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의문

서론

기독교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문점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기독교를 비판할 때 이런 의문점들을 가지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의문점들을 다뤄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이런 의문점들이 성경의 부정확성과 신뢰성을 부각하거나 떨어뜨릴 지, 아니면 단순한 오해일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1장 “하나님의 존재”

오늘날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립에서 제일 치열하게 논의되는 부분, 사실상 그 대립에서 핵심 논쟁 주제이기도 합니다.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다양한 철학자들, 과학자 그리고 신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연구합니다. 신을 증명하는 방법으로는 과학적인 증명 또는 철학적/논리적 논증에 의한 증명이 있습니다. 일단 저는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신을 증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만약 이런 토의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과학으로 증명해야 한다면 좋은 증명수단이 되겠지만 문제는 저희는 신의 존재 여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전제로 신이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습니다. 순수히 과학적인 수단으로 증명을 시작하려 한다고 해도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과학자들에게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은 “이 세상의 시작”입니다.

과학자들은 빅뱅에서 이 세상-이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말 합니다. 거기까지는 저도 동의 합니다. 그러나 빅뱅 이전이 문제가 됩니다. 과학자들은 빅뱅 이전이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렇다면 말 입니다. 과학자들은 그 “무의 공간”에서 어떻게 하나의 점이 발생했고, 어떻게 무의 공간에서 대폭발(Big bang)이 일어났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무의 공간은 말 그대로 어떤 것도 없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런 공간에서는 미생물도, 그 어떠한 물질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이런 무의 공간에서 무언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창조자‘가 필요합니다. 창조자가 빅뱅을 일으켰다고 하면 어느정도의 인과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단, 창조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만큼 ’전지전능‘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무의 공간에서는 어떠한 개념도 존재햐지 않습니다. 왜냐, 말 그대로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이런 공간에서 개념이란 것을 만든다는 것은 전지전능해야만 합니다.
비유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한 무인도에 떨어졌습니다. 그 섬은 모래와 흙만 있을 뿐 나무도 돌도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무배를 만들 수도, 나무집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곤 흙과 모래만 있을 뿐 입니다. 이런 무인도에서 배나 집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전지전능하다면 가능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 나무를 생겨나게 할 수도 있고 배나 집을 만들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의 상태에서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된다면 반드시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창조자를 존재하게 한 제1의 원인-창조자의 창조자-이 있을 터인데 그렇게 된다면 수 많은 전능자가 존재하게 되며 결국 논리적 모순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대단히 반론을 펼치기에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고 예리한 질문입니다. 독자분들 중에서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다면 존경을 표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선 확실한 답을 드릴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신의 탄생 그 이전에 살아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신이 존재하기 이전도 실제로 존재할 지는 의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신, 즉 하나님은 나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만큼 정확하게 표현하는 텍스트는 없다고 봅니다. ‘스스로 존재함’은 무슨 뜻일까요? 나 자신을 스스로 창조해냈다는 말 일까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무의 공간에서 하나님은 ’원래 존재했던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의 공간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개념임을 알 수 있죠. 우리가 아직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스스로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 해답을 주신 것과 다름 없습니다. 다른 신화를 보면 우연히 탄생하거나 그에 대한 원인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하는 신’에 대한 개념을 그것도 신이 직접 말한 종교는 거의 기독교가 유일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무신론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그 질문을 듣고는 의아했습니다만 자기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가 아니냐는 의미였더군요. 나름대로 좋은 해석일 것 같지만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my self, 즉 “나 스스로가 존재하게 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우연히 존재하는 자 였다면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텍스트 보다는 “우연히 생겨나 전지전능해진 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듯 합니다.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제가 추측한 바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창조되지 않았으며 스스로가 존재하는 것, 즉 당연한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시작 전에 계신 분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부분은 인간이 추측만 할 뿐, 정확한 해답을 도출해낼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 공간‘이라는 개념도 추측만 할 뿐,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해답을 아는 존재는 하나님 뿐 입니다.
이 말고 또 다른 해석법이 있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바로 논리적인 증명입니다. 이 증명은 C.S. 루이스가 증명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정확한 설명을 위해서라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읽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단 간략하게 소개 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선 어떠한 기준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C.S. 루이스는 ‘도덕률’이라고 표현합니다. 원문에 가까운 설명을 위해 저도 도덕률이라는 말을 사용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다고 봅시다. 어떤 한 사람이 새치기를 한다면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사람의 행동에 불만을 토로할 것입니다. 그리곤 그 사람은 변명을 할 것입니다. “제가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새치기를 했다. 양보 해 달라.”라는 식으로 말 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자기도 옳지 않은 것은 알고 있으나,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변명을-물론 누구는 억지를 부리겠지만 말입니다.-합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에게는 어떠한 규칙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이런 규칙이 없다면 “그 따위 기준은 집어치우시지.”라는 식으로 말 하겠죠. “내 기준은 이러니 네 기준을 내게 적용시킬 의무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겠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정한 기준에 호소하는 식으로 변명을 합니다. 이렇듯이, 인간에게는 어떠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편적 도덕률“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보편적 도덕률은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었습니다. 옛날에도 ”이기적이면 안 된다.”라는 규칙이 적용되었듯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도덕률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요? 지역에 따라, 사는 환경에 따라 바뀔 법도 한데 말 입니다.
예를 들면,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옷을 다 벗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질 법도 한데 말 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야만인들이라고 해도 최소 인간의 생식기는 다 가리고 다녔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 세계의, 전 대륙의 인간들이 환경과 지역에 관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인간의 생식기를 가리고 다녔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먹을 것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서로의 것을 빼앗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져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후대에게 전해져 내려와 관습으로 자리 잡게 되겠죠. 설사 먹을 것이 풍족해진 시대에 이르렀다고 해도 빼앗는 행위는 당연시 될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래왔으니까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떠한 부족 사회에서도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처벌해야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로 말 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최소 도덕률이 사회와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님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준은 어디에서 등장한 것일까요? 이런 기준은 인간도 모르게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창조자에 의한 형성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보편적인 도덕률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 이렇게 행동하듯이, 이렇게 느끼듯이 설정한 것입니다. 우연히 이렇게 설정될 수는 없으니 말 입니다. 이로써 보편적인 도덕률을 존재하게 만든 누군가가 있어야만 ‘보편적인 도덕률을 설명할 수 있는 증거’가 생겨나게 되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