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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oraki Mount Cook.JPG|섬네일|200px|[[뉴질랜드 왕국]]에 최초로 도착한 [[제임스 쿡]]을 따서 지은 [[쿡 산]]]]
뉴질랜드에 사람이 정착한 때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정말 최근으로, 10~11세기 경이다. 가장 처음에 들어온 민족은 마오리족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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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왕국]]의 역사'''는 700년 전 [[폴리네시아|폴리네시아인]]들에 의해 발견된 후 시작되었다. 그들이 정착한 후 토지와 혈족 관계를 중심으로 한 [[마오리족]] 문화가 자리잡았다. 첫 유럽 탐험가가 1642년 [[뉴질랜드 왕국]]에 도착했고, 18세기 이후부터 탐험가, 항해사, 상인, 모험가들이 꾸준히 방문하였다. 1840년, [[영국]]과 마오리 추장들 사이에 [[와이탕이 조약]]이 서명되면서,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마오리 사람들은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20세기 부터는 [[유럽]]과 [[아시아]] 이민자들이 급증하였다. 그러면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주장이 나오면서 영국의 식민지에서 완전 독립하게 되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뉴질랜드 남섬 특유의 만년설을 멀리서 보고 "저기는 섬이 아니라 긴 흰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아내의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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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섬에는 모아, 하스트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씨가 말랐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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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리네시아인의 정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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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처음 정착한 [[폴리네시아|폴리네시아인]]들은 폴리네시아의 동쪽으로부터 온 것으로, 이것은 [[DNA]] 검사 결과 약간의 [[멜라네시아]]인의 특징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첫 정착민은 1000년과 1300년대경 사이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착민들의 후손들은 이후 [[마오리족]]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뚜렷한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왕국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 왕국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놓아서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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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의 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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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ok new zealand.jpg|섬네일|right|[[제임스 쿡]]이 그린 최초의 뉴질랜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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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왕국]]을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은 1642년 남섬 서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아벌 태즈먼]](Abel Janszoon Tasman)이었다. 그는 이곳을 네덜란드에 위치한 [[제일란트주]]의 이름을 따서 '노바젤란디아'라고 명명하였으며, 뉴질랜드는 이 말의 영어식 번역이다. 타스만 이후 뉴질랜드를 찾은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었다. 쿡 선장은 1769년에서 177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어 1814년 런던에서 선교사가 와서 기독교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속한 식민지로서, [[고래]]와 [[바다표범]]잡이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었고, 카우리 나무를 벌채하기 위해서, 또한 [[물개]]의 모피를 찾기 위해서 상인들이 도래하게 되었다.
  
== 뉴질랜드 왕국 대영제국 자치령 시절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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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탕이 조약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아벌 타스만이 1642년 12월 13일 유럽에 뉴질랜드의 존재를 알렸다. 동인도회사로부터 호주 인근과 남태평양에서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한 섬을 찾아 보라는 지시를 받았던 아벌 타스만은 호주 남부의 태즈매니아 섬을 찾은 뒤 17일 뒤에 뉴질랜드를 발견한다. 물론 당시에도 섬에 마오리족이 이미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섬에 니우 제일란트(Nieuw Zeeland·새로운 제일란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섬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해, 마오리족의 호전성을 과장해서 알린다. 실제로도 타스만 일행은 마오리족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선원 4명이 살해당했다. 때문에 이때까지는 섬의 존재만 알려졌을 뿐, 유럽인들의 방문은 없다시피했다.
 
  
1769년에 영국의 제임스 쿡이 뉴질랜드 해안을 자세히 탐사한다. 제임스 쿡은 섬의 이름을 영국식인 ‘뉴질랜드’로 고쳐 부른다. 제임스 쿡 선장의 탐사 이후 1800년대 부터, 뉴질랜드에는 선교사와 고래 사냥꾼, 포경선의 발길이 줄을 이으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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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와이탕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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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자, 식민에 의한 토지 매매와 관련하여 [[마오리족]]과 영국 간에 분쟁이 생겼고, 1840년 식민지 총독 [[윌리엄 홉슨]]과 [[마오리족]]은 [[마오리족]]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뉴질랜드 왕국]]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뉴질랜드에 도래한 백인들은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물건을 약탈하고 죽였다. [[뉴질랜드 왕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이었다. 그 이후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서 이민자가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이곳에 이주를 재촉한 사람이 에드워드 와케필드이다.
  
