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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朝 鮮 國대 조 선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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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서울특별시 공용어 : 朝鮮語 인구 : 약 76,590,000명 면적 : 약 223,948 km² 공용 문자 : 朝鮮字, 朝鮮語 국왕 : 이 연 |
地 理지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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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선국 행정구역 大韓國 行政區域 | |||||||||
[[파일:|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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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 治정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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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수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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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왕 | 총리 | ||||||||||
| 제 30대이 연 | 제 1대김민규 | ||||||||||
| 서민원 庶民院 | |||||||||||
| 서민원 의석 수총 7석중 |
ㅤ국민당 - 3석 / 43% 차지중 ㅤ보수당 - 2석 / 28.5% 차지중 ㅤ공석 - 2석 / 28.5% 차지중 | ||||||||||
經 濟경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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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대조선국(大朝鮮國, Kingdom of Josen), 약칭 조선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강대국이다. 한반도와 쿠릴열도, 대마도, 기타 인근 섬, 그리고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하며, 북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과 국경을 맞닿는다. 인구는 약 76,590,000명이며, 영토의 면적은 약 223,948㎢ 이다. 세력권은 UN의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활동중이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다.
» 역사
[ 제1장. 문조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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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4년 12월 13일, 순조가 붕어하고 당시 세자였던 문조(이영)가 즉위한다. 문조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즉위 후 비변사를 해체하고 의정부 기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문조는 당시 문조의 측근이자 우의정이었던 정원용과 부원군이자 어영대장이었던 조만영을 이용해 비변사를 해체하자는 상소를 올리게하였다. 안동 김씨의 수장이었던 김조순을 필두로 한 안동 김씨 일원들은 이에 극구 반대하며 문조를 말리기 바빴다. 이때 문조의 최측근인 박규수가 비변사를 비판하는 시, 비사빈정가(備司貧政歌)를 문조와 대신들 앞에서 읊으며 비변사 해체에 명분을 부여한다. 결국 1835년 03월 12일, 비변사가 해체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부활하게 된다. 문조는 기능이 부활한 의정부에 기존 영의정인 심상규를 파직시키고 정원용을 영의정에 명했다. 또한 조만영을 우의정 겸 병조판서에 명하고 박규수를 공조판서에 명했다. 이때 안동김씨 일가가 공조판서 임명을 가지고 한번 더 걸고 넘어진다. 대과도 급제하지 못한 자를 정2품에 명하는게 말이 되냐는 논리였다. 이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대과 급제도 하지 못했으며 큰 공을 세운적도 없는 자를 어떻게 정2품에 명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문조는 이를 무시로 일관한다. 후에 문조는 '무시로 정치를 한 자'로 기록된다. 1836년 01월 17일, 어느 추운 겨울에 문조는 정원용과 박규수를 사경(四更)에 부른다. 문조는 군제개혁을 하기 위해 두 대신을 부른다. 기존 군제인 오군영(五軍營)과 속오군(束伍軍) 체계에서 중앙군을 대조선국 지군(地軍)과 수군(水軍)으로 2군영 체계를 운영하고 훈련 받은 정남(正男)들을 각 8도의 병마절도사가 이끄는 도속군(道束軍)에 속하게 해 전시에 동원되게 하였다. 또한 현대의 예비군 훈련처럼 정기적인 훈련을 실시하도록 한다. 1836년 4월 21일, 문조는 군제개혁안을 대신들 앞에서 직접 반포한다. 문조의 이러한 개혁은 안동 김씨 뿐만 아니라 풍양 조씨들의 눈에 나게된다. 