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태국 문학은 태국어를 통해 태국의 사상과 감정, 정서 등 가치 있는 경험을 토대로 형상화한 문학을 일컫는다. 태국 문학사의 구분은 크게 고전 문학 계열과 근대 문학 계열, 그리고 현대 문학 계열, 이 세 가지로 구분한다.
갈래의 구분
문학계에서 갈래의 구분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과 해석이 존재한다. 기존에는 서양의 3구분법(서정, 서사, 극)이 사용되었으나, 태국 문학과는 실질적으로 거리가 먼 구분법이었기에, 그 대체로 현재 널리 인정하고 있는 구분법은 『시암문학사』의 3구분법을 따른다. '3구분법'의 핵심은 개인의 '의식'과 '사회'의 관계를 토대로 구분하는 것이며, 현재 교육 과정 및 문학사 교육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3구분법'에서는 개인의 '의식'이 '사회'의 개입 없이 개인의 사상, 감정, 정서 등을 표현하는 문학 갈래를 '서정'이라고 본다. 개인의 '의식'이 '사회'에 개입함으로 개인의 경험을 사회에 통용시키려는 것, 즉 의식의 사회화를 '교술'이라고 본다. 한편 개인의 '의식'과 '사회'가 상호 대립하는 구도를 가진 것을 '서사'라고 구분지었다.
위 갈래의 하위 장르는 다음과 같다.
- 서정 : 시, 고전시
- 교술 : 찬시, 선시, 수필
- 서사 : 소설, 희곡
현대 문학 계열
태국 문학계에서는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을 시대적으로 구분하고자 다양한 구분법을 제시하였으나,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시대적인 구분으로 최초의 입헌군주제가 시행된 1930년대를 기준점으로 삼는다.
현대문학은 19세기 말에 발생한 입헌혁명부터 1932년까지를 초기문학, 1932년 입헌 쿠데타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계몽문학,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르는 현대문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문학 시기에는 계몽문학과 전근대적 문학이 혼재된 시기였다. 당시에는 실험적 형태의 문학이 다소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현대 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한 기초 토대를 이룩했던 시기이다. 계몽문학 시기는 실질적인 민주주의 체제 확립에 따른 시민 의식의 향상에 뒷받침하여 문학이 기존의 전근대적 사상에서 새로운 시민 계몽 사상으로 전이된 시기이다. 이후 현대문학 시기는 1945년 이후 잇다른 쿠데타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역사와 사건의 흐름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새로 질서화하는 것이 주된 문학 시기이다.
계몽문학
계몽문학 시기에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라는 큰 사회적 변동이 있었다. 왕조와 귀족 중심의 구관료체제가 민간 관료 및 군인을 중심으로 하는 신관료체제로 전이되며, 절대군주제가 입헌군주제에 의한 초기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국민은 주권자라는 인식이 새로이 확립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사상은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2년 입헌 혁명 이후 서적 출판업이 흥행하며 각종 대중 문학이 시민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한편, 문학 비평론이 새로이 대두되었다. 이 시기의 문학 작품들은 사회 변화로 초래한 구 귀족층의 몰락을 중점으로 둔 '구시대 관습의 파괴'에 대한 견해가 다수 나타나는데, 일부는 구시대의 몰락을 두고 과거에 대한 동경 의식이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구시대의 관습에 저항하는 문학이 나타났다. 또한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입각한 자유주의적인 의식이 많이 반영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 속에 여성 평등 의식이나 지역, 문화, 종교에 대한 자유 의식이 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여러 여성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다양한 여성 문학 속에서 여성 등장인물들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 평등을 추구하는 주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덕마이 쏫의 『귀족』, 능나이 러이의 『백 분의 일』, 쑤랑 카낭의 『나쁜 여자』, 『어떤 생각』 등의 소설이 있으며, 시로는 캄킷 칸능의 「죽은 아버지께」, 「이상주의자」 등의 작품이 있다.
한편 피분 송크람 정부의 란타니욤 정책(태국 문화명령)으로 정부가 태국의 문화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각종 작품 활동에 대한 제재가 시행되며 새로운 변환점을 맞이하였다. 정부의 지나친 언어, 문법적 규정으로 인하여 문학이 침체되는 위기를 맞이하는 한편, 정부의 부조리적 독재에 대항하는 문학 사조에 대한 집중 탄압이 이루어졌다. 결국 이 시기를 거치며 다수의 작가들이 절필을 결정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대표 작가와 작품
- 던짜오 아킷담컹
- 쏫 꾸라마르킷
- 야컨
- 수와락 느엉
- 쁘라야 차밋
- 프라야 싸라파이피팟
- 멈라차 웡
- 덕마이 쏫: 여성 소설가로 1905년 2월 17일 방콕에서 농무성 장관을 지낸 아버지와 주연급 무용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고모의 양녀가 되어 왕궁에서 13살까지 생활했으며, 이 시기 불심이 두터운 불교 신자였던 고모와 같이 생활하며 자연히 불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후 본가로 돌아와서 당시 상류 계층 자녀들이 다니던 성 요셉 학원(현 성 요셉 여성 대학)에 입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였는데 이 시기에 프랑스의 리얼리즘 문학 사조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17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 후로 이복 오빠의 집에서 생활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7년 처음 발표한 희곡인 『공황』으로 등단하였고, 이후엔 소설을 집필하게 시작하여 최초의 여성 장편 소설인 『그녀의 적』을 잡지에서 연재하였다. 그녀의 초기 작품은 로맨틱한 연애 소설 및 가정 소설이 주를 이루었으나, 1932년 시대적 변화와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사회적 상황이 다수 반영되어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성의 주체성과 교육의 필요성을 작품 속에 담아내었으며, 자신의 가치관을 소설 속에 사실적으로 투영하였다고 평가 받는다.
