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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포스페이트 마천루.png|width=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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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포스페이트 신시가지의 마천루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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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Br]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실제 비교.pn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구글 지도에 대입한 라리마 전도 }}}''' ||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라리마제국 6차 행정구역.pn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라리마 제국의 행정도}}}''' ||
 
 
 
== 개요 ==
 
'''이 문서는 가상 국가인 [[라리마 제국]]의 설정상 역사를 서술합니다.
 
 
 
== 개척 이전 ==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이텔멘인.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러시아가 도달하기 전 캄차카, 아니안 섬에서 살았던 이텔멘인 }}}''' ||
 
 
 
[[러시아제국]]과 [[대영제국]]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에는 별다른 문명이나 문화가 발생하지 못했다. 셀레스틴에는 기원후 1200년, 러스트라스에는 기원후 1600년부터 하와이에서 '''폴리네시아인'''이 당도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캄차카 바로 아래에 있는 아니안 섬에는 오래 전부터 '''이텔멘인'''[* 이들이 라리마어 화자들이다] 들이 살고 있었다. 라리마 섬에는 원주민이 거의 살지 않았다. 퉁구스인이 도달했는지는 가설이 분분하며, 라리마 남부에 미크로네시아인들과 다이어스포어와 라리마 섬 북부에 '''캄차가계 민족'''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개척기 ==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라리마 첫 조우.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라리마 섬 탐험 당시 원주민들을 그린 그림과 지도 }}}''' ||
 
 
 
라리마 지역이 처음 발견된 것은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1728년 비투스 베링의 '''1차 캄차카 탐험''' 당시 아니안 섬이 발견되었다. 당시 아니안 섬의 원주민 언어는 캄차카 반도의 언어와 달랐다고 한다. 비투스 베링은 당시 베링 해협의 옛말인 '''아니안 해협''' 의 이름을 따와 아니안 섬이라고 작명했다. 또한 1741년 베링의 '''대북방 원정'''[*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Northern_Expedition ] 당시 라리마 섬이 발견되었다. 라리마 섬에 베링의 배가 잠시 정박했을 때 한 원주민 아이가 궁금해하며 배에 접근해 지역어로 “안녕” 이라는 뜻의 '''“라리마”''' 라고 말한 것이 현재 라리마의 이름 유래가 되었다. 섬이 발견되자 소수의 러시아 정착민들이 라리마 지역으로 이주했다. 또한 베링이 죽고 난 후 후속 탐험대에 의해 1757년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다. 한편 셀레스틴 섬은 제임스 쿡 선장이 지도하는 '''3차 항해'''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아니안 섬의 정착지는 북부 평원에 건설되었고, 라리마 섬의 최초 정착지는 1744년 현재의 멀리니아 지역에 처음 건설되었다. 한편 영국은 셀레스틴 섬을 죄수 수용소로 쓰려고 해 실제로 몇 차례 죄수들이 보내지기도 하였으나, 뉴사우스웨일스[*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아 ]에 밀려 얼마 안 가 끊어졌다.
 
 
 
== 1800년대 ==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1754년 제작 지도.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754년에 제작된 지도. 캄차카와 아메리카 사이에 라리마가 묘사되었다. }}}''' ||
 
 
 