본래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부속 영토였지만, 1840년 2월 6일에 와이탕이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영국과 원주민 마오리족 사이에 체결되어 뉴질랜드는 1841년부터 공식적으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와 분리된 대영제국의 왕령식민지가 된다. 마오리족은 영국의 신민이 되었고, 대신 마오리족은 현재까지의 토지 소유를 보장받을 수 있고 영국 정부를 통해 판매할 수 있었다. 본래 마오리족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프랑스가 뉴질랜드에 집적대는 것을 위협으로 느껴 차라리 영국 정부가 낫다는 생각을 했고, 또 유럽인들이 마구 유입되면서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잦은 등 무법천지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영국의 신민이 되어 영국의 보호를 받겠다는 의도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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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에 그는 영국에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식민운동을 시작했다. 다음 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고는 뉴질랜드의 토지를 마음대로 팔았다. 토지를 매입한 사람들이 제1차 조직 이주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원주민과 유럽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그러면서 점차 마오리들의 입장에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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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상 장악력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해전에서 무찔러 해상에서 막강한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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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뉴질랜드는 당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통합된 지도자가 없어 유럽 이주민들과의 교류도 각 부족별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협력과 커뮤니케이션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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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두 민족이 부딪히다 보니 충돌이 잦아졌고 유럽 이주민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이들을 다스릴 법률이나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마오리 소유의 땅이 비조직적으로 무차별 팔려 나갔으며, 일부 마오리 추장들은 뉴질랜드가 프랑스에 의해 정복되지 않을까 심한 우려를 표명하여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던 차였다. 실지로 [[1831년]] 13명의 북쪽 추장들은 영국의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공식 청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어와 마오리어 조약 원문에 차이가 있어 곧 다시 영국과 마오리족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1840년 유럽인의 침투에 맞서 마오리족은 마오리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오리족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유럽인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기에 마오리족은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여 아메리카 대륙처럼 원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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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마오리나 파케하 모두 법과 질서, 그리고 어떤 형태든 영국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중에 [[1840년]] 영국해군 장교 홉슨이 총독으로 뉴질랜드를 찾아온다. 그는 당시 영국인의 대리인으로서 [[와이탕이 (노스랜드)|와이탕이]]에 장기간 살고 있던 버스비의 집으로 가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협의를 한다. 그리고 2월 6일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에 있는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하는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그 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 사인을 받아냈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하곤 모두 사인을 했다.
  
== 뉴질랜드 왕국 독립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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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탕이 조약은 3개조로 되어 있는 간단한 것이다.
1901년에 이웃 호주에서 호주의 영국 식민지들을 모두 끌어모은 호주 연방이 출범한다. 본래 뉴질랜드 역시 뉴사우스웨일스의 일부였으므로 호주 헌법에서는 뉴질랜드 역시 호주 연방에 가입할 수 있다고 규정했고 실제로 가입을 권유했지만, 뉴질랜드는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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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의 주권을 영국에 이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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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리인의 토지소유를 계속 인정한다. 그러나 이후 토지 매각은 영국 정부에게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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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리 사람들은 앞으로 영국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다.
  
이후 독립 과정은 온건하게 진행되었다. 1차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뉴질랜드는 다른 자치령과 함께 자신들의 권한과 완전 독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영연방 가입국이지만 별도의 군주를 세울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 받아들였고, 1931년 초대 왕으로는 영국의 왕이 직접 임명한 더베리몬드 1세 총독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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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이 체결되고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를 2민족국가로 규정짓는 성격의 것이었다. <ref name="와이탕기 조약과 마오리 전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오세아니아/뉴질랜드#와이탕기 조약과 마오리 전쟁|와이탕기 조약과 마오리 전쟁]]〉</ref>그리고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더베리몬드 1세 왕은 1931년 3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1899년 06월 19일에 태어나서 1960년 11월 30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더베리몬드 2세는 왕위를 계승했을 당시 1960년에 3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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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슨은 [[1842년]] 9월에 사망했고, 새로운 총독으로 [[로버트 피츠로이]]가 와서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더베리몬드 2세는 2002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막내 아들 더베리몬드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남섬으로 향하던 배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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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리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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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1870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마오리 전쟁]]이 일어났다. 웨이크필드가 이끄는 뉴질랜드 토지회사의 지나친 토지 매수가 발단이 되어 일부 추장들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토지 전쟁을 벌였고, 뉴질랜드 중부지역에선 토지 판매를 중단시키려는 King Movement가 일어났다.
  
