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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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공식 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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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로마 제국의 설정을 담고 있는 문서다

마누일 2세

1396년 니코폴리스에서 프랑스 왕국,신성로마제국,헝가리왕국등 유럽 연합군과 오스만 술탄국의 전투는 프랑스 장다름 기사들과 튜튼 기사단등의 활약으로 유럽 연합군이 승리했다. 그후 오스만 술탄국은 동로마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고 헝가리-불가리아를 견제하기도 힘들정도로 쇠약해졌다. 1402년 티무르 제국의 황제 티무르의 10만 군대와 오스만 술탄국의 바예지트 1세의 6만 군대간의 대전투인 앙카라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완패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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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에게 잡힌 바예지트 1세

그 사이에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국에게 서방 지역을 방어 해줄터이니 영토 일부를 달라는 부탁을 하고 당시 술탄이던 메흐메트 1세는 티무르와의 전쟁을 견디기도 힘든데 헝가리-세르비아등의 서부 전선의 안전이 필수였기에 테살로니카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 지역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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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연대기에 그려진 당시

이후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즉위하자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서유럽에 십자군을 요청하고 발칸국가인 불가리아 제2 제국에게는 황제가 직접 가서 무릎 꿇고 지원을 부탁하였다. 허나 십자군은 무산되었지만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이 봉신국이 된다면 3천의 병력을 지원해준다 하였고 마누일 2세는 튀르크인보단 불가르인이 낫다 하고 불가리아 제 2제국의 봉신국이 되는 조건으로 추가적인 지원까지 받아냈다. 허나 이를 가만히 둘수 없던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지만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의 저항으로 돌파에 실패하고 티무르 제국의 4대 아미르인 샤 루흐의 침공으로 동쪽으로 군대를 다시 돌리게 되었다.

요안니스 8세

1425년 마누일 2세가 사망하고 요안니스 8세가 즉위했다. 요안니스 8세는 즉위하자마자 세르비아와 에매하던 국경을 확립해 세르비아에게 감싸졌던 테살로니카 인근을 얻었고[1] 모레아 전제군주국까지 연결되게 하여 동생이던 데스포티스 콘스탄티노스와 협의 하여 두 국가를 하나로 통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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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년 발칸반도 판도

그후 시간이 흘러 1426년 불가리아에선 콘스탄틴 아센 2세가 동로마 제국에게 자신들에게 충성을 하냐며 황제의 조카를 불가리아 황실에 혼인 보내라 했고 동로마는 이에 거부했다. 그러자 불가리아는 동로마로 1.2만의 군대를 보내 정복하려 했고 동로마를 명목상이지만 봉신국으로 두던 세르비아는 동로마의 영토를 불가리아가 가져갈까 두려워 지원하고 동로마와 불가리아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후 전쟁은 불가리아-오스만 동맹의 승리로 끝나면서 동로마는 겨우 얻었던 테살로니카 인근을 불가리아에게 넘기게 되고 오스만은 지중해 섬들을 획득했다. 그후 동로마는 친서유럽 정책을 해가며 교황이던 마르티노 5세에게 기독교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정교회와 카톨릭 모두 힘을 합쳐 이슬람을 몰아낸다며 1428년 불가리아-오스만을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수도인 소피아로 진격해 점령하여 콘스탄틴 아센 2세를 잡아 눈을 뽑고 거세 시킨채 오크통에 넣어 에게해에 수장시켰다. 그후 불가리아 제2제국은 왈라키아 동부로 몰아내고 라틴계인 소피아 백국,도브리차 공국을 건국하고 나머지 영토는 세르비아,동로마등이 분단해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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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제2제국 멸망후 판도

허나 콘스탄틴 아센 2세의 추종자들은 도브리차 공국 북쪽으로 가서 불가리아 대공국을 건국한다.
그후 1430년 동로마 제국은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에 접근해서 불가리아 대공국과 도브리차 공국까지 분단하자 제의하고 이에 세르비아는 소피아 백국까지 나누자 하여 양국의 군대가 진격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에 막혀 소피아 백국의 일부만 점령한채 도브리차를 포기하고 후퇴한다.

각주

  1. ↑ 물론 영토 협상도중 이리 큰 영토를 얻은 비결은 요안니스 8세가 세르비아가 해당 영토 제공시 불가리아와 전쟁을 해서라도 세르비아의 봉신국이 되겠다고 빌어서였고 해당 약조는 1439년 요안니스 8세가 세르비아를 버리고 친서유럽 정책을 하며 사실상 무산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