병조판서 조만영은 개혁안을 받아드릴수 없다며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린다. 조만영은 병조판서의 권력을 이용해 매관매직을 해오고 있었기에 개혁안에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문조 또한 이를 알고 개혁 논의에서 조만영을 배제시켰다. 문조는 부원군인 조만영을 목을 밸수는 없었지만 매관매직의 대가로 병조판서에서 조만영을 파직시킨다. 이 사건으로 문조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 설령 그게 부원군이라도 숙청하는 냉철한 군주로 기록된다. 문조의 두 차례 개혁 후 부정부패가 크게 나라가 크게 안정되었다. 문조 6년인, 1839년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문조는 서양에 관심이 많았고 이 일을 보고 청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드리고 이를 통해 서양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다. 문조 9년, 1942년 1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문조는 박규수에게 서양의 문물을 배워오라 명한다. 이에 박규수는 청을 통해, 인도, 중동, 유럽, 아메리카 등을 거치는 5년 간의 여정을 떠난다. 1947년 6월 11일, 박규수가 동래를 통해 조선에 돌아온다. 박규수는 세계를 돌며 자신의 할아버지 박지원이 쓴『열하일기』처럼 자신이 본것들을 기록한『世界一周日記』를 문조에게 바친다. 문조는 이를 읽고 미리견(미국), 영길리(영국)에 사신단을 파견한다. 당시까지 조선은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문조는 서양에 조선을 알리고 관계를 형성하며 문물을 배워오고자 했다. 미국 사신단 단장인 신만식은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인 제임스 K. 포크와 만나 조선을 알렸다. 제임스 K. 포크는 조선에 관심을 가지며 국교를 체결하고자 했다. 신만식은 문조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1848년 2월 19일, 미합중국과「조미통상조약」체결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첫 국교 체결이며 왕샤조약과 달리 평등조약이었다. 영국은 애초 조선을 언젠가 침략해야할 대상으로 기록하였으나 조선에서 온 사신단과 미국과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조미통상조약」에 이어 1848년 5월 24일, 평등조약인「조영통상조약」을 체결한다. 두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서양으로부터 깨어있는 나라로 평가되며 여러 국가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문조는 동래를 개항하고 이를 통해 여러문물을 받으며 조선의 근대화를 시작한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5년 러일화친조약 등과 달리 조선은 일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드릴것 거름 삼아 서양 열강과 비등한 국력을 갖추었다. 1856년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문조는 한번 더 군제개혁을 하기로 마음먹게된다. 중앙군을 육군과 해군으로 개편하고 도속군을 예비군으로 개편해 전시에 육군과 해군으로 편입되도록 하였다. 또한 서양의 군체계를 모방해 지금의 군 계급과 부대체계 등을 자리잡게 했다. 너무 빠르게 달려왔던 탓일까, 문조가 병으로 앓아눕게되고 왕세자였던 헌종이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헌종은 문조와 마친가지로 학문에 관심이 많고 서양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서양의 정치체계를 공부하며 조선의 정치개혁을 고심하기 시작한다. 헌종은 입법기관인 중추원을 도입하고 조선 최초의 선거제를 도입하고자 박규수와 회동한다. 박규수는 다음과 같은 정치개혁안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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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헌종시대 ] | |||
| 헌종은 박규수를 영의정에 명하고 이원명을 이조판서에 명하며 즉위하자마자 왕권을 강화한다. 1864년 청나라의 국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세약해져간다. 태평천국이 베이징을 들이닥치기 일보 직전이자 청은 조선에 지원군 요구한다. 헌종은 조선을 청의 제후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거듭나게하고자 했다. 헌종은 1864년 4월 17일, 대조선국을 독립국으로 선언하며 미, 영, 프, 러 4개국 공사관을 통해 독립국으로써의 인정을 받는다. 청은 태평천국의 난을 제압하고 대조선국의 독립화를 황제국에 대한 반역행위를 규정하며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에 대조선국은 최후통첩을 거절하고 대조선국 육군을 국경 전역에 배치시킨다. 1864년 9월 2일, 서태후는 결국 무리하게 기습침략을 강행한다. 당시 청의 신식 부대는 구식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들이었다. 반면 조선은 미제산 총기로 무장한 부대들로 청과의 전력차가 심각했다. 청은 기습적으로 선제 공격을 했음에도 압도적인 전력차로 인해 밀려나게 된다. 헌종은 태종의 말을 인용해 "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 "라며 진격을 감행한다. 