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본 문서는 신오민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020년 12월 5일 기준으로 아직 완전히 합의가 끝난 설정이 아니므로 주의.
신화 시대
일반적으로 신오민국에서 신화 시대라 한다면 12세기 이전의 시기를 이른다. 이 시기에 일본과 에조 등과 같은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어 신오에 뿌리를 내리던 토착민족과 융합하여 민족을 구성했다.
신오는 전체적으로 냉대습윤기후가 나타나고, 산악이 많아 고산기후도 함께 나타나는 등 농사에 그리 적합한 지형이 아니었다. 그나마 평지가 있는 동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농사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원활히 이루어지진 못했다. 그러나 이후 철기의 보급과 함께 계단식 농사가 성행하면서 일부 해소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화로 전해지는 바로는 천주(天主)가 호노오미카도(炎帝)와 코오리미카도(氷帝)를 천하에 내려보내어 신오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후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천주의 명에 따라 신오에 있으면서 신오를 주관하였다.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가 신오에 있으면서 1남 1녀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맏이인 야스유키(保行)와 여동생 오카야(岡谷)는 텐칸산(天館山)에 올라 천주의 계시를 받는데, 이후 야스유키는 신오를 다스리게 되고, 오카야는 초대 신시(神使, 신의 사자란 뜻으로, 신오 신토의 최고 사제이다.)가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신화적 세계관에 따른 내용이고, 역사학자들이 추론하기로는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각각 불과 얼음을 뜻하는 데에서 신오의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신오는 매우 추운 지역인데, 특히 겨울에는 더욱 춥다. 게다가 엄청난 폭설이 내리기도 하여 신오 사람들에게 추위, 그러니까 얼음은 두려움의 존재였다. 이런 추위를 달래주던 불은 신오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치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고마운 존재였다. 이러한 자연환경 탓에 숭상의 대상이었던 불과 얼음이 신으로 묘사되는 것이라 한다.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를 거느리는 최고신으로 묘사되는 천주는 당시의 신오 사람들을 통솔하는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의 자식으로 전해지는 야스유키과 오카야는 천주로 묘사되는 지도자의 자식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담으로 신오 신토의 신토라 불리지 않는다. 신토는 일본 본토에서 온 말이며, 신오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물론 신토와 신오 신토의 유사점이 있지만, 신오 신토는 샤머니즘과 조상 숭배의 요소가 특히 강하다. 그런데 신오 신토라 불리게 된 이유는 과거 일본 제국 시절의 민속학자들이 신오의 전통 종교에 일본 신토의 요소들이 남아있다고 결론을 지으면서 붙어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신오에 신토가 전파되기도 했으며, 신오 곳곳에 신사들이 세워지기도 했다.
신오를 통치했던 야스유키 가문은 1147년까지 20여 대(代)동안 존속되다 마지막 왕(왕이란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편의상 왕이라 한다.)이 신하들의 난으로 죽임을 당하며 야스유키 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난국 시대
야스유키 가가 망하게 되면서 지방에서 부를 축적시키며 성장한 세력이 자신들을 성주 혹은 영주라 지칭하며 곳곳에 국가를 세우게 된다. 그러면서 이와키(石城)이란 구조물을 건축하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이와키 시대라고도 한다.
난국 시대 동안 3만㎢의 작은 섬에 생긴 국가만 10여 개가 넘어간다. 부족한 영토와 자원 등을 확보하기 위해 각 국가는 서로를 침략하여 전쟁을 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양상이 30년간 이루어지다 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3국에 정리당하며 1177년에 이르러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마무리되며 삼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삼국 시대
삼국은 난국 시대와는 달리 서로 상부상조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삼국의 국왕은 서로 우열이 없이 평등했고, 활발한 교류를 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도 1426년 북부의 류호국(柳湖國)의 왕으로 즉위한 타테아키가 평화를 깨고 남하정책을 폄으로써 깨지게 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남부 2국은 류호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만 동맹을 맺어 류호국에 맞선다. 하지만 타테아키가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류호국은 남하 정책을 이어야 한다는 남벌파(南伐派)와 다시 평화의 분위기로 회귀해야 한다는 회귀파(回歸派)로 국론이 나뉘어 류호국은 분열된다.
