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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명종이라 함은 시대가 위태로울때 재위한 임금의 묘호이다.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실 때 조선이 매우 위태로운건 사실이니 명종이라는 묘호가 옳다.''' | '''2023년 8월 17일, 명종의 묘호가 확정될 때''' }}
 
{{인용문| '''명종이라 함은 시대가 위태로울때 재위한 임금의 묘호이다.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실 때 조선이 매우 위태로운건 사실이니 명종이라는 묘호가 옳다.''' | '''2023년 8월 17일, 명종의 묘호가 확정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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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는 '''종(明宗)''', 시호는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고 휘는 '''연(䴏)'''이다.  
 
'''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는 '''종(明宗)''', 시호는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고 휘는 '''연(䴏)'''이다.  
  
[[대조선국 인종|인종]]과 [[휘빈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부왕처럼 백성의 총애와 사랑을 받았으며, 부왕과 성격이 매우 닮고 재위기간동안 이룬 공도 커 백성들이 성종을 향해 역사상 가장 휼륭한 성군이라 칭하였다. 또한 2022년 마지막 태생 왕족이다.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끝에 향년 109세로 훙서하였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군주'''이며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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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성종|성종]]과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3세''' 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고령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명종의 재위 기간 초, 조선은 위태로웠지만 중후반을 거치며 조선이 안정기에 들어서 명종은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왕처럼 오래 장수한 끝에 101세로 훙서하였다. 명종은 성격이 강단스럽고 재위기간 동안 여러 공로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일:현재2.png|width=30]] '''즉위전 생애'''==
 
==[[파일:현재2.png|width=30]] '''즉위전 생애'''==
  
2022년 12월 27일, [[대조선국 인종|인종]]과 [[휘빈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언행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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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0일, [[대조선국 성종|성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당시에는 왕세손이였다. 19일간 왕세손으로 재위한 끝에 2023년 3월 10일, 왕세자던 [[대조선국 성종|성종]]이 왕위에 오르며 조선의 왕세자가 되었다. 2023년 3월 26일 세자 책봉식을 치룬뒤 21세가 되던 4월 2일, 자신보다 한살 어린 여산 송씨의 [[의정왕후]]와 혼례를 맺게 된다. 이후 명종은 혼례를 치룬지 얼마 안된 4월 8일에 [[정순 공주]]를 보게 된다.
  
{{인용문| '''원손마마께서 새벽에 디코 노래방에서 내관인 청설모와 욕배틀을 했다는 증좌들이 고변을 하였으며 내금위를 동궁전(東宮殿)에 배치해야한다는 상소문(上疏文)도 올라왔다. 청내관의 체벌에 대해선 내외명부 수장을 대리(代理) 중이시던 빈궁마마께서 청내관을 존현각에 불러 경고(警告)로 끝내셨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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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은 왕세자 시절 [[의정왕후]]와 반대로 '''백성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않은채 아주 조용히 자랐다.''' 명종이 30대에 들어서던 4월 중순에 대왕대비 [[신덕왕후]], 왕대비 [[현덕왕후]], 왕비 [[원경왕후]]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며 왕실 내에서 서열 2위가 되었다. 세자빈이던 [[의정왕후]]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백성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명종은 백성들과 소통이 거의 없어 '''왕세자도 대내외적 활동을 해야하는게 아니냐'''라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인용문| '''미천한 소손을 아끼시는 전하의 어심에 감사함이 크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동궁전(東宮殿)에 외지인이 들어올 일이 없으며 저에게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청내관의 일 역시 품고 넘어가고자 하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 역시 없게 하겠사오니 전하께서도 소손의 뜻을 이해하여주시어 내금위의 배치까지는 거두어 주시길 바라옵니다. 심지어 자칫하면 이 일이 궁궐 밖으로 퍼질 수 있사온데 이미 중전마마와 관련된 일로 국가의 혼란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더 퍼져서야 되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
 
  
한번 자신을 모시는 내관과 함께 욕배틀을 하며 백성들 앞에서 차마 말할수 없는 심한 언행들을 벌였는데, 그걸 여러명이 고변하였다. 자식손주를 '''완벽한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대조선국 태조|태조]] 입장에선 '''걸림돌'''이 될수 밖에 없었으며 세자던 [[대조선국 인종|인종]]에게도 안 시킨 여러 시험을 원손인 성종에게 치루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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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로 재위한지 100일에 들어서던 6월 중순부터 대내외적 활동을 갑자기 재개하였다. 하지만 언행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는데, 장녀 [[정순 공주]]가 쌍둥이 자녀를 낳자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말들을 뱉었고, 왕세자로 오래 재위하며 왕위계승이 70대가 다 될때까지 되지 않자 부친 [[대조선국 성종|성종]]을 꼽주는언행을 뱉기도 하였다.
  
