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루스인민공화제국

빌헬름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0월 7일 (월) 19:54 판
프랑스 코뮌
파리 코뮌
France Commune
프랑스 코뮌 국기.jpg
국기
프랑스 코뮌 국장.png
국장
국호프랑스 코뮌
파리 코뮌
상징국가혁명의 이름으로
국화장미
국조없음
표어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자연환경면적(영토)551,695 km²
인문환경인구91,200,000명
인구밀도조사 중
공용 언어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정치국체공화제
정부형태일당제, 중앙집권제, 전체주의 등
서기장인민
부서기장없음
경제GDP$0000
1인당 GDP$0000
GDP(PPP)$0000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프랑
단위
법정연호없음
시간대UTC+01:00

역사

1차 코뮌내전

1871년 3월 28일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파리 코뮌의 등장과 함께 전 유럽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당시 프랑스 진압군은 이를 진압하려 노력하였으나 되려 코뮌군 지휘관 로셀에 의해 당하기 일수였다. 그러던 4월 12일, 파리 코뮌 임시정부에서는 당시 임시 서기장으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Louis Auguste Blanqui)를 선출하고 블랑키는 13일, 드디어 팽창을 시작한다.

코뮌군은 주변 지역으로 천천히, 안정적이게 나아갔고, 어느덧 덩케르크에 다다르게 된다. 덩케르크에서 프랑스 진압군은 12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코뮌군은 겨우 6만의 군사로 그들을 맞서고 있었는데, 이때 로셀이 기병대대를 움직여 뒤를 치는 전략 덕에 1차 전투는 프랑스 진압군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진압군의 정예는 여전히 멀쩡했고 오히려 코뮌군은 많은 정예가 죽고 다쳤다. 그렇게 2차 전투가 시작되고 코뮌군은 대패한다. 6만의 군사 중 2차 전투에서 2만이 사망했고, 4만이 살아남았으나 그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을 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3차 전투에 돌입. 그러나 여전히 열세를 보이며 패배 직전에 도달하나 그들을 도우러 온 코뮌군으로 인해 프랑스 진압군이 혼란에 빠지면서 3차 전투에서 코뮌군이 대승을 거두며 덩케르크 전투는 코뮌군의 승리로 끝나고 덩케르크는 코뮌군의 손에 넘어간다.

덩케르크 전투 이후 프랑스 진압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파죽지세로 들어오는 상대해내지 못한 채 베르사유가 함락되고 베르사유에서 버티던 임시정부마저도 코뮌군에 의해 해산되고 7월 21일, 도주하던 아돌프 티에르가 코뮌군에 붙잡히며 임시정부가 항복하며 코뮌내전은 끝이난다.

그러나...

분단

코뮌내전 종결 직후, 토지개혁, 산업화 등과 같은 여러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이런 급진적인 개혁에 인민들은 이를 반겼으나 여전히 민주주의 잔당들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또한 당시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등장에 그들은 위협을 느꼈고, 코뮌 내부에 있는 민주주의 잔당들을 적극 지원하며 점차 민주주의 잔당들의 세는 커져만 간다.

그러던 1872년 9월, 아돌프 티에르가 총살형 당하며 민주주의 잔당들은 드디어 폭팔했고, 10월 21일 보르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며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고 코뮌은 진압군을 보냈으나 영국, 미국 등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대패하고 파리로 후퇴한다. 잔당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하고 보르도를 임시수도로 선언한다.

코뮌은 이에 프랑스 공화국을 '영국의 괴뢰국'이라 칭했고, 두 세력 간의 분쟁은 더욱이 심화된다. 이후 프랑스 공화국은 파죽지세로 몰려와 남프랑스를 점령. 이후 파리로 진격하지만 로셀 장군이 이를 대격파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로셀 장군은 전사하고 코뮌군과 공화국군의 전선은 고착되고야 만다.

전의를 상실한 두 세력은 1873년 1월, 휴전협상에 돌입하였으나 프랑스 공화국이 파리와 많은 지역을 요구하는 결례에 1차 협상은 결렬된다. 그러던 도중 코뮌의 1차 방어선이 뚫리고 공화국군이 낭시로 진격하는 데 이를 루이 장군이 크게 격파하고 그 기세를 타 그대로 남하,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공세를 멈춘다.

