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내전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0월 2일 (수) 18:48 판
6.25 내전
대경제국 6.25 내전 장면.jpg
교전국
대경제국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혜정관주 자유동맹군
대경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 민병대
국군 보좌대
노동쟁군
강북 인민동맹
지휘관
의종 대황제
이승만 총리
신성모 국방부 대신->
박성수 국방부 대신->
신성모 국방부 대신
김석
백선엽
이원경 원수부 총수
송호성 해군 원수
이기붕 청경 자유시 시장 †
김성주
박헌영
김원봉
두양
박간철
김책
김두봉
병력
대경제국: 120만 5600명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47만 7921명
대경 노동자군: 89만 8810명
비정규군: 약 30만 5000명
공산주의 의용군: 5만 2500명
피해 규모
대경제국: 30만 9000명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8만 9903명
대경제국 노동자군: 약 45만명
비정규군: 20만 9800명
공산주의 의용군: 1만 5069명

개요

배경

난징 회담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하면서 전후 처리 협상이 난징에서 열렸다. 각국(대경제국, 소련, 중화민국, 미국)의 대표들은 긴 협상 끝에 최종 협상안이 도출됐고 1946년 9월 10일에 난징 선언이 공표된다. 하지만 난징 선언이 공표된 당일 소련과 미국이 난징 선언을 파기하고 따로 1948년에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 두 국가는 중화민국, 대경제국이 일본과 단독강화를 한 것으로 인정했으며 이후 이에 대한 조정안이 1949년에 체결된 도쿄 조약이다. 난징 회담에 따라 중화민국과 대경제국은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중화민국은 앞으로 세워질 일본 과도정부와의 청구권 협상을 맺었고 대경제국도 1947 진도 협정이라는 청구권 협정을 체결하여 국가간 청구권에 대해 끝맺었다.그리고 결과... 또한 1946년과 1949년 도쿄 조약에 걸쳐 일본 분할안이 공식 조인되면서 대경제국은 시코쿠 지역을 얻어 군정을 실시했다. 하지만 훗날 1950년 2월 4일, 일본 왕국 조약을 체결하면서 남동도 군정은 철수한다.

냉전의 고착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의 제1 세계와 공산주의 진영의 제2 세계로 분할됐고 왕정주의 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리더로 하여 제1 세계와의 협력을 결정한다. 하지만 대경제국은 당시까지만 해도 동아 왕정맹에 가입하지 않았고 독자노선을 채택했었다. 미국은 1946년, 일본 분할안이 유엔 총회를 통과한다. 일본 분할안에 따라 대경제국 황립육군이 1946년 4월 6일, 시코쿠를 진주했고 소련군은 1946년 5월 10일에 하코다테혼슈 북부를 진주하였으며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공동 군정청 설치를 합의한다. 1946년 6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규슈의 가고시마와 구마모토 지역을 진주하고 곧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로스엑스플로지온란드 군정청을 설치한다.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며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그 동아시아 중요 요충지로 대경제국을 선정, 대경제국내 친미주의자들을 통해 국민당이라는 정당을 창당시켜 지원했고 소련도 맞대응으로 제국내 공산주의자들을 결집시켜 노동당을 창당시킨 후 지원한다.

전후 대경제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 5월 10일, 임시 의정원이 자진 해산하고 1945년 8월 10일에 제32대 대경제국 제1제국 의정원 총선이 열렸고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이 73석, 보수정당인 입헌민주당은 101석을 확보한다. 이 두 거대 양당은 좌우합작을 합의하고 총리대신김구,내각총리대신여운형이 취임한다. 대경제국은 전후 난징 선언과 시코쿠 확보로 당당히 전승국의 지위에 있었다. 대경제국은 이전 대일항쟁기때 요동 지역에 잔류한 해방구의 세력은 대경제국에 투항했어도 지역내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소련의 지원하 설립된 노동당이 만들어지자 이 정당에 대규모 입당하여 강북 지역의 공산화를 시작한다. 노동당은 이름바 '제국 노농자 권익 보호단'을 창설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했고 사회민주당내 급진파 세력의 이탈을 부추겼다. 또한 신분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선황인 정종경자개혁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공약들로 극좌파 지지층을 끌어모을 수 있었으나 온건좌파와 중도층 지지파를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1948년 총선이 시작된다.

좌파 세력의 총선 패배

제33대 대경제국 제1제국 의정원 총선에서 노동당은 30석, 국민당은 15석을 얻었고 입헌민주당이 80석, 사회민주당이 72석, 나머지 군소 정당과 무소속이 3석을 얻는다. 뚜껑을 열어보니 30석만 얻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노동당은 민주적으로 정권교체가 힘들다고 판단,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다.

소련의 지원

협상의 체결, 근데?

원인

당시 의 대결과 옵저버

요충지 확보설

왕정국가들의 개입설

미국 개입설과 소련 개입설

자유당-사회민주당 좌우합작 내각의 계획설

과정

결과

주요 전투 목록

역사적 갤러리

기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