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 운동

Taiwan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1월 3일 (목) 03:29 판 (새 문서: ||<-3><bgcolor=#eeeeee,#111111>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슈피겔지의 사진.[* 위 사진에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 상주는 조천호(...)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슈피겔지의 사진. 위 사진에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 상주는 조천호(당시 5세), 그리고 영정 속 남자는 아버지 조사천(향년 34세)이다. 건축 일을 하던 조사천은 계엄군의 폭행에 분노해 시위에 동참했다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집단 사살 도중 총상으로 숨졌다. 당시 그의 검시 조서에는 사인이 '카빈 총상'이라 적혀있어 5.18 왜곡 세력은 "조사천은 시민군에게 사살당했는데 5.18 단체가 계엄군 소행으로 뒤집어씌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조 씨의 죽음을 현장에서 목격한 직장 동료들은 조 씨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았다"라고 증언했으며, 피격당한 시각과 위치는 21일 오후 2시경 도청 앞이었다 (5.18기념재단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권, 한얼미디어 2006., 312쪽). 이때는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무차별 조준 사격하고 있었던 시점이며, 시민군이 금남로에 무장하고 나타나기 전이었다(시민군 등장 시각은 오후 3시). 뿐만 아니라 당시 계엄군 중 특전사 공수부대 말고 일반 보병사단 군인들은 M16이 아닌 카빈을 사용했다]. 설령 조 씨가 카빈에 사망했다 한들 이는 조 씨가 보병 계엄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했을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21일 도청 앞 집단 사살 당시 현장에는 31사단 군인들도 있었다(김영택 《5월 18일, 광주》, 역사공간 2010., 374쪽). 따라서 M16이든 카빈이든 관련 없이 여러 정황을 볼 때, 조사천 씨는 '계엄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 이 사진은 미국의 모 외신 기자가 몰래 찍어 독일의 슈피겔지에 실린 후 5.18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조천호는 훗날 "어렴풋하지만 당시엔 슬프기보다 배고팠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힘이 없었습니다. 지쳐서 영정 사진에 기대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술회했다. 이후 조천호는 이런 엄청난 비극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친척의 도움으로 조선대학교 이공대학 건축설비과를 졸업전역한 뒤 5·18 묘역 관리소에서 5년 정도 근무하다 혼인 후 7급 공무원 특채(국가유공자)로 들어가 광주시청에서 지금까지 10년 이상 일하고 있다. 7급 주사보부터 시작해 4급 서기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 정태춘, '5.18'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잘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