이에 놀란 공화국은 휴전협상을 제의. 더 이상의 피해를 원치 않던 코뮌이 이를 수락하며 2차 협상에 돌입한다. 이때 대부분의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됐으나 휴전선을 정하는 일로 6차 협상까지 가게되고 다행히 6차 협상에서 남프랑스와 북프랑스로 협상이 되며 1873년 6월 27일, 휴전협상이 체결된다.

혼란

1873년 6월 27일 체결된 휴전협상은 프랑스 내 혼란을 야기시켰고 경제적 요충지를 코뮌한테 빼앗긴 프랑스 공화국은 더더욱 혼란이 급증했다. 그러던 도중 당시 프랑스 공화국 국방장관 불랑제 장군의 엄청난 인기에 내각은 그를 국방장관에서 해임시키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불랑제는 자신을 따르던 군사들과 함께 친위쿠데타를 계획한다.

그리고 1875년 3월, 불랑제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는다. 이로 인해 당시 프랑스 공화국은 완전한 군부독재 체제가 자리잡게 되고 이후 10년간 불랑제의 독재가 이어지다 불랑제가 자연사하면서 군부독재는 끝이나나 싶었다.

그러나 불랑제 사후 그의 심복이던 아르망 장군이 권력을 잡고 군부독재는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후 몇십년간 지속된 군부독재에 민주주의는 짓밟혔으나 군사력 하나만큼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있었고 이덕에 코뮌에게 위협을 크게 가할 수 있었고 이후 알베르 베텡은 "군부독재의 유일한 업적은 군사력었다." 라 할 정도로 군부독재 시절의 프랑스 공화국의 군사력과 군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그리고 아르망이 권력을 잡은지 24년만에 사망하며 34년간 이어진 군부독재는 끝이나고 다시 부르주아 정부가 들어선다.(1909년) 그러나 당시 총리로 뽑힌 에밀 루베는 자신의 지지률을 높이기 위해 별에 별 짓을 다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코뮌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사실 에밀은 딱히 프랑스 코뮌에 선전포고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코뮌의 국경도발 사건으로 인해 당시 프랑스 공화국 내부 상황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올랐었고, 에밀은 국민들에게 어쩔 수 없이 선전포고한 것이었다.

이를 의회는 크게 반대했으나 이에 분노해 에밀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단독으로 프랑스 코뮌에 선전포고했고, 이덕에 당시 에밀의 지지률은 무려 80%가 넘어가며 그의 정권은 권력을 탄탄히 한다.

그러나 코뮌은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 2대 서기장을 바탕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했었고 당시 프랑스 공화국은 군사력은 있었으나 그 뒤를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했고 서서히 경제는 피폐해져 갔다. 결국 내부에서 시위까지 벌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80%까지 갔던 에밀의 지지률은 30%까지 떡락한다.

2차 코뮌내전

(코뮌전쟁이라 해야 맞지만 좀 더 간단히 하기 위해 2차 코뮌내전이라 부른다.)

에밀의 선전포고로 이루어진 2차 코뮌내전은 초반 프랑스 공화국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코뮌은 파리 근방까지 후퇴하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경제가 파산 직전까지 이르면서 프랑스 공화국군은 보급이 끊기게 되고 이를 이용해 코뮌군은 재반격하고 잃어버렸던 땅을 재수복한다.

코뮌군 사령관 루이 장군은 남진을 주장하였으나 서기장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가 이를 거부했고 결국 남진은 좌절되고 또다시 프랑스 공화국에게 회복의 기회를 준다. 그러나 클레망소의 최대의 실수로 여겨질 명령은 뜻밖의 사건으로 최대 업적이 된다.(!)
에밀은 내부 시위를 무력으로 강제 진압을 시도했고 이에 분노해 시위대는 무력 시위를 벌였고 시민을 쏠 수 없던 진압군은 시위대의 편에 서게 된다.

진압군이 시위대의 편에 서게되면서 에밀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프랑스 임시정부를 세우게 된다.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프랑스 공화국 내각은 프랑스 코뮌에게 항복하고 시위대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서기장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는 내각의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당시 찾아왔던 외교관을 죽이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우리 프랑스 코뮌은 같은 인민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는다!"

이 말에 감동받은 시위대는 프랑스 코뮌에게 항복.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는 이들을 전부 풀어주고 프랑스 코뮌의 인민으로써 그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1910년 4월 4일, 프랑스의 통일을 선언하며 2차 코뮌내전은 끝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