청은 계속해서 후퇴하게 되며 결국 요동에서 포위되고 만다. 청 지휘관인 이홍장은 서태후의 계속된 전쟁의지에도 불구하고 헌종에게 사신을 보내며 항복의지를 밝힌다. 이에 헌종은 이홍장의 뜻을 받아드리고 1865년 3월 29일, 조청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고 배상금을 받아낸다. 1865년 이맘때쯤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다. 헌종은 아이가 없어 깊은 고심을 했다. 어느날 한성에 잠행을 나갔는데 파평윤씨 일가의 기집애가 서양의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조선을 꿈꾼다는 소문을 듣는다. 헌종을 이를 듣고 같이 잠행 나온 이원명에게 그 여인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그 여인은 윤청하, 서양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는 등 서양에 관심이 많았고 평소 그는 조선의 근대화를 넘어 제도적 현대화를 주장하는 말들을 해왔다. 헌종은 그녀를 직접 찾아 자신에게 힘이 되어달라며 중전이 되어달라고 한다. 윤청하는 헌종의 간절함에 알겠다며 중전이 된다. 이 여인이 문효왕후(文效王后)이다. 그리고 1867년 6월 6일 마침내 헌종의 아들, 의조(李完)가 태어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일본도 근대국가로써의 길을 걷게된다. 일본에서는 이때 정한론이 제기된다. 1870년 문효왕후는 헌종에게 신분개혁을 제안한다. 노예계층인 천민을 없애고 양반과 서민계층으로 구분하자는 내용이었던 또한 양반과 서민으로 분류만 하고 양반과 서민의 의무와 권리를 동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헌종은 곧 은퇴할 박규수와 이를 논했다. 박규수는 권문세족의 몰락으로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신분으로 언제 다시 권문세족 같은 무리가 나타날지 모른다. 신분개혁을 찬성했다. 이에 1870년 9월 1일 헌종은 신분개혁안을 공포하고 사실상 조선에서의 노예제도가 폐지된다. 1871년 일본으로부터 국서가 날라온다. 일본은 자국을 황제국으로 칭하며 자신들과의 불평등조약 체결을 원했다. 헌종은 국서접수를 거부하고 일본에 강력한 항의와 함께 대조선국 해군을 동해에 파견해 군사도발을 감행한다. 일본은 바로 꼬리를 내리고 1871년 12월 3일 평등조약인 조일통상조약을 체결한다. 1872년 4월 30일, 박규수가 사망한다. 헌종은 박규수를 성현공(成賢公)으로 봉하며 그를 애도했다. 1875년 8월 10일, 헌종은 전제군주제는 유지하되 내각제를 도입해 의정부의 장인 의정대신(영의정)을 중추원에서 국왕에게 추천하도록 하였고 임기제를 도입했다. 또한 지금의 귀족원인 종친원을 도입해 양원제를 실시한다. 형법원을 평리원으로 개변하고 의정부로부터 독립시켰다. 헌종은 국왕 아래 3권을 분립했다. 이때 붕당(現 정당)들이 생겨난다. 전주 이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왕국당(現 보수당), 한성 내 젊은 계층들을 중심으로 한 신민당(現 국민당) 등이 생겨난다. 1880년 의조가 왕세자로 책봉된다. 의조는 왕세자로 책봉되고 나서 만인평등(萬人平等)을 선언하며 대조선국 국제를 공포한다. 1881년 문조가 붕어한다. 1900년, 헌종이 붕어하고 의조가 즉위한다. | |||
[ 제3장. 혼란의 시대 ] | |||
| 1901년 안종(李安)이 태어나고 의조는 안종을 바로 왕세자로 봉한다. 후에 밝혀졌지만 헌종과 의조는 정력에 문제가 있어 애를 낫기가 무척이나 어려워 둘 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꼈다고 한다. 안종에게는 이 유전자가 내려오지 않아 대가 이어졌다. 1920년 대조선국 공군이 창설된다. 대조선국은 3군 체계가 된다. 공군이 창설되며 안종이 공군 장교로 입대하게 된다. 의조는 홀아들의 입대를 말렸지만 안종은 결국 입대하게 된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다. 의조는 일본의 의도를 몰랐다. 1932년 봄, 안종이 서해에서 훈련을 하고 있을때 일본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된다. 만주를 점령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이루는 대제국을 건설할 계획을 말이다. 안종은 그즉시 의조에게 가 이대로 두고 봐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의조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에게 일본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대로 두고봐서는 안된다고 함께 대비하자고 하지만 후버는 이를 무시로 일관한다. 의조는 미국의 무시에 국경지대에 육군과 공군 비행단 총 50만 명을 배치한다. 당시 국군의 30% 이상에 달하는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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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20세기의 끝과 21세기의 맞이 ] | |||
| 여러 사건 사고들을 거치고 1970년 안종이 붕어하고 선종이 즉위한다. 1989년 선종이 붕어하고 신종이 즉위했으나 1990년 암살사건으로 신종의 홀아들이었던 이 연이 즉위한다. 이 연 1967년 1월 25일에 태어났다. 이 연은 즉위 후 신종의 암살사건을 쫒아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이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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