러시아 제국은 라리마 섬과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 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1800년에는 2000명 가량의 주민이 러시아로부터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후는 캅카스 수준은 아니였지만 따뜻하고 곡물이 자라기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은 '''부동항'''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1812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함께 '''멀리니아, 포스페이트'''를 도시 지위로 격상시켰다. 또한 당시 멀리니아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의 본부가 위치했다. 영국 또한 셀레스틴에 항구와 기지를 건설했다. 또한 1830년대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라리마를 분리해 라리마를 개별의 주로 만들었다. 당시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다.[*이 시기 원주민들은 이미 대부분 쪼겨나거나 죽임당했다 ] 하지만 1834년 라리마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 러쉬가 일어나 1940년 라리마의 인구는 무려 700%가 증가해 32,000명이 되었다.[* 이후 라리마의 인구는 잭백내전 전까지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었다 ] 이 시기에 러스트라스 군도와 셀레스틴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 간의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지만 몇 차례 군사충돌 끝에 두곳 다 러시아가 점유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전투가 이어졌고, 영국은 셀레스틴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또한 1850년대쯤이 되면 러시아 당국도 라리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1854년 크림 전쟁의 일부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와 더불어 라리마 또한 영불군의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멀리니아와 포스페이트 지역에서 '''공성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이어졌고 러시아제국군은 203명, 영불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낸 채 러시아가 방어에 성공했다.[* 아니안 섬은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같이 함락되었다 ] 같은 시기 러스트라스 군도에서도 해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격퇴에 성공했다. 같은 시기 셀레스틴에서도 해전이 일어났는데, 라리마 제도에 병력을 집중했던 러시아는 대영제국에게 상륙을 허용하고 만다. 이후 파리 조약에서 셀레스틴은 영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러시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러스트라스와 라리마제도에서 일어난 1867년 러시아는 아메리카를 미국에게 매각했지만 라리마는 매각하지 않았다.
 
 
 
==러일전쟁==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러일전쟁 러시아 태평양 함대.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904년 라리마제도 멀리니아항에서 출항하는 러시아 군함 }}}''' ||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라리마 또한 전장이 되었다. 러시아제국의 라리마 함대도 동원되어 1904년 8월 29일 '''수도 도쿄'''를 공격하러 향하고 있었으나 일본 이바라키현 앞바다에서 때마침 라리마를 공격하러온 일본의 함대와 마주쳐 '''이바라키 해전'''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으며 라리마 함대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나 일본의 피해 또한 막심하여 라리마 제도를공격하지 못하게 되지만, 1905년 1월 3일 재정비를 마친 일본의 함대와 러시아제국군이 노보이마르마라 해에서 격돌한 '''노보이마르마라 해전'''이 일어난다. 러시아제국이 수적으로는 유리했으나 러시아에게 불리했던 기상 상황 등으로 밀리게 되고 일본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다이어스포어 섬'''을 일주일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울렉시안 해협[*다이어스포어 섬과 라리마 섬 북부 사이에 있는 해협 ]을 통해 다이어스포어와 마주보고 있던 당시 라리마 제도의 주도 '''멀리니아'''는 직접적인 포격을 받았다.[* 포스페이트에서도 소규모의 해전이 일어났다 ] 그러나 뒤이어 러시아제국에 의해 1월 11일 다이어스포어는 다시 러시아가 점령하게 되었는데, 1월 8일 이 과정에서 다이어스포어 화산의 용암이 흘러내리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다이어스포어 화산은 하와이식 분화 화산이다 ] 전투가 일어나 양측 총 4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를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라고 한다. 또한 전쟁 후에는 일본인을 사이에서 연해주, 캄차카와 함께 라리마 또한 할양받아야한다는 여론이 잠시 생기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의 전함.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의 전함 }}}''' ||
 
라리마 제도는 1차대전 당시에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먼바다에서 몇차례의 충돌이 있었지만 라리마 제도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 '''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는 북대서양에 파견되어 '''독일군'''과 몇 차례의 교전을 벌였고, 뉴기니, 미크로네시아, 마셜과 사모아 점령이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라리마 제도 러시아인들이 유럽 전선에서 싸웠으며, '''라리마의 자원'''은 '''군수품 생산'''에 활용되었다. 또한 영국과 미국 관료들과의 회담 장소로도 간혹 쓰였다.
 
