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위엔 시의 번화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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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생성
전기 구석기(183만 년 전) 당시 센카쿠 열도에서 남남서쪽 128km 해역에서 1개월 간의 규모 4.0~5.5의 강도 높은 군발지진이 총 1,250회 정도 응력을 주었다.
군발지진의 추정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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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깊이 300km에서 규모 7.9의 심발지진 이후 해저화산의 분화 이후 화산섬 등 총 1개의 제도, 2개의 군도가 생겼다. 총 7번 째의 다수의 해저화산 분화로 봉우리는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이후 구석기 시대 중~말기 말레이계 민족인 폴리네시아인과 흑인계통 네그리토가 타이완 섬과 포르모사 섬에 정착하게 된다. 폴리네시아인은 일랴 섬에 먼저 정착하고 일부 폴리네시아인의 타이완 섬으로 거주 이전을 하며 이민(immigrant) 문화를 촉진시켰다. 한일 간의 도래인 관계와 조몬 관계 유발과 연관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조기대만시기 이전에는 문자의 미발달로 인해 문명ㆍ문화 형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명나라 건국 후 대항해시대가 열리자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으로 포르투갈의 1차 항해는 본격적인 아시아 탐험을 시작하게 되고, 유럽인 최초 타이완 섬과 일랴 섬을 발견하게 되는데, 현재의 타이완 섬을 "아름다운"이란 뜻의 "Formosa"와, 일랴 섬을 "섬"이란 뜻의 "liha"로 명칭하게 되기도 하지만 현재는 "liha, Formosa" 모두 일랴 섬을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후 포르투갈의 국가역량의 한계로 일랴 섬을 식민지배로 삼아 중개무역소로 적극 활용하는데는 성공하나, 타이완 섬으로는 원주민들과의 친선으로 양국의 무역 개시로는 성공하게 된다.
1624년에는 네덜란드 제국이 펑후 열도와 타이난에 당도해 질란디아 요새를 쌓고, 펑후에는 포대를 구축해 거점으로 삼고자 했는데 펑후의 포대에 대해서는 명나라가 자국 영토라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밀려났다. 지역 원주민들은 이들에 호의적이지 않아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원주민들보다 우수한 무기를 지닌 네덜란드(동인도 회사)를 이길 수는 없었고, 이내 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 일대를 세력권 안에 넣는다. 이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해 수출하여 이득을 얻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명나라 복건 지역에서 노동력을 수입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첫 한족의 타이완 섬 진출이 되었다.
또한 포르투갈과의 전면전은 피하는 대신 경제적 타격과 간섭, 배척으로 일랴 섬을 고립시켰다. 우선 일랴 섬의 수입 물품의 관세를 극대화하고 우선적으로 무역 간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타이완 섬의 세금을 전폭 낮추는 등의 외국인 투자자를 전폭 유입시키고 현대적 조세피난처의 개념을 활용한 결과, 일랴 섬에 포르투갈군이 철군을 시작하고 철군한지 14시간도 안되서야 기병과 보병의 압도적 화력을 이끌고 "두 번째의 포르모사"라는 뜻의 "Twee, Formosa"로 점령하게 된다.
또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동중국해 항해에서 일랴 섬의 발견되었을 때 포르투갈의 국가 역량 상태를 확인하고 타이완 섬을 점령 후 일랴 섬에 고립 타격을 주어 포르투갈의 철군을 유도한 이유는 아까 말했다시피 명 - 왜 - 조선을 잇는 중요한 중개무역지이기 때문이다. 일랴 섬에서 북쪽으로 항해 시 센카쿠 열도와 제주도로 갈 수 있고 서 방향으로는 상하이, 동 방향으로는 구마모토로 갈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타이완 섬과 일랴 섬에 동인도 회사 지부를 세워 영향력을 확대했다. 동아시아의 중개무역소와 조세피난처 역할을 하던 일랴 섬의 국민소득과 식량은 매우 충족하고 식민지의 영향력은 매우 거셌다. 네덜란드에서도 식민지의 경제적 영향력이 매우 크므로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손실은 커지므로 강압적 공포정치 대신 문화통치를 통해 합리적 경제ㆍ정치ㆍ사회 식민지를 꾸려냈다. 이후 1681년 미토국(美土國)의 반란 이후 네덜란드인을 추방시키고 독자적 국가를 세웠다. 또한 이후 현대 언어학계에서의 논의에서 이 미토국의 어원이 일본어족에서 유래된 것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일본어족의 연관성이 높지 아니냐하는 설이 있다. 이후 미토국은 동인도회사의 전유물과 중계무역의 지리적 이점 등을 이용해 명나라로는 원자재와 비단 및 기술, 조선과 왜로는 식량과 인력을 얻으며 동북아시아의 강소국으로 지위를 향상하게 된다.