더베리몬드 3세는 당시 29세였다. 첫째아들과 둘째아들 그리고 셋째 딸은 전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막내아들인 더베리몬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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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에 타라나키에서 초대 마오리 왕 포타토우 1세에게 집결한 마오리군과 영국군 사이에 마오리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북섬의 [[타라나키]], [[와이카토]] 지방을 중심으로 12년에 걸쳐 계속된다. 당시 영국군은 14,000명으로 영국 본토에 남아 있는 방위병력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전쟁은 부분적으로 파케하에 의한 공식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계속되었고 [[1872년]]까지 마오리 소유로 남은 토지는 전국토의 1/6에 불과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마오리족의 패배로 끝이 났는데, 자존심이 강한 마오리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고 한다. 마오리 사람들이 다시 일어선 것은 1880년대의 마오리 부흥운동 이후이다. <ref name="와이탕기 조약과 마오리 전쟁"/>
  
현재 더베리몬드는 45세의 나이로 열심히 일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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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은 마오리족의 반영(反英) 감정 완화를 위해 힘썼고,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노력을 통해, [[1870년]]부터는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영국화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마오리족과의 공존관계 설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노력은 다른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해법이어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52년]]에는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882년]] 냉동선이 개발되자 오지도 낙농을 중심으로 개발이 크게 진척되었다. 1890년대부터 뉴질랜드 [[입법부|국회]]는 여성의 [[참정권|투표권]], 양로 연금 같이 [[진보주의|진보]]적인 법률들을 발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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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왕국]]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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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에 많은 [[마오리족]]들은 뉴질랜드가 완전한 자주적인 국가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영국에 영연방에 계속 참여하지만 별도의 국왕을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초대 왕으로 [[더베리몬드 1세]]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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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운 왕과 함께 뉴질랜드는 [[1930년대]]부터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복지 국가]]로서 발전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참전·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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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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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 문화는 르네상스를 거치며 1950년 많은 마오리들이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마오리 데모 운동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또한 1964~72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2019년 4월 28일 (일) 21:42 판

뉴질랜드 왕국에 최초로 도착한 제임스 쿡을 따서 지은 쿡 산

뉴질랜드 왕국의 역사는 700년 전 폴리네시아인들에 의해 발견된 후 시작되었다. 그들이 정착한 후 토지와 혈족 관계를 중심으로 한 마오리족 문화가 자리잡았다. 첫 유럽 탐험가가 1642년 뉴질랜드 왕국에 도착했고, 18세기 이후부터 탐험가, 항해사, 상인, 모험가들이 꾸준히 방문하였다. 1840년, 영국과 마오리 추장들 사이에 와이탕이 조약이 서명되면서,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마오리 사람들은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20세기 부터는 유럽아시아 이민자들이 급증하였다. 그러면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주장이 나오면서 영국의 식민지에서 완전 독립하게 되었다.

개요

폴리네시아인의 정착

뉴질랜드에 처음 정착한 폴리네시아인들은 폴리네시아의 동쪽으로부터 온 것으로, 이것은 DNA 검사 결과 약간의 멜라네시아인의 특징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첫 정착민은 1000년과 1300년대경 사이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착민들의 후손들은 이후 마오리족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뚜렷한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유럽인의 도래

제임스 쿡이 그린 최초의 뉴질랜드 지도

뉴질랜드 왕국을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은 1642년 남섬 서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아벌 태즈먼(Abel Janszoon Tasman)이었다. 그는 이곳을 네덜란드에 위치한 제일란트주의 이름을 따서 '노바젤란디아'라고 명명하였으며, 뉴질랜드는 이 말의 영어식 번역이다. 타스만 이후 뉴질랜드를 찾은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었다. 쿡 선장은 1769년에서 177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어 1814년 런던에서 선교사가 와서 기독교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오스트레일리아뉴사우스웨일스주에 속한 식민지로서, 고래바다표범잡이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었고, 카우리 나무를 벌채하기 위해서, 또한 물개의 모피를 찾기 위해서 상인들이 도래하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

본격적으로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자, 식민에 의한 토지 매매와 관련하여 마오리족과 영국 간에 분쟁이 생겼고, 1840년 식민지 총독 윌리엄 홉슨마오리족마오리족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뉴질랜드 왕국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뉴질랜드에 도래한 백인들은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물건을 약탈하고 죽였다. 뉴질랜드 왕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이었다. 그 이후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서 이민자가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이곳에 이주를 재촉한 사람이 에드워드 와케필드이다.

