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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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대경제국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혜정관주 자유동맹군 |
대경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 민병대 국군 보좌대 노동쟁군 강북 인민동맹 | ||||||
지휘관 | |||||||
의종 대황제 이승만 총리 신성모 국방부 대신-> 박성수 국방부 대신-> 신성모 국방부 대신 김석 백선엽 † 이원경 원수부 총수 송호성 해군 원수 이기붕 청경 자유시 시장 † |
김성주 박헌영 김원봉 두양 박간철 김책 김두봉 | ||||||
병력 | |||||||
대경제국: 120만 5600명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47만 7921명 |
대경 노동자군: 89만 8810명 비정규군: 약 30만 5000명 공산주의 의용군: 5만 2500명 | ||||||
피해 규모 | |||||||
대경제국: 30만 9000명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8만 9903명 |
대경제국 노동자군: 약 45만명 비정규군: 20만 9800명 공산주의 의용군: 1만 5069명 |
개요
배경
난징 회담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전후 처리 협상이 난징에서 열렸다. 각국(대경제국, 소련, 중화민국, 미국)의 대표들은 긴 협상 끝에 최종 협상안이 도출됐고 1946년 9월 10일에 난징 선언이 공표된다. 하지만 난징 선언이 공표된 당일 소련과 미국이 난징 선언을 파기하고 따로 1948년에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 두 국가는 중화민국, 대경제국이 일본과 단독강화를 한 것으로 인정했으며 이후 이에 대한 조정안이 1949년에 체결된 도쿄 조약이다. 난징 회담에 따라 중화민국과 대경제국은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중화민국은 앞으로 세워질 일본 과도정부와의 청구권 협상을 맺었고 대경제국도 1947 진도 협정이라는 청구권 협정을 체결하여 국가간 청구권에 대해 끝맺었다.그리고 결과... 또한 1946년과 1949년 도쿄 조약에 걸쳐 일본 분할안이 공식 조인되면서 대경제국은 시코쿠 지역을 얻어 군정을 실시했다. 하지만 훗날 1950년 2월 4일, 일본 왕국 조약을 체결하면서 남동도 군정은 철수한다.
냉전의 고착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의 제1 세계와 공산주의 진영의 제2 세계로 분할됐고 왕정주의 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리더로 하여 제1 세계와의 협력을 결정한다.
좌파 세력의 총선 패배
뚜껑을 열어보니 30석만 얻었다.
소련의 지원
협상의 체결, 근데?
원인
요충지 확보설
왕정국가들의 개입설
미국 개입설과 소련 개입설
자유당-사회민주당 좌우합작 내각의 계획설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