 
 
 
 
== 러시아 내전, 국부천대 ==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백군 망명 노동.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수송선에 쓸 연료를 운반하는 포스페이트항의 열차 }}}''' ||
 
 
 
1차 세계대전에서 온 힘을 다했던 러시아제국이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피로와 그동안의 곪아왔던 사회 문제로 인해 반황제주의자들은 1917년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임시정부'''를 세운다. 이에 라리마 제도 또한 임시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계속되는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간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는 '''내전 상태'''[* 러시아 내전 또는 적백내전 ]에 돌입하게 된다. 처음에는 백군이 승기를 잡을 듯 하다가, 1919년 12월을 기준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 백군(러시아 공화국)은 수도를 '''라리마 제도 멀리니아'''로 옮겼으며 러시아 공화국 정부는 이곳에서 가동하게 된다. 극동마저 적군의 손에 넘어갈 기미가 보이자 러시아 백군의 주요 인원들은 1919년 9월 9일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 '''대철수'''를 진행했다. 이후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러시아 전역에 퍼진 백군 잔여군들을 컨트롤했다. 캄차카 반도를 차지한 적군은 백군의 점령지였던 아니안 섬에 '''수백 차례''' 공격을 가하지만 러시아 백군은 '''7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아니안 섬을 지켰고 이는 '''17차 아니안 공격'''[* 전간기와 냉전기에 이루어진 공격은 "아니안 N차 위기" 로 쓰인다 ]을 마지막으로 1923년 9월에 종료되었다.[* 아니안이 백군의 진먼이 된 셈 ] 적군은 라리마 제도에도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했으나 당시 해상 전력 체계를 잘 갖추지 못한 탓에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다. 또한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1922-1923년 '''페펠라예프의 군대'''와 '''연해주의 백군'''을 직접적으로 지휘, 지원했으며 이 두 지역이 함락당할 때 수 차례의 대규모 망명이 이루어졌다. 또 라리마 제도에서도 병력을 파견해 '''마가단'''을 잠시 점령했으나 한달을 가지 못하고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과 볼셰비키 적군 간의 직접적인 전투는 1926년 '''우랑겔 섬'''을 적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끝이 났으며,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볼셰비키를 지원했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왕정주의자, 공화주의자, 자본주의자, 몐셰비키 등의 혼합체였으나 여러 차례의 회의를 통해 망명해 있던 니콜라이 2세의 사촌,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을 황제로 올려 '''러시아제국'''을 복원시키기로 합의한다.[* 몐셰비키 측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 ] 1925년 7월 18일 키릴 대공이 '''키릴 1세'''로 즉위함으로써 러시아제국은 '''라리마 제도와 아니안 섬, 러스트라스'''에서 복원되었다. 다만 황제는 실권이 없고 국가는 의원내각제로써 운영되며 철저한 민주주의 체재를 따랐다. 첫 총리는 '''케렌스키'''였고 공산권을 경계하던 많은 서구권 국가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았으며 후(後)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일종의 '''체재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는 경제력, 정통성, 인지도, 대외 이미지, 군사력은 라리마(러시아제국)이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 또한 1927년 더 좋은 입지를 가진 포스페이트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상술했다시피 라리마 백군은 본토에서의 내전이 끝났을 당시에도 코만도르스키예 제도, 우랑겔 섬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코만도르스키예 제도는 1924년, 우랑겔 섬은 1926년 소련에게 탈환당하고 아니안 섬만 남게 되었다[* 이후 아니안 섬은 라리마-소비에트 연방 관계의 중심이 된다 ]
 
 
 
==전간기==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1930년대의 포스페이트.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포스페이트의 1929년 모습}}}''' ||
 
 
 
