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공화국/역사

1947년 11월 8일, 쁠랙 피분송크람의 2차 쿠데타로 임시행정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동년 12월 29일, 1948년 2월 17일에 제1, 2 임시조치령을 발표함에 따라 헌법의 효력 정지와 왕정 폐지를 선언, 1948년 9월 16일 임시행정위원회에서 왕정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시행을 골자로 한 헌법을 제정(제1헌법), 10월 1일자로 시행됨에 따라 타이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시대 구분

제1헌법이 발표된 1948년을 타이 공화국 역사의 원년으로 본다. 이후 헌법 개정마다 헌법의 차수를 붙이며, 헌법의 차수에 따라 역사를 구분한다. 현행 헌법은 1990년부터 시행된 제4헌법으로 대통령의 장기 집권 우려와 이로 인한 행정 침체 가능성에 대한 지적으로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헌법 차수 특징 비고
제1헌법 초대 제헌 헌법의 제정
  • 시기: 1948년 - 1959년
  • 대통령 선거 직선제 실시
  • 대통령의 부통령 임명
제2헌법 국회의 양원제 도입(공의회과 상의회)
4년 중임(제한 없음)
  • 시기: 1959년 - 1972년
  • 국회는 하원인 공의회와 상원인 상의회로 구분
제3헌법 5년 중임(제한 없음)
양원제 폐지
  • 시기: 1972년 - 1990년
  • 양원제 국회를 단원제로 환원
제4헌법 광역행정구 장(長)의 주민 직선제 시행
  • 시기: 1992년 - 현행
  • 주(州), 특별행정시의 장(長)을 주민에 의한 직선제로 선출
  • 정치, 언론의 자유와 인권 보장 명시(1986년 민주화 선언)

정치사

타이 공화국의 정치사는 군부와 독재를 위한 민주주의를 시민들이 쟁취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ㆍ2차 세계대전기에 태국은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열강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급급한 상황이었고 내부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필두로 하는 이념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에 1932년 군인인 쁠랙 피분송크람과 태국 인민당의 파혼 폰파유세하나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며 왕정을 국외 추방, 의회의 역할을 하던 시암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의원내각제 형식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반공과 근대화를 기조로 하던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본토로 침공하자 굴욕적인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패전과 외교 실패를 명분으로 왕정복고 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차크리 왕조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1946년 12월, 국왕인 라마 8세가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당시 총리였던 쁘리디 파놈용은 '라마 8세 붕어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사건을 조사하였지만 '타살 가능성이 있다'라는 추측만 내놓은채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현직 국왕의 의문스러운 사망을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중적인 비난이 쏟아지며 쁘리디 파놈용 내각은 총사퇴를 하며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사회의 공분과 혼란은 가시질 않았다. 이를 계기로 쁠랙 피분송크람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재집권하였고, 군사정부에 의한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1985년에는 당시 대통령인 타놈 끼티카존이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중임제 도입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고, 국민적 반대에 부딫히며 '1985년 민주 항쟁'이 발생하였다. 강압적인 진압을 하던 정부는 헌법 개정 포기와 정치ㆍ언론의 자유, 인권 보장을 명시한 '1986년 민주화 선언'을 하며 민주정치 시기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1990년 제4헌법의 도입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공화국 수립 이전

차크리 왕조

라마 1세

1782년 차크리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하며 차크리 왕조가 수립되었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주의 대두로 시암은 영국,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엿고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긴밀하게 다졌다. 이러한 외교와 근대화는 시암이 유럽 열강들로부터 식민지화를 피하고 동남아시아에서 독립을 유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09년 영국-시암 조약을 통해 현재 말레이 반도에서의 국경이 정해졌고, 이때 파타니 주, 얄라 주, 나라티왓 주, 사툰 주가 시암령으로 속하게 되었다.

세계대전기

쁠랙 피분송크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32년, 쁠랙 피분송크람과 태국 인민당이 주도로 쿠데타를 일으키며, 의회의 역할을 하던 시암 인민위원회는 해체되었고, 왕정은 국외로 망명을 가며 형식상의 의원내각제 체제로 진입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파혼 폰파유하세나를 총리로 추대하는 한편, 반공법 제정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을 대거 축출하였다.

태국의 정국이 안정화되며 1938년에는 쿠데타를 주도했던 피분송크람이 총리직에 올랐고, 자신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이 태국을 근대화, 서양화하여 더욱 발전시킬 것을 밝혔는데, 이 시기에 태국의 문화, 의복, 주거 양식 등 사회 전반면을 서양화하는 '태국 문화명령'을 추진하였다. 또한 시암이라는 국호가 전근대적이라며 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에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으로 국경을 넘어 태국 본토로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자 일본과 굴복적인 동맹을 맺으며 추축국에 합류하였고 헌법 개정을 통해 왕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공화제를 시행하였다. 피분송크람은 이런 와중에도 히틀러나 스탈린 같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추축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던 태국에 미국의 폭격이 이어지자 피분송크람은 반대 세력의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신흥 쿠데타 세력은 망명 중이던 라마 8세를 국왕에 추대하며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며 다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 신 정권은 피분송크람을 비롯한 이들에 대한 처벌은 오히려 국정 혼란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며 형식상의 처분만 이루어졌고, 피분송크람은 다시 군에 복직하여 야전사령관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1946년 국왕인 라마 8세가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총리였던 쁘리디 파놈용은 '라마 8세 붕어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사건을 조사하였지만 '타살 가능성이 있다'라는 추측만 내놓은채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현직 국왕의 의문스러운 사망을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중적인 비난이 쏟아지며 쁘리디 파놈용 내각은 총사퇴를 하며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사회의 공분과 혼란은 가시질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피분송크람은 야전사령관의 자리에서 쿠데타를 모의하며 자신 휘하의 장교 20여 명을 동원하며 구체적이고 치말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렇게 1947년 11월, 그는 임시행정위원회를 자처하며 휘하의 군을 통솔하여 조직적으로 정부 기관을 장악하였고,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임시행정위원회의의 이름으로 혁명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피분송크람은 임시행정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헌법의 효력 정지와 왕정의 폐지를 골자로 한 제1, 2 임시조치령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1948년 임시행정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왕정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정부 수립을 골자로 한 헌법을 통과시키면서 1949년, 직선제를 통해 초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며 다시 한번 타이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타이 공화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 16일 제1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타이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950년 5월 초대 대통령 선거에 따라 초대 대통령으로 쁠랙 피분송크람이 선출되며, 임시행정위원회는 해산되었다.