- 대표작: 『그녀의 적』, 『귀족』, 『애국 시민』, 『좋은 사마리아인』 등
- 능나이 러이: 『백 분의 일』
- 쑤랑 카낭: 『나쁜 여자』, 『어떤 생각』
- 캄킷 칸능: 「죽은 아버지께」, 「이상주의자」
현대문학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왕정복고 혁명으로 인해 기존 란타니욤 정책이 철폐되며 태국 문학이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서 문학은 '문학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순수문학 계열과 '사회와 삶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민생문학 계열이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두 계열은 서로 상충하는 문학 사조로 분열되었다. 순수문학 사조에서는 낭만주의를 중시하는 문학 작품이 주로 나타났고, 민생문학 사조에서는 진정한 민주적 가치 실현을 위한 목적주의적인 작품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낭만주의가 대중적으로 선호를 받았으나, 사회 통치 문화의 변화 속에서 민생문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이견으로 인해 두 계열은 극심한 대립을 이루고, 결국에는 정치적 갈등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1947년 왕정복고 혁명 이후 약 2년 만에 다시 피분송크람에 의한 군사정권이 세워지며 정식적인 공화국 체제가 확립되며 문학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다시금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민생문학 사조 중에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성향의 작가 및 언론인들에 대한 탄압과 숙청에 돌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생사조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출판인쇄법을 통과시켜 문학 작품에 대한 검열 제도를 도입, 강화하였고, 내란 혐의를 적용하여 민생사조와 관련된 언론인 및 대학생, 교수, 학자 등을 대거 체포하였다. 이 사건 이후 군사 정권이 40년 이상 이어지며 민생사조는 오랫동안 회생되지 못하였고, 문학의 암흑기 속에서 낭만주의와 오락주의만이 이어졌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기존에 발전해오던 지성 문학은 자취를 감추었고, 낭만적 환상과 오락성만이 나타나는 낭만문학만이 나타나며 '문학 무용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현재는 이러한 낭만문학을 두고 '부패문학'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부 민생문학 사조 작가들은 비록 본인들의 역할이 크게 제한된 상황임에도 불구, 사회문학 사조로 발전하여 근근히 이어졌다. 사릿 타나왓 정부 시기인 1962년에는 각 대학교의 문예회를 중심으로 청년문학이 발생하였다. 청년문학의 큰 특징은 외형적으로는 낭만주의적 색채를 띄며, 청년적인 환상과 긍정적 미래 지향적 태도를 갖추고 있으나, 이것이 모두 꿈이며 실제로는 매음굴과 술집을 드나드는 무기력한 인간상으로 결론을 짓는 구성 요소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청년문학을 '몽유문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문학 또한 정부의 탄압을 받으며 오래 이어가진 못하였다.
1970년대 후반, 사릿 타나왓 정부 말기를 기점으로 자유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민적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문학에서 사회문학 사조가 다시 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1972년 발간된 잡지 '비판사회학'에서는 의도적인 시의 형식 파괴를 둔 시 「바다를 펴내다」라는 시가 창간호에 실리며 작가들에게 꾸준히 유지해오던 형식(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이후 타놈 끼티카존이 집권하며 대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비판적 여론이 꾸준히 형성되며 대학교를 중심으로 사회문학 사조가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위타야껀 치양쿤으로 그는 논설, 단편소설, 희곡, 시 등 다방면에서 많은 작품을 내며 사회비판적 문학 사조의 형성을 주도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신세대 작가들이 탄생하였다. 새로이 배출된 신세대 작가들은 시민, 학생들에게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범국민적 운동을 주장하였으며, 1985년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5년 민주화 운동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가 반영되며 태국 사회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출판업에 있어서도 그동안 절판된 다양한 작품들이 다시 재생산되어 시민들의 지적 갈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전 군사정권 시기에서 금서로 지정된 다양한 사상서들이 출판되었으며, 기존 민생문학 사조가 다시 조명받게 되었다. 문학에서는 시민들의 승리를 이야기하거나,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거나, 여전한 빈부격차와 노동자 소외를 거론하는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등장하며 여러 견해를 담은 작품들이 시민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다. 이 시기 문학은 문학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사회의 거울이자, 시민들에겐 새로운 견해를 전해주는 메시지이자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후 민주주의 체제가 안정화에 접어들며 기존의 낭만문학, 사회문학 사조는 물론, 종교문학, 민족문학 등 다양한 사조가 등장하며 문학적 융성기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