원손 고변 사건이 터지고 바로 다음날, [[대조선국 태조|태조]]는 [[신덕왕후]]와 세자던 [[대조선국 인종|인종]]을 경회루에 불러 세자빈 [[휘빈이씨]]와 원손 성종의 언행에 대해 대책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사실상 세자빈은 조용한편에 속했지만 원손의 언행으로 인해 모친 [[휘빈이씨]]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유폐상태던 [[신덕왕후]]가 [[대조선국 태조|태조]]의 지원으로 많은 권력을 얻게 된다. 그러다 결국 1월 5일 어머니 [[휘빈이씨]]가 세자빈에서 폐위되고 사망한다. 새 어머니로 [[정안왕후]]를 맞이한 원손은 어머니처럼 잘 대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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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인용문| '''새벽 1시 10분 원손마마께서 삼정승(三政丞)의 심사하에 집현전(集賢殿)에서 입학례(入學禮)를 치루다. 점수 영의정이 통을 주어 90점대였으나 우의정이 약을 주며 60점을 맞으셨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권''' }}
 
 
 
[[대조선국 태조|태조]]의 감독하에 삼정승들이 여러 시험지를 주었다. 원손이던 성종의 답변을 보고 영의정이 통을 주었으나 당시 우의정이던 김간춘이 약을 주며 '''점수가 매우 떨어졌다.''' 훗날 성종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에게 약을 준 김간춘을 싫어하였다고 전해져내려온다. 결국 극적으로 왕세손으로 책봉된 성종은 1월 17일 한양 토씨의 [[원경왕후]]를 세손빈으로 맞이한다.
 
 
 
2월 10일, 증조부 [[대조선국 태조|태조]]가 승하하고, 곧 바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다.
 
 
 
{{인용문| '''세자저하께서 강녕전(康寧殿) 職務실을 실수(失手)로 들어가 박상궁이 이에 경고(警告)하자, 세자저하께서 이리 말하셨다. ''' |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1권''' }}
 
{{인용문| '''어차피 미래에 내자리인데''' }}
 
{{인용문| '''그러자 박상궁이 말하기를, 실록(實錄)에 실여야겠군요.''' }}
 
{{인용문| '''그러자 세자저하께서 말하시길, 안됩니다. 실록(實錄)에는 쓰지마세요 라고 하셨다.''' }}
 
 
 
[[대조선국 태조|태조]]의 국상이 한참 치루어질때 태조의 빈전을 앞에 두고 강녕전에 들어간다던지, 미래 자신의 자리라고 말하며 권력욕이 많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상의 마지막 날 태조의 대관이 왕릉에 묻히던 의식이 있었는데 이때 세자가 자며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자는 경복궁 영제교에서 [[대조선국 인종|인종]]이 있는 근정전을 향해 비를 맞으며 15분 넘게 '''석고대죄'''를 하였다.
 
  
{{인용문| '''아! 불초(不肖)한 후손(後孫)이 감히 조상(祖上)과 선왕(先王)을 모심에 누를 끼치었으니 이 어찌 큰 불효(不孝)가 아니겠는가, 선왕(先王)과 선조(先祖)들께서는 이 후손(後孫)죄를 보시어 꾸짖어주소서, 那羅의 기틀과 廟社를 망치었으니 이 불초(不肖)한 후손(後孫)이 삼가 죄를 청하나이다, 본디 선왕(先王)께서 나라(那羅)를 여시어 구시대(舊時代)의 악을 滅하시고 나라(那羅)를 평안(平安)케 하신바. 후인(後人) 된 자로서 그 유지(維持)를 거슬렸으니 죄가 크옵니다. 선조(先祖)들께 죄를 고하나니 일신우일신하게 하시어 죄를 고치게 하시고 의무(義務)를 다하게 하여 주소서.''' |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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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아버지 [[대조선국 성종|성종]]이 훙서하며 '''73세'''의 나이로 '''조선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역사상 왕세자로 가장 오래 재위하며 '''114일'''만에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명종은 백성들에게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나라에 헌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연호는 하늘 아래 평화롭게 한다는 뜻에서 '''천평(天平)'''이라 정하였다.
 