'''라리마 러시아제국과 백군'''은 라리마 내 안정을 빠르게 되찾았고, 성장을 이어나갔다. 이는 정책의 성공, 서방국가로부터의 원조, 라리마 지역이 러시아제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1930년 라리마 러시아제국은 당시 기분으로는 '''선진국''' 중 하나였으며 러스트라스의 태평양 허브 항구 역할과 '''라리마 금광'''과 '''미메타이트'''[* 전간기 라리마의 최대 광업지역 ] 덕분에 호황기를 맞았으며 러시아제국에도 온전히 이루지 못했던 '''산업화'''를 이루게 된다. 호황기에는 '''본토 수복''' 또한 활발히 넌의되었으며, 이는 정치권에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여 아니안 지역에 몇몇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소련과의 대립''' 또한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미국발 대공황'''을 라리마 러시아제국 또한 피할 수 없었고, 1933년에는 전년대비 '''전체 GDP의 14%'''가 증발할 정도로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대공황 당시 '''공화주의자''' 또한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 하지만 1935년 러시아제국 복원 당시 군주국 건설에 격렬히 반대하던 내전 당시 백군의 편에 섰던 일부 '''멘셰비키'''가 라리마 러시아제국군과 공조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멘셰비키는 '''축출'''되었다. 또한 대공황의 타격으로 소련과의 경제적 격차 또한 매우 적어지게 된다. 대공황기에는 주로 진보파가 지지를 받았다. 라리마 러시아제국은 1937년 대공황의 침체에서 대부분 벗어났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리마 러시아제국 또한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고 미국, 네덜란드, 영국, 중국과 함께 '''ABCD 포위망'''에 참여하게 된다. 아니안 섬에는 전간기 내내 간헐적인 '''포격'''과 함대 간 대치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아니안에서의 대치 상황이 특히나 많아졌다.
 
 
 
 
 
==태평양 전쟁==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일본군 상륙.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칼세르 지방에서 진격하는 일본군}}}''' ||
 
 
 
1939년이 되어 세계는 다시금 세계대전의 포화 속으로 말려 들어갔고, 1941년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 또한 시작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석유와 자원이 있었던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라리마 지역 또한 확보해야 했다. 이는 라리마 제도의 미메타이트에서 나오는 '''광물자원'''과, 라리마를 잃게 될 경우 '''일본 본토를 노리는 검'''이 되지만 라리마를 얻는다면 반대로 '''미국을 노리는 검'''이 되기 때문이었다. 라리마 러시아제국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네덜란드, 영국, 중국 등과 함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전까지만 해도 라리마는 독소전 당시 독일을 비밀리에 지지하기도 하였다. 소련 때문에... ] 여전히 상시 경계해야 할 소련이 있었기에 많은 병력이 아니안에 주둔되었다. 또한 '''군 내 부패'''도 심각했다..
 
 
 
===1941~1942년===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G3M.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아니안 지역을 공습하는 미쓰비시 G3M 폭격기 }}}''' ||
 
 
 
<big><big>아니안 지역</big></big>
 
12월 26일, 일본 폭격기가 당시 상당수의 항공기와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아니안 지역의 주도 '''표트르그라드'''를 폭격하여 '''아니안 공습'''이 일어난다. 홋카이도에서 출격한 폭격기는 26일 새벽에 아니안의 공항, 전투기 격납고, 부대와 석유 저장통 등을 폭격했다. 뒤이어 라리마 러시아 국적의 폭격기가 폭격당하지 았았던 아니안 북쪽의 '''21비행장'''에서 이륙해 항공전을 벌여 일본군 폭격기 3대를 격추하고, 더이상의 폭격이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니안 공습으로 인해  아니안 지역의 '''제공권'''을 내줌고 동시에 '''상당량의 항공 전력'''이 손실되었다. 이어서 '''1942년 1월 6일''' 일본군은 아니안 지역에 '''상륙'''을 감행했고 아니안 섬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big><big>라리마 제도</big></big>
 
