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 연방

대영 연방
Union of Great Britain
국기
대영의 국기이다.
국가All Hail Britannia
영토
대영의 지도이다.
본토 인구7800만명
인구 총합3억 6000만명
국가 원수카렌 사스키아 총괄지도자
수도런던
공용어영어
정치체제일당독재 체제, 중앙집권체제
경제체제국가자본주의
표어승리를 찬양하라, 내일은 우리의 것이니!
화폐단위파운드 스털링
본토 GDP4조 6800억 USD
GDP 총합6조 3000억 USD
국조검독수리
국화장미
진영제 5 인터내셔널

상징

국호

대영국과 그 위성국들로 이루어진 국가의 공식 국호는 대영 연방이며, 이들의 실질적 지도국은 대영국이다.

국기

국가

All Hail Britannia

국화

장미

국장

역사

연표

본토 경제 개발사

오스왈드 모즐리 시기

파일:모즐리 나치경례
모즐리 재임기의 가장 큰 특징은 여기가 파시즘인가 싶을정도의 신격화와 거대한 행정력, 무자비한 구성국 착취, 그리고 부정 불가능한 경제 발전이였다. 모즐리 시기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저 로마식 경례를 고집하였고, 1965년에 가서야 폐지된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난 우리 조국과 조국의 인민들 이외에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조국의 발전만을 위해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투쟁하는 것만이 진정한 승리의 길임을 알것이고 또 알아야만 합니다.""
-1931년 제 1차 6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오스왈드 모즐리는 치밀한 권력 암투 끝에 생디칼리스트들의 약점을 잡아 무너뜨린 후 집권한 인물로, 스탈린주의자임과 동시에 열렬한 인종주의자중 하나였습니다. 이시기에 그는 연방 총회를 전체주의자 총회로 변경, 자신의 사람들로 앉혀놓아 사실상 전원을 행사했고 광신적인 공업화정책과 국수주의적 정책을 실시한 인물입니다. 그 모든것은 무자비한 철권통치 하에 자행되었고 그 여파도 컸으나, 실제로 대영이 그 시기에 산업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 그 허점들을 뒤덮었음은 그의 정적들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이 현재의 패권과 힘, 체제를 유지하려면 막강한 공업력만이 살길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 신념의 총결집체가 3차례에 걸친 6개년 계획이며, 이는 그가 존경해온 스탈린의 모습과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는 재임하자마자 거의 온 국가의 총력을 동원하여 공업 발전에 퍼부었습니다. 본토에 있어서는 공장지대의 효율적인 재배치와 개선에 대해 대폭 지출을 감행했고, 해외 식민지들의 자치권을 억압함과 동시에 거의 무계획적이라 볼 수 있는 마구잡이 공업화 강행으로 식민지의 본 목적을 단순 착취가 아닌 거대한 공업지대로 만들어버립니다. 좁은 영토에 우격다짐으로 공장을 밀어넣을순 없으니 광활한 식민지를 활용, 독일과 일본의 산업정책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범위와 강도면에서 독일과 일본에 우위를 점하고, 독일의 로켓이 영국 공업지대를 가격할때도 해외의 식민지 공업지대들에서 나오는 생산량이 부숴지는 양을 뛰어넘었습니다. 더군다나 독일이 V-2를 개발할 시점에는 이미 미국이 참전하고 구축함의 수송선단 호위가 일반화되어 유보트 함대의 위협으로부터도 좀 자유로워진 상황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온 또다른 성과라 볼 수 있습니다.