제1헌법기

제1헌법기는 1948년 헌법 제정 이후 1959년 제2헌법 개정까지의 시기로, 타이 공화국 최초의 정식 공화정 체제이다. 정부수립 초기에는 군주제 청산과 국내질서 회복이 시급한 과제였다. 피분송크람 정부는 임시행정위원회에서 발표한 제1ㆍ2 임시조치령을 국가보안법으로 확대하여 철저한 반공주의와 군주제 청산을 시행하였으나, 이는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이로 1951년 해군 쿠데타 모의 사건이 발생하여 쁠랙 피분송크람 대통령이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부는 왕정 재산을 억류하는 '부정축재처벌특별법'을 제정, 국회 내 부정축재처벌특별위원회를 설치하며 왕정 시기의 재산과 건물 등을 대대적으로 압류하였고, 친왕정파 세력들을 내란혐의로 대거 체포하였다. 그러나 1958년 2월 10일, 피분송크람 대통령의 최측근인 사릿 타나왓 당시 수도사단장이 왕당파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제3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사릿 타나왓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제2헌법기

제2헌법기는 1959년 헌법 개정 이후 1972년 제3헌법 개정까지의 시기로 최초의 양원제가 시행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타나왓 정부의 집권기로 사릿 타나왓 정부는 헌정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 정당 활동 금지와 집회 금지를 광범위하게 시행하였다. 집권 체제를 안정화한 정부는 군을 동원하여 왕당파를 축출하였고, 대대적인 우민화 정책과 언론 통제를 통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타나왓 정부는 남북 축을 잇는 방콕-치앙라이 고속도로와 동서를 잇는 방콕-뜨랏 고속도로를 건설하였고, 수출 중심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카조-른삭 그룹, 타이 하밋 그룹, 사하콘 그룹 등 각종 기업이 성장하며,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정당신고제'를 시행하였고, 여당인 태국 공민당의 일당 체제를 구축하여, 대통령 개인의 장기 집권 체제를 강화한 민주주의의 암흑기이기도 하였다. 정부는 비밀경찰을 도입하여 민주화 세력을 대거 탄압하였으며, 민주당원 체포와 추안 림파이 구금 사건이 발생하였다. 타나왓 정부는 전문관료제를 시행하는 한편,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교육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교육법 일체를 제정하였고, 교육 이념을 담은 교육칙어를 발표하였다. 또한 교육 정책을 광범위하게 시행하기 위해 교육행정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제3헌법기

제3헌법기는 1972년 헌법 개정 이후 1990년 제4헌법 개정까지의 시기로, 장기 독재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양원제가 다시 단원제로 환원되었고, 명시적인 정당 활동을 보장하였으며, 여러 관제 야당이 설립되었다. 사릿 타나왓 정부는 헌법 개정을 통해 5년 중임제를 재도입하였다.

1985년 방콕 민주화 운동

1977년 1월, 사릿 타나왓 대통령의 서거로 1977년 4월에 치뤄진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타놈 끼티카존이 당선되며 출범한 끼티카존 정부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정당 정치와 언론의 자유를 약속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1980년 방콕-사뚠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관련 보도를 한 언론사를 폐간 조치하였고, 1981년에는 언론조치령을 발표하며 언론 탄압에 나섰다. 이로 인해 남부 나리티왓 주에서 시위가 발생하였으나(나리티왓 항쟁), 나리티왓 주를 포함한 남부 6개 주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듬해 치뤄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 미실시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이어서 정부는 7년 중임제와 대통령 국회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추진하였고, 국민적 반발에 부딪히며 1985년 방콕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민주 항쟁이 발생하였다.(1985년 민주 항쟁) 강압적인 진압을 하던 정부는 끝내 1986년 민주화 선언을 통해 헌법 개정 포기와 민주화를 약속하였다.

이후 정당신고제의 시행과 정당ㆍ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며 민주화 인사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타나왓 정부로부터 구금과 추방을 당했던 추안 림파이와 나리티왓 항쟁을 주도하였던 수라윳 호티디엠이 있었다. 이 둘은 1987년 치뤄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각기 다른 정당 후보로 출마하며 경쟁하였고, 끝내는 표가 분열되며 여당 후보인 신야 탐마삭 후보가 당선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신야 탐마삭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출범하였고 '자유와 민주'를 골자로 하며 민주 정치 실현을 약속하였다. 1989년에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며 광역행정구의 자치제를 도입하였고, 기존 정부에서 임명하는 광역행정구 장(長)인 주지사를 주민에 의한 직선제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제4헌법기

제4헌법기는 1990년 헌법 개정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시기로, 민주 공화국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