1837년에 그는 영국에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식민운동을 시작했다. 다음 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고는 뉴질랜드의 토지를 마음대로 팔았다. 이 토지를 매입한 사람들이 제1차 조직 이주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원주민과 유럽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그러면서 점차 마오리들의 입장에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했다.
첫째로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상 장악력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해전에서 무찔러 해상에서 막강한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로 뉴질랜드는 당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통합된 지도자가 없어 유럽 이주민들과의 교류도 각 부족별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협력과 커뮤니케이션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셋째로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두 민족이 부딪히다 보니 충돌이 잦아졌고 유럽 이주민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이들을 다스릴 법률이나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마오리 소유의 땅이 비조직적으로 무차별 팔려 나갔으며, 일부 마오리 추장들은 뉴질랜드가 프랑스에 의해 정복되지 않을까 심한 우려를 표명하여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던 차였다. 실지로 1831년 13명의 북쪽 추장들은 영국의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공식 청원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오리나 파케하 모두 법과 질서, 그리고 어떤 형태든 영국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중에 1840년 영국해군 장교 홉슨이 총독으로 뉴질랜드를 찾아온다. 그는 당시 영국인의 대리인으로서 와이탕이에 장기간 살고 있던 버스비의 집으로 가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협의를 한다. 그리고 2월 6일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에 있는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하는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그 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 사인을 받아냈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하곤 모두 사인을 했다.

와이탕이 조약은 3개조로 되어 있는 간단한 것이다.

  • 뉴질랜드의 주권을 영국에 이양한다.
  • 마오리인의 토지소유를 계속 인정한다. 그러나 이후 토지 매각은 영국 정부에게만 한다.
  • 마오리 사람들은 앞으로 영국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다.

이 조약이 체결되고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를 2민족국가로 규정짓는 성격의 것이었다. [1]그리고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홉슨은 1842년 9월에 사망했고, 새로운 총독으로 로버트 피츠로이가 와서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마오리 전쟁

1843~1870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마오리 전쟁이 일어났다. 웨이크필드가 이끄는 뉴질랜드 토지회사의 지나친 토지 매수가 발단이 되어 일부 추장들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토지 전쟁을 벌였고, 뉴질랜드 중부지역에선 토지 판매를 중단시키려는 King Movement가 일어났다.

1860년에 타라나키에서 초대 마오리 왕 포타토우 1세에게 집결한 마오리군과 영국군 사이에 마오리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북섬의 타라나키, 와이카토 지방을 중심으로 12년에 걸쳐 계속된다. 당시 영국군은 14,000명으로 영국 본토에 남아 있는 방위병력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전쟁은 부분적으로 파케하에 의한 공식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계속되었고 1872년까지 마오리 소유로 남은 토지는 전국토의 1/6에 불과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마오리족의 패배로 끝이 났는데, 자존심이 강한 마오리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고 한다. 마오리 사람들이 다시 일어선 것은 1880년대의 마오리 부흥운동 이후이다. [1]

한편, 영국은 마오리족의 반영(反英) 감정 완화를 위해 힘썼고,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노력을 통해, 1870년부터는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영국화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마오리족과의 공존관계 설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노력은 다른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해법이어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52년에는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882년 냉동선이 개발되자 오지도 낙농을 중심으로 개발이 크게 진척되었다. 1890년대부터 뉴질랜드 국회는 여성의 투표권, 양로 연금 같이 진보적인 법률들을 발의하였다.

뉴질랜드 왕국의 시작

한편 이 시기에 많은 마오리족들은 뉴질랜드가 완전한 자주적인 국가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영국에 영연방에 계속 참여하지만 별도의 국왕을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초대 왕으로 더베리몬드 1세가 즉위하였다.

그렇게 새로운 왕과 함께 뉴질랜드는 1930년대부터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복지 국가로서 발전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참전·활약하였다.

현대

마오리 문화는 르네상스를 거치며 1950년 많은 마오리들이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마오리 데모 운동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또한 1964~72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