그 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는 중립국의 입지를 선포하게 되고 일본과 친선을 적극적으로 표시하게 되고 그 결과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다. "...일랴 섬에 일본인 지구인 日本町(니혼마치)를 설립하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보장하고 니혼마치를 보위하기 위한 일본군 보병의 약 500명을 주둔하고 니혼마치 지점에서 1리(500m)에는 일랴군의 주둔을 금한다. 또한 니혼마치의 한해서는 일본의 주권이 인정되고 일본군의 작전권이 전시, 평시 모두에서 한할 수 있다. 또한 니혼마치에서 일어난 모든 일본인, 일랴인의 범법 행위는 범죄자 송환법칙에 따라 일본이 재판하도록 한다." 『 니혼마치에 대한 일랴와 일본의 관한 조약 中 』
니혼마치 늑약 체결 이후 국호를 댜오위타이 공화국으로 체제 등을 개혁했으나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과 청군의 패배로 인해 국가주권이 없어진 일랴는 대만일치시기를 통해 일본 제국의 영토로 복속당했다.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할양하고 복속 관계인 일랴 섬의 주권을 일본 제국에 영원히 양도한다. 『 시모노세키 조약 제2조 3항 中 』
이후 일본군의 일랴 섬 정복 이후 6ㆍ8 학살이 발생하게 된다. 댜오위타이 공화국의 시민 약 50명과 한족 출신 22명이 비폭력 무저항의 뜻으로 타오위엔 시(수도)에 항쟁 도중 일본군의 처참한 학살로 일본군의 완전 정복을 천명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타오위엔 항은 동중국해에서 전함 생산과 조선소, 항구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로 인해 타오위엔의 항구의 경제적 발달이 있었으나, 동중국해에서 타오위엔 해전에서 태평양 함대와 일본의 교전으로 타오위엔 항의 마비가 있었으나 대한해협으로 이동한 태평양 함대는 발트 함대와 같이 일본 해군에 격파당한다. 한편 타오위엔 항의 화재로 인한 마비로 타오위엔엔 대화재가 발생하였고 사상자 약 115명이라는 참사가 발생하고 이후 포르모사의 총책임자인 대만 총독부는 일랴 섬에 우물 및 수로를 개설해 화재를 막도록 인프라를 신설했다.
대화재 이후로는 러일전쟁에서도 강압적 공포정치 없이 마무리된 댜오위타이에는 본격적 교통 인프라가 신설된다. 타오위엔에는 전차와 철도선이 개통되었다. 이후 서양식 건물 공법 또한 전수되어 근대화적인 모습도 보였다. 센카쿠 열도와 포르모사(일랴 제도)에 흑해 유전에 맞먹는 석유 매장량이 추정되고 일본은 포르모사에 유전을 설치해 석유를 추출하기에 이르렀고 포르모사는 최고 호황기를 맞는다. 포장도로와 타오위엔선에는 열차, 전차, 자동차 등이 널렸고 건물엔 서구식 공법 건물의 건축으로 호황기를 맞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11년 중국동맹회의 황싱과 쑨원이 주축이 된 신해혁명으로 중국이 민주화되자 포르모사에도 이와 같은 열기를 일본은 철저히 그간 없었던 공포정치와 탄압으로 규제했다. 일반 민간인을 물고문과 잔혹하게 살인하는 일이 대반사였다. 또 1929년 대공황으로 자살률과 실업률은 나날히 늘었으며 관광업과 석유로 버티던 포르모사에게는 관광도 끊겨 버렸으니 1929년에 끝을 달했던 대공황은 전년대비 GDP의 손실은 무려 20%에 달했었다. 타오위엔 시에서 중국의 후장식 소총 약 10정과 일본의 무기고를 기습해 총격전이 있었으나 진압되었던 항쟁이 29년에서 30년까지 4차례나 있었을 정도로 독립운동이 왕성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변색되어 급진주의적 우파와 전체주의로 무장한 백의사라는 포르모사의 백색 테러 단체는 타오위엔에서 무려 50명을 폭행, 강간,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대공황으로 일어난 행위는 끔찍했다.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대공황도 2차 대전에서도 타오위엔 항의 조선업 활발과 석유, 관광업 흥행으로 경제가 빠르게 복구되었고 태평양전쟁에 대항하기 위해 해군 고속생산, 석유산업 연구 등으로 골치를 앓던 미국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타오위엔 항을 기점으로 백린탄 폭격을 시작했다. 그 결과 타오위엔이 경제적 마비와 사망자가 약 15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자 일본에 전시 경제에서 석유, 해군 생산에 차질을 겪으며 미드웨이 해전 이후 패배하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Treaty of San Francisco)으로 독립하게 된다.
1950~60년대의 포르모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생산과 석유 공급 등 전쟁특수와 트루먼 독트린으로 신흥공업국 ~ 강소국 위치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1985년에는 타오위엔에 첫 지하철이 개통되었고 소득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해소되었고 일제 시대 발전된 석유, 관광, 조선업으로 2차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이후 1985년 2차 개헌을 실시한다. "...포르모사는 의원내각제와 내각책임제를 사용하고 참의원(상원), 중의원(하원)으로 양원제 도입한다." 『 1985년, 포르모사 2차 개헌 中 발췌 』
1997년, IMF 사태로 그간 고질적 문제였던 산업의 발전이 일제 시대에 크게 발달했던 조선업, 관광업, 석유 등으로 고질적인 경제 문제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포르모사 달러(F$)는 1$ 당 7.42¥으로 폭등하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져오던 IMF 사태는 그간 포르모사의 고질적인 산업의 미발달을 금융업, 서비스업, 반도체 등으로 크게 혁신을 일으키고 지금 오늘날에서도 이와 같은 산업으로 동중국해에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