라리마 제도의 상황도 아니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안 공습이 진행된 5시간 후에 일본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중추 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포스페이트항'''에 폭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라리마 러시아 포스페이트 함대는 이미 일본군의 공습을 감지하고 항공모함이 있는 곳을 역기습해 해전이 일어나게 되지만, 라리마 러시아가 참패한다. 이후에도 멀리니아, 플레로보 등에 폭격이 이어지며 일본군의 피해도 많았지만 라리마의 전력을 '''무력화'''하게 된다. 일본군의 제공권, 제해권 장악 후 2월 22일 라리마 제도를 점령하는 '''세키가하라 작전''' 이 실행되어 러일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방어가 가장 허술했던 '''다이어스포어 북부 지역'''과 칼세르 남부 샬레하르트에 일본군 해병대가 상륙했다. 하지만 러일전쟁 때와는 달리 다이어스포어 방위군은 물론 멀리니아에서 빠르게 4개 전투사단이 도착해 일본군의 진격을 어느정도 저지시켰다. 하지만 칼세르 지역에서의 상황은 일본군이 지역 방위군을 궤멸시키면서 더더욱 나빠졌다. 칼세르의 일본군은 2월 28일 '''라리마 고원'''까지 속전속결로 진격했고, 토리아 남부의 세니딘 반도[*토리아 지역의 서남쪽으로 튀어나온 반도 ] 와 미메타이트에서도 상륙이 들어왔다. 라리마 러시아는 상황이 악화되자 '''라리마 강, 라리마 고원과 포스페이트 북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만들고 멀리니아 지역 또한 계속 저항하였다. 방어선 구축 이후에는 영국, 호주, 미국 또한 라리마 러시아를 적극 지원했으며 라리마 러시아의 존재는 일본의 태평양 진출, 보급에 큰 지속적으로 '''큰 혼선'''을 주었다. 여담으로 태평양 전쟁 중 라리마 러시아는 '''100만'''에 달하는 남성들을 대거 징집해 싸우게 만들었는데 후에 이로 인해 '''"러시아 민족은 인구가 없어도 인민웨이브를 한다"'''' 라는 인식이 생기기도 했다. 라리마 강과 라리마 고원의 경우에는 자연지물이 막고 있어 쉽사리 뚫리지 않았지만, 포스페이트 북부는 드넓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포스펭페이트 북부 전선에는 양 측이 밀고 밀리다가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호전이 재현되기도 했다. 1942년에만 포스페이트 북부에서 '''30만명'''이 죽었다.
 
 
 
<big><big>러스트라스와 셀레스틴</big></big>
 
러스트라스와 셀레스틴에서도 전투가 일어났다. 2월 1일 러스트라스에서 일본군이 상륙을 시도해 5개 섬 중 2개 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2월 5일에는 영국령 셀레스틴에 상륙시도가 있었지만 저지당했다. 곧이어 2월 8일 연합군이 러스트라스 또한 재탈환하는데 성공하고, 러스트라스는 임시로 '''영국'''이 관리하게 되었다.
 
 
 
===1943년~1945년===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라리마 강 대전투.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볼쇼이 전투 도중 진격하는 연합군  }}}''' ||
 
 
 