 
세자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는지 석고대죄가 끝난 직후 종묘를 찾아 저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2월 20일에는 아들 이연을 얻었으며 2월 23일에는 새어머니 [[정안왕후]]가 정신 질환을 겪다가 결국 훙서하고, 세번째 어머니 [[현덕왕후]]를 맞이하였다. 효심을 다해 [[현덕왕후]]에게도 잘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3월 10일, 세자빈이던 [[원경왕후]]와 결혼 50일 기념일인 금혼식을 맞이하였는데 맞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일 오후 10시에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이 향년 72세로 갑작스럽게 훙서한다.
 
 
 
==[[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3월 10일, 아버지 [[대조선국 인종|인종]]훙서하며 45세의 나이로 '''조선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성종은 백성들에게 죽을 때 까지 나라에 헌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실제로 죽을 때까지 헌신을 다하고 공식 일정을 모두 소화'''하였다.
+
하지만 왕위에 오르자마자, 위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조선이 내부의 정치적 문제 등을 두고 나라 곳곳의 기능이 붕괴되며 결국 본방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명종은 왕실 가족들과 함께 한성부를 나와 배를 타고 제주로 잠시 향하여 머물렀다. 얼마 안가서 다시 조선의 대부분 시스템이 복구 되기 시작하였다. 7월 24일에는 유일한 직계 장녀인 [[정순 공주]]가 향년 65세로 훙서하며 딸을 잃게 되었다.  
  
세손과 세자 시절에 삐둘어지긴 했으나 왕위에 오른 이후 그 누구보다 '''성군, 제왕'''이라 칭할 정도로 열심히 국정을 운영하였다. 성종이 왕위에 오를 시기에는 개학 시즌으로 인하여 '''조선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였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정책을 수립하고 조선의 존립을 위해 온 힘을 다하여 4~6월 초에 조선이 다시 일어서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조선이 존립을 유지할 수 없었으나 발전을 하지 못한 이유가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때 문화사업이 모두 날아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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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중 문화 콘텐츠로는 카츠오브아이언이 수개월만에 다시 열렸고, 경기 대회가 개최되어 다양한 이벤트들이 열렸다. 정치적으로 명종이 세운 공로는 사헌부와 승정원을 설립한 것인데, 사헌부와 승정원을 통해 '''조선의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문제가 많던 성균관을 '''폐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와 토지를 개혁'''하였으며, 홍문관을 설립하여 '''시강원과 강서원 기능'''을 유지하게하였다. 또한 과거시험을 더욱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한성부, 내의원, 참판, 능참봉 등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실용적인 업무 구조를 만들었으며, 연호를 재도입하는 등 '''재위기간중 많은 공로를 쌓게된다.'''
  
4월 11일에 왕대비던 [[현덕왕후]]를, 4월 19일에 부인 [[원경왕후]], 4월 20일에 대왕대비 [[신덕왕후]]를 연이어 보냈으며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6월 17일에는 재위 100일 기념일인 백금경축을 맞이하였으며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그 결과 장남 1명, 손녀 1명, 증손주 2명, 며느리, 손주며느리, 증손주며느리까지 보았다. 너무 긴 재위기간으로 인해 왕세자던 [[대조선국 명종|명종]]의 불만이 '''매우 컸다고 한다.''' 6월 말 부터 지팡이의 도움없이 걷지 못했으며 건강이 안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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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순 공주]]의 소생이자 자신의 손주인 진평군과 경원군을 양자로 들여 진평군을 왕세자로, 경원군을 대군으로 책봉하였다. 조선의 양자 기능이 활용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였다.''' 하지만 양자로 들여진 8월 5일 [[효문 세자]]훙서하고,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던 [[의정왕후]]가 다음날 훙서하며 국모와 국본의 자리가 비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효문 세자]]의 장남으로 6일에 태어난 원손 이황을 13일에 조선 왕세손으로 책봉하며 차기 보위를 이을 후계자를 마련하였다.
  