신월국의 삼국 통일
남벌파의 서류호, 회귀파의 동류호로 나뉘어진 류호국은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월국과 만월국은 국가 재정비에 나선다. 이후 신월국과 만월국은 서류호를 공격했고, 이어서 동류호도 공격하여 류호국을 멸망시킨다. 류호국이 멸망하고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신월국과 만월국은 서로에 칼을 겨눴고, 결국 신월국에 의해 만월국이 멸망되면서 신월국은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통일 시대
1430년 삼국을 통일한 신월국은 겉으로는 통일되었지만 내부적으론 많은 문제가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야마하시가 사망하면서 왕족 사이 내분이 잦았다. 야마하시 사후 왕들의 재위기간은 채 5년도 넘기지 못했다. 또한 왕위 계승권을 두고 왕족 사이에서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으로 인해 성이 불타는 등 혼란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닌 곳곳에서 만월국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류호국 유민 일부는 신류호국을 선포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게다가 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돈 좀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영주라 칭하며 백성들을 현혹하기도 했다.
요시히로 정권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1451년 왕위에 오른 요시히로가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군을 총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하는 등 내부 상황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중앙집권체제도 강화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일본을 통해 불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영주라 칭하는 자들에게 관직을 내려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등의 정책도 펼쳤다. 이들이 강해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도 병행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혼란스러웠던 신월국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근세 신월국
신월국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내게 되는데, 요시히로가 피를 부르며 갈고 닦은 강력한 왕권과 그 왕권을 지속해서 발전시켜 가던 후대 왕들에 의해 신월국은 안정된 상태를 가지게 되었고, 이 무렵 주변 국가와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여 전성기를 맞게 된다.
군부 시대
그러나 1764년 군부의 반역으로 길었던 평화는 깨지게 된다. 권력의 욕망에 눈이 멀었던 에이소는 군을 일으켜 성을 점령했고, 이어 왕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이후 반대 세력들을 모두 숙청하여 강한 권력을 다져나간다. 권력을 얻은 에이소를 비롯한 군부 세력은 유흥에 빠져 살게 되는데, 자동적으로 지방 관리들도 부패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크나큰 부담이 되었다.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걷거나, 어린 아이 심지어는 가축에 대해서도 세금을 걷는 등 막장스러운 수취 제도가 성행하였다.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금방 군에 진압당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편 국외에선 미국의 흑선내항으로 일본 에도 막부가 개항하는 등 국제 사회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오민국의 성립과 멸망
신오민국의 성립과 발전 과정
1868년 12월, 에조 공화국이 성립되자 신월국에도 공화제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는 군부 집권에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과 지식인 계층은 본래 목표였던 군부 타도에서 공화정 국가를 설립하자는 다소 급진적인 목표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옆나라 에조를 모델로 하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신오민국건국회의'를 형성한다. 선거를 통해 미노세 코자부로를 총재로 선출하여 군부를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당시 민심은 미쳐 날뛰는 군부 세력보단 신오민국건국회의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후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해 무장하여 군부와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군부와 신오민국건국회의의 싸움은 신오민국건국회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지만, 나카코하라 전투에서 미노세 코자부로 총재가 전사하여 우도 시게시를 2대 총재로 선출하여 1869년 5월 신오민국 정부를 설립한다. 우도 시게시 내각은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1대 대통령으로 우도 시게시 본인이 취임한다. 또한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방위부, 국토부 5부를 설치하여 정부를 구성해 나갔다.
5부가 설치되고 현재 민의회의 전신이 되는 국민의회가 설치된다. 3개월 간의 정비 과정을 거쳐 8월에 총선이 예기되어 있었으나, 1869년 8월 미국이 에조와 수교를 맺고 이어 신오에 와서도 수교를 맺으며 총선은 미뤄지게 된다. 또한 이듬해 1870년 신오와 미국은 신미수호조약을 체결한다.
미뤄진 총선은 1869년 10월에 실시된다. 선거가 생소했던 시기였기에 당시 선거율과 선거에 나온 정당은 적었지만, 자유신오당이 24석을 가져가며 다수 의석을 확보한다. 우리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민주신오당은 10석, 자유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자유당이 2석을 가져가며 첫 총선은 성황리에 마무리된다.
한편 신오민국이 성립되고, 행정 각부가 설치되고, 미국과 수교를 맺고, 총선거가 실시되는 이 많은 일들이 단 1년 만에 발생되어 혼란이 있었으나, 신오민국에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의 지지로 혼란한 시기를 극복한다.
1874년, 우도 시게시 대통령은 약속에 따라 5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며 첫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자유신오당과 민주신오당, 자유당, 그리고 신생 정당인 민중당 등이 후보를 내세우며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결과적으로 자유신오당의 소마자와 아츠유키가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토지개혁, 행정구역 개편, 군부 잔당 세력 소탕 등의 업적을 세운다. 하지만 군부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도 사망하여 비판받기도 한다.