기술력 향상에도 예외가 아니였습니다. 독일이 이미 민간기업등으로 위장한 군사기업들과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군사기술을 나날이 증강시키고 있단 것을 알고 있었고, 독일에게 기술력이 밀릴지도 모른단 생각은 그에겐 차마 하기도 힘들정도의 악몽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아무리 생산량이 막대하여도 기술력이 수반하지 못한다면 노예국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찬밥신세던 과학자들까지 대폭 등용, 국가 주도의 기술 발전(군사 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광범위했다)을 실시합니다. 또한 그는 냉전 와중에도 서방과의 필요에 따른 협력은 하였는데, 이는 자국의 실리를 챙김과 동시에 자국의 전략적 위치를 아는 공산권이 영국을 버릴 수 없단 것을 알고 저지른 일종의 삥뜯기였습니다. 주로 소련에 대한 불만이 있거나 진정으로 필요한 때에 꺼내든 카드로, 이것은 영국을 '혁명의 배신자'라 부르는데 더 일조했습니다. 하지만 대서양에서의 위치와 해양강국의 지위, 수많은 영토들을 알기에 공산권은 영국을 함부로 대할수만은 없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노력은 실제로 대성공하여 그의 재임기간동안 대영의 경제 성장률은 매년 10% 이상을 기록하였고 광범위한 행정정책덕에 국민의 교육수준도 높아졌으며, 과학기술력은 어디 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반적인 삶의 수준도 결국엔 높아졌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가 항상 공존하듯, 이런 눈부신 성과 뒤에는 그 이면이 존재합니다. 대규모 비밀경찰의 운용, 숙청등 다양하지만, 가장 거대했던것은 구성국 농민 착취였습니다. 영국 경제는 공업에 주력하고 있는데, 그만큼 본토 농업의 인기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에게 먹일 식량은 본토에서 나오질 않으며, 식민지도 공업화하는 바람에 비슷한 상황입니다. 결국 식민지 노동자들(주로 인도를) 더 쥐어짭니다. 모든 농업 생산량은 대영 연방에 필요한만큼(매우 막대한 양)만큼을 무조건적으로 뜯겼고, 인도인들은 굶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것이 기어이 폭발하여 1934년, 6개년 계획 시행 고작 3년만에 벵골 대기근의 예고판이라 불리는 '인도 식량 대란'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말이 대란이지, 사실상 지옥도나 다름없었습니다. 인도인들은 심지어 소를 먹는 사람, 인육을 먹는 사람까지 등장했고,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굶을대로 굶은 이들이 제대로 싸울리 만무했고, 결국 영국 본토군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합니다. 이 시기에 사망한 인도인들은 영국측 기록이 500만이며, 실제론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러한 체제는 모즐리가 집권한 27년간 계속 이어졌고, 국가적 차원에서 본다면 분명 엄청난 황금기였지만 그만큼 이면에는 더욱 가혹한 철권통치가 존재했습니다. 이후 1960년, 인도는 영국과 4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고, 마침내 모즐리가 급사하면서 생디칼리스트들이 재집권함에따라 1961년 완전한 독립을 맞이합니다.

생디칼리스트 집단 지도체제

이 시기의 특징은 '자발적인 사회주의'와 평등, 그리고 자체적인 경제권 구축 작업으로 보여진다.

""모즐리의 시대는 갔습니다. 그가 이룩한 경제적 업적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적 이념에 반하는 행동들을 저질렀고, 우리 식민지의 노동자들은 물론, 영국인들에 대한 탄압, 압제적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모즐리를 그리워하는 동지들이 많고, 우리 역시 그를 좋은 동지로 기억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모즐리 동지의 업적으로 사회주의적 영혼을 다시금 불태울 것입니다.""
-대영 연방 국무 평의회 창설 선언문 중.

모즐리의 급사로 최대주의자들은 구심력을 잃었고, 사망소식이 발표되자 그간 억눌려오던 생디칼리스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헌법에 따라 자동으로 소집된 전체주의자 총회에서 최대주의자들은 여전히 단합하지 못한채 패닉에 빠져있었고 사회민주주의자와 동맹한 생디칼리스트들이 집권, 당 총서기 제도를 폐지하고 집단 지도체제의 길을 걷게 됩니다. '대영 연방 국무 평의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서방의 미미하게나마 존속하는 경제 영향력 폐지와 복지 확충이었습니다. 서방 자본에 대한 심하면 몰수까지 이어지는 배척, 그리고 모즐리 시절에 쌓아놓은 막대한 국부를 이용한 복지 확충이 시작됩니다. 출산 지원, 취업 지원, 유급 휴가제등 당시로선 시대를 앞서간 복지였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시대의 가장 큰 업적은 국내로는 '자발적 사회주의' 시행, 대외적으론 '대영 연방' 구축입니다.