결국 7월 1일, 폐비 김씨를 [[신의왕후]]로, 폐빈 이씨를 [[휘빈이씨]]복권시키고 향년 109세로 훙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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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에는 고인물이던 이무관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명종은 그를 '''영의정'''으로 추승하고 '''대군'''에 준하는 국가장을 열어주었다. 그러다 재위 50일인 금경축을 이틀 앞둔 8월 17일 오후 9시, 명종은 48일간 왕위를 재위한 끝에 향년 '''101세'''강녕전에서 훙서하였다.  
  
 
==[[파일:현재2.png|width=30]] '''가족 관계'''==
 
==[[파일:현재2.png|width=30]]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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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재2.png|width=30]] '''평가'''==
 
==[[파일:현재2.png|width=30]] '''평가'''==
  
・학구열 : 공부나 학업은 '''세손과 세자 시절에 아주 열정적'''이였다고 한다. 점수는 낮게 나온적이 많으나 학업에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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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열 : 공부나 학업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성품 : 감정적일때도 있고 이성적일때도 있으며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과 성격이 비슷하였다. '''호감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며 많은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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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 : 늘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으며 이는 부친 [[대조선국 성종|성종]]과 성격이 비슷하였다.  
  
・치적 : 재위기간동안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고 정치, 경제, 외교 등 다양한 부분에 있어서 발전하긴보단 쇠퇴하지 않게 현상 유지시킬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조선의 존립을 크게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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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 : 조선의 정치, 경제 분야를 크게 변화 시킨 공로를 세웠다.
  
・외모 : 피부색이 매우 밝았다고 하며 눈 또한 크고 이뻤다.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의 유전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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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 피부색이 밝았다고 하며 눈은 작았다고 한다.  
  
・가정사 : 조선 국왕중 최초로 왕비를 1명 두었으며, '''안정적인 가정'''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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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 : 장녀인 [[정순 공주]]가 자신보다 먼저 훙서하고, 잇따라 [[효문 세자]]와 [[의정왕후]], [[해주부부인 정씨]]가 잇따라 죽으며 재위기간중 많은 왕실 가족들이 죽는 고통을 겪었다.

2023년 8월 18일 (금) 17:35 판

조선왕조.png
대조선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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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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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대
이행
문종 대
이역
영조 대
이산
헌종 대
이향
이향 대
이율
조선 제4대 국왕
명종 | 明宗
명종어진.png
출생2023년 2월 20일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존현각
즉위2023년 7월 1일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근정전
사망2023년 8월 17일 (향년 101세)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강녕전
양릉(陽陵)
재위기간2023년 7월 1일 ~ 2023년 8월 17일 (48일)
본관전주 이씨
연(䴏)
부모부왕 성종, 모후 원경왕후
형제자매없음
배우자의정왕후
자녀정순 공주, 효문 세자(양자), 경원대군(양자)
종교유교
신장177cm
묘호명종(明宗)
시호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연호천평(天平)
명종이라 함은 시대가 위태로울때 재위한 임금의 묘호이다.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실 때 조선이 매우 위태로운건 사실이니 명종이라는 묘호가 옳다.
—  2023년 8월 17일, 명종의 묘호가 확정될 때

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는 종(明宗), 시호는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고 휘는 연(䴏)이다.

성종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3세 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고령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명종의 재위 기간 초, 조선은 위태로웠지만 중후반을 거치며 조선이 안정기에 들어서 명종은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왕처럼 오래 장수한 끝에 101세로 훙서하였다. 명종은 성격이 강단스럽고 재위기간 동안 여러 공로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재2.png 즉위전 생애

2023년 2월 10일, 성종원경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당시에는 왕세손이였다. 19일간 왕세손으로 재위한 끝에 2023년 3월 10일, 왕세자던 성종이 왕위에 오르며 조선의 왕세자가 되었다. 2023년 3월 26일 세자 책봉식을 치룬뒤 21세가 되던 4월 2일, 자신보다 한살 어린 여산 송씨의 의정왕후와 혼례를 맺게 된다. 이후 명종은 혼례를 치룬지 얼마 안된 4월 8일에 정순 공주를 보게 된다.