1876년, 조선에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신오민국은 일본을 경계한다. 일본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를 등에 업기도 하고 같은 정서를 보유한 에조와도 친분을 만드는 등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1879년 3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전 선거와는 달리 민주신오당의 카미우치 케시가 당선되며 민주신오당의 시대가 개막하였다. 한편 총선에서는 자유신오당과 민주신오당이 의석을 양분해 먹는 등 두 정당은 쟁쟁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소마자와 아츠유키 정부와는 달리 더욱 적극적인 반일본 정책으로 일본과 잦은 충돌이 있었다.
일본과 잦은 충돌이 발생한 점을 빼곤 무사히 임기를 마치며 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이번에는 자유신오당의 카노마타 코키가 당선되며 자유신오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 카노마타 코키가 취임하자 마자 청일전쟁이 발발했는데, 청을 도우려던 카노마타 코키 정부였지만 에조 공화국의 만류로 끝내 중립 선언을 한다.
신오민국의 멸망
청일전쟁의 결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지는데,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삼국이 일본에 압력을 넣으며 일본은 청에 랴오둥 반도를 반환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신오민국은 러시아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며 일본을 견제하기에 나선다. 이 때 신오민국에 몇 없는 광산이 털리기도 했으나 신오민국은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후 발생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신오민국에 대해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으며 신오민국에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신오민국에 대한 결정권을 얻은 일본은 보호라는 명분 하에 국방권, 외교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타테마쿠라 야스노리 정부는 저항했으나, 이를 막아설 힘이 없었기에 결국 1905년 우야가와 조약이 체결되며 국방권, 외교권을 이양한다.
일본은 이후 합병을 제의(말이 제의지 사실은 요구였다.)했고, 타테마쿠라 야스노리가 이에 서명하여 신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1907년 신오민국은 일본에 합병당한다.
일제 시대
나라가 갑자기 빼앗겼으니 이를 반가워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신오민국이 일본에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무장 투쟁을 나섰다. 또한 신오독립당이 결성되며 일본에 항전했다. 신오 총독부를 습격하여 총독을 살해하거나, 곳곳에 생긴 수탈 기관들을 테러하는 등 무장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렇게 항전할 수록 돌아오는 것은 더욱 강력히 압박하여 통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신오독립당을 비롯한 단체들이 총독부 명령 하에 활동 금지 처분을 당하며 한풀 꺾이는 듯했다.
하지만 활동 금지 처분을 당했어도 꺾이지 않았다. 또한 소련의 도움으로 테러를 일으키고 무장 투쟁 활동을 하는 등 활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소련의 도움이 탐탁치 않았던 일부 세력은 신오독립당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독립당을 결성한다. 자유독립당은 무장 투쟁도 무장 투쟁이지만 그 전에 국민 스스로가 계몽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교를 세우고 교육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한편 일본의 민족학자들은 신오 신토는 일본 신토의 한 종류라고도 했고, 신오 신토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다며 탄압하기도 했다. 이에 신오 신토 교인들은 크게 반발한다.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성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며 소련의 영향으로 시게타다 요시아키를 총서기장으로 하는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신오독립당은 환영하는 분위기였으나, 자유독립당은 이에 반발하여 자유신오국민본부를 결성하여 자유민주주의 신오민국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강한 탄압으로 자유신오국민본부는 해체되고 자유민주주의 신오민국 설립의 꿈은 좌절된다. 그러나 신오 신토가 인민들을 홀린다며 신오 신토를 탄압하자 이들도 자유 진영에 가담하여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대립한다.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멸망과 신오민국의 성립
날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신오 소비에트 공화국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989년 소련 내전이 발생하여 소련이 휘청거리자 신오의 자유주의자들은 좌절된 신오민국 건국의 꿈을 다시 품게 된다. 이후 자유신오국민본부를 부활시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선다. 또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지원하며 신오민국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1991년 결국 소련이 해체되어 지지 기반이 사라지자 아마가사카 우메이치 총서기장은 사임하며 자유신오국민본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자유신오국민본부는 과거의 신오가 아닌 새로운 신오를 만들겠다는 의미로 1992년 5월 1대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였다. 이후 국민의회의 명칭을 민의회로 변경하고 국호를 신오민국으로 변경했다. 또한 헌법을 제정하여 1994년 8월 공포한다. 이듬해 1대 대선을 실시하여 자유신오당의 아사이다 스에타카가 당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