 조정이 충격에 빠진다.

13세기에는 강나라와 중국 본토에 있던 천나라(상나라의 문치주의로 인해 반발한 무인 세력이 세운 나라)를 복속시키고 몽골족이 세운 석나라의 침입을 받아 전국이 황폐화되고 문화재들이 불에 타거나 약탈당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광려대장경이 불에 타 전소되었고, 사찰 대다수가 전소되는 등 불교의 타격이 심각했는데, 이로 인해 불교계는 적극적인 항쟁을 시작하고 승병부대를 조직한다. 왕실은 안평사를 중심으로 재조대장경을 추진하고, 약 9만 장에 이르는 대장경판을 제작한다. 왕실은 해금도로 몽진하였다가 석군이 해금도에까지 진격하자 제주도로 몽진하였고, 이때 백성들은 무책임한 왕실의 몽진에 분노한다. 각지의 민병대가 석군에 항쟁하여 석군은 몰아내었으나, 이 민병대는 항쟁 직후 반군이 되어 제주에 몽진한 왕실을 겨눈다. 이때 웅진 이씨 가문의 대장군 이성단은 민심을 이용하여 반군을 주도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환도한 광려 왕실을 압박한다. 왕실과 조정을 장악한 이성단 세력은 민심을 수습하였고, 민심은 왕실에서 이성단 세력으로 기운다. 결국 광려의 마지막 왕 방왕​​​​은 이성단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성단은 지방의 유림과 합심하여 예진의 수도였던 다원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건국한다.

조선 시대

  1. 현재까지 휘영의 통치자로 역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