명종은 왕세자 시절 의정왕후와 반대로 백성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않은채 아주 조용히 자랐다. 명종이 30대에 들어서던 4월 중순에 대왕대비 신덕왕후, 왕대비 현덕왕후, 왕비 원경왕후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며 왕실 내에서 서열 2위가 되었다. 세자빈이던 의정왕후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백성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명종은 백성들과 소통이 거의 없어 왕세자도 대내외적 활동을 해야하는게 아니냐라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왕세자로 재위한지 100일에 들어서던 6월 중순부터 대내외적 활동을 갑자기 재개하였다. 하지만 언행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는데, 장녀 정순 공주가 쌍둥이 자녀를 낳자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말들을 뱉었고, 왕세자로 오래 재위하며 왕위계승이 70대가 다 될때까지 되지 않자 부친 성종을 꼽주는언행을 뱉기도 하였다.

현재2.png 조선 국왕 즉위

7월 1일, 아버지 성종이 훙서하며 73세의 나이로 조선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역사상 왕세자로 가장 오래 재위하며 114일만에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명종은 백성들에게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나라에 헌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연호는 하늘 아래 평화롭게 한다는 뜻에서 천평(天平)이라 정하였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자마자, 위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조선이 내부의 정치적 문제 등을 두고 나라 곳곳의 기능이 붕괴되며 결국 본방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명종은 왕실 가족들과 함께 한성부를 나와 배를 타고 제주로 잠시 향하여 머물렀다. 얼마 안가서 다시 조선의 대부분 시스템이 복구 되기 시작하였다. 7월 24일에는 유일한 직계 장녀인 정순 공주가 향년 65세로 훙서하며 딸을 잃게 되었다.

재위기간중 문화 콘텐츠로는 카츠오브아이언이 수개월만에 다시 열렸고, 경기 대회가 개최되어 다양한 이벤트들이 열렸다. 정치적으로 명종이 세운 공로는 사헌부와 승정원을 설립한 것인데, 사헌부와 승정원을 통해 조선의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문제가 많던 성균관을 폐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와 토지를 개혁하였으며, 홍문관을 설립하여 시강원과 강서원 기능을 유지하게하였다. 또한 과거시험을 더욱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한성부, 내의원, 참판, 능참봉 등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실용적인 업무 구조를 만들었으며, 연호를 재도입하는 등 재위기간중 많은 공로를 쌓게된다.

8월 1일, 정순 공주의 소생이자 자신의 손주인 진평군과 경원군을 양자로 들여 진평군을 왕세자로, 경원군을 대군으로 책봉하였다. 조선의 양자 기능이 활용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였다. 하지만 양자로 들여진 8월 5일 효문 세자가 훙서하고,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던 의정왕후가 다음날 훙서하며 국모와 국본의 자리가 비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효문 세자의 장남으로 6일에 태어난 원손 이황을 13일에 조선 왕세손으로 책봉하며 차기 보위를 이을 후계자를 마련하였다.

8월 12일에는 고인물이던 이무관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명종은 그를 영의정으로 추승하고 대군에 준하는 국가장을 열어주었다. 그러다 재위 50일인 금경축을 이틀 앞둔 8월 17일 오후 9시, 명종은 48일간 왕위를 재위한 끝에 향년 101세로 강녕전에서 훙서하였다.

현재2.png 가족 관계


자녀이름출생배우자/자녀
1녀정순 공주2023년 4월 8일덕흥군
효문 세자, 경원 대군

현재2.png 평가

・학구열 : 공부나 학업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성품 : 늘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으며 이는 부친 성종과 성격이 비슷하였다.

・치적 : 조선의 정치, 경제 분야를 크게 변화 시킨 공로를 세웠다.

・외모 : 피부색이 밝았다고 하며 눈은 작았다고 한다.

・가정사 : 장녀인 정순 공주가 자신보다 먼저 훙서하고, 잇따라 효문 세자의정왕후, 해주부부인 정씨가 잇따라 죽으며 재위기간중 많은 왕실 가족들이 죽는 고통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