그간 강제되어오고 압제적으로 이루어져온 모즐리의 최대주의자들이 주도한 사회주의 질서는 대중으로 하여금 공포심과 세뇌를 이용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서방의 좋은 선전용 예시가 되었고, 철저한 사회주의적 이념의 무장과 진정한 이념의 실현을 위해선 "억압이 아니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이념대결을 승리하자" 라는 혁명적 구상을 하기에 이르릅니다. 이 시기의 복지정책은 굉장히 시대를 앞서갔단 평가를 많이 듣는데, 유급 휴가와 출산 지원제도, 그리고 사회 구조적으로는 '능력에 맞게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한다'를 철저히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의 좀 더 자세한 사회 모습에 대해선 추후 대영 생디칼리스트 관련 글에서 자세히 다룰 생각입니다.

대외적으론 모즐리의 압제로 인해 폭동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던 식민지들에 대한 방침이었습니다. 우선 지금 당장 이들을 독립시키자는 아나키스트 파와 존속시키어 진정한 사회주의의 길을 걷게 만들자는 당 정론이 충돌하였고, 그 결과 독립시키되 정부를 통제 가능하게 만들어 그들의 발전을 돕고 사회주의의 길을 안내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는 당시 대영의 목표이던 '자급 자족 사회주의 국가 연대' 건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대놓고 정부를 임명하고 대영 연방에 가입시키면 누가봐도 이상했고, 반발이 더욱 거세질 수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즉각 독립은 무리였고, 서서히 자치도를 올리며 1965년까지 모즐리가 만들어놓은 노예화를 청산하고 삶의 질을 개선해주는데에 집중하는데, '식민지 인민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명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5년 8월 12일, 대부분의 국가가 영국의 계획대로 독립 이후 사실상의 위성국이 되어주어 대영연방에 가입하는데에 성공합니다. 이들은 대영 본국의 외교적/정치적 지원을 통해 스스로 경제적 성장을 이룩해내며, 역설적이게도 모즐리가 만들어놓은 공업지대가 영국의 노하우 공유와 더불어 시너지를 발휘하며 이들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후 대영의 경제 공동체에 합류, 거대한 규모의 사회주의 국가간 시장 구축에 크게 이바지합니다. 이런 체제는 사회주의 국가 전체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권 전체의 경제 규모 향상과 위기 극복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일례로 제 1차 석유파동 당시 중동 국가들을 부추기고 대영 연방에 포함된 중동 국가들을 이용해 제 1세계를 제대로 엿맥이는 활약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공산권 전체의 강화, 대영 연방 전체의 번영에는 크게 이바지하나, 대외 지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비했던 본토 경제 개발정책으로 인해 이미 영국 본토의 경제 성장률은 크게 줄어 7%, 5%, 3%... 이런식으로 점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최대주의자는 이를 경제 무능이라며 맹비난했지만, 끊임없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경제는 결국 언젠가 한계에 다다르는데, 그게 이 시기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정도면 오히려 소련보다도 선방한것이며, 대영 연방 전체적으로 본다면 생디칼리스트들이 경제를 망쳤다볼순 없습니다. 현재 영국의 힘의 원천이나 다를바없는 대영연방 창설과 발전에 가장 큰 공로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1979년 이후

1970년대 후반, 생디칼리스트 정부는 결국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동안의 한쪽 세력이 이길때마다 달라지던 체제가 불합리하다 판단, 총괄지도자를 국가 원수로 하고 의결 기관으로 대영 연방 총회를 둡니다. 그들은 1991년까지 대영 연방의 재구성(대영 연방 구성국 관련 설정글에서 다룰것), 개방적인 정책을 통해 영국 본토의 침체기를 이겨내는데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무너지자 "혁명정신을 저버리고 더러운 자본가와 결탁해 공산권 수호에 불충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탓이다!" 란 비난에 휩쓸리게 되고, 어느 한쪽이 항상 옳은게 아니란걸 깨달은 대영의 정치 문화도 많이 개선되어 현재는 그때그때 적합한 경제정책을 피며 경제를 안정적으로 굴리고 있습니다. 또한 안정적인 국민 생활과 지지도에 기반한 적절한 개방을 통해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성공하였습니다.

군사

대영 혁명 친위군 참조.

자연환경

영토

지형

생태

자원

인문환경

인구

언어

종교

교통

행정구역

정치

정당

행정

국제관계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단위

법정 연호

시간대

관련 문서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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