<big><big>아니안 지역</big></big>
 
미군이 1943년 8월에 이르러 아니안 섬 옆의 알류샨 열도의 섬을을 전부 탈환했지만 아니안 섬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아니안 섬은 1943년 9월 라리마 제도의 전세가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자 재탈환되었는데, 당시 아니안 섬을 넘보고 있었던 소련이 라리마 러시아가 아니안 섬을 탈환하자 '''군함'''을 보내 같은 연합군인 라리마를 위협했고(...) 라리마 또한 함정에 '''총격'''을 가했다. 양측은 서로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땅을 사수한 것 뿐이라며 날을 세우기도 해 같은 연합군이었지만 '''적국 관계'''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라리마 러시아는 후에 소련의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점령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big><big>라리마 제도</big></big>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었다. 일본군의 진격 또한 주춤하게 되었지만 라리마에서만큼은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 방어선을 뚫으려 했고, 1943년 1월 1일 '''오스토르브 섬'''[* 포스페이트 남부에 있는 섬 ]이 일본군에게 함락된다. 그러나 전선은 교착 상태에 있었고, 양측의 피해 또한 너무 막심했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라리마 지역을 차지해야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라리마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1943년 5월 2일 라리마의 주요 시설이 있는 '''볼쇼이 시'''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면서 라리마 강 방어선이 뚫린다. 뒤이어 뵬쇼이 시 좌측의 모프 시 또한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황궁과 정부청사가 있는 볼쇼이 시는 포위되어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세로 뵬쇼이 시 또한 일본군에게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볼쇼이 시가전 진행 당시 황궁에 폭탄이 떨어져 차르 블라디미르 3세가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라리마 러시아군은 4만명의 사상을 감수하고 일본군 점령지를 뚫어내 포스페이트 북부에 있었던 연합군 점령지와 닿게 되었다. 뒤이어는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라리마 러시아군과 미군은 울렉시안 해협[*다이어스포어 섬과 라리마 섬 북부 사이에 있는 해협 ] 의 주요 거점에 상륙하여 포위당한 멀리니아와도 전선을 이었다. 1943년 11월 13일에는 미메타이트 지역이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 아래에 들어갔고 남은 것은 칼세르 남부와 토리아, 우라니아 뿐이었다. 다이어스포어는 1943년 8월 연합군의 반격으로 재탈환했는데, 40년 전 러일전쟁 당시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가 일어난 다이어스포어 고지에서 '''한번 더'''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고 라리마 러시아군은 '''2차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에서는 1차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의 사상자의 '''3'''배 가까이 사상자를 낸 끝에 다이어스포어가 탈환되었다. 1944년이 되자 라리마 러시아군은 러일전쟁부터 이어진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계획했고 작전의 이름은 쓰시마 해전에서 시작된 복수라는 의미를 담아 '''쓰시마 작전''' 으로 명명되었다. 2월 22일, 일본의 라리마 침략 2년이 되는 말에 우라니아, 세니딘 반도와 부속도서 34곳에 라리마 러시아군이 '''상륙'''을 진행했으며 '''20만'''에 달하는 병력이 라리마 강을 넘어 진격했고 수많은 전투기가 일본군의 기지에 '''생화학무기와 폭탄'''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이 상황에서 임시로 후퇴해야 했지만 오세아니아의 섬들이 미군에게 점령당하는 와중에 라리마를 잃을 순 없다고 잘못 판단하여 진격을 시도했고 대부분이 '''궤멸'''당했다. 라리마군은 빠르게 진격했지만 그 와중에 포로 잡은 일본군을 전부 '''학살'''하고 시체를 일본군 진지에 던지는 등의 잔혹한 공격 수법도 사용해 비난받기도 했다.1944년 7월 마지막 일본군 점령지가 함락됨에 따라 라리마 제도의 전투는 끝이 났고, 라리마 제도에서만 '''라리마인 70만명'''이 사망했다.
 
 
 
<big><big>러스트라스와 셀레스틴</big></big>
 
셀레스틴에서는 1943년 12월 영국군과 일본군 간의 해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영국군이 열세인 듯 보이다가 라리마 러시아군과 미군의 합세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러스트라스와 셀레스틴 지역은 1945년까지 조용하다가 러스트라스 지역은 종전 후 라리마 러시아가 다시 돌려받았다.
 
 
 
<big><big>태평양전쟁의 종전</big></big>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히로히토가 옥음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면서 태평양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라리마는 '''승전국'''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피해가 심했던 국가였다. 수도 포스페이트를 포함해 수많은 옛 건물들과 기반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토리아 농지는 생화학무기와 폭탄으로 엉망이 되어 이를 제거하는데 큰 힘이 들었다. 또한 태평양전쟁을 기점으로 라리마와 소련의 경제 격차 또한 크게 벌어졌다. 태평양전쟁의 진행 후 유럽의 마셜 플랜과 같이 라리마 또한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냉전==
 
===1940-1950년대===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포스페이트 항구 1950년대.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950년대의 포스페이트 항구  }}}''' ||
 
 
 
<big><big>1940년대</big></big>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었다. 동유럽 지역에서는 '''철의 장막'''이 씌워졌으며 동아시아에서는 '''국공내전'''의 발발과 '''한반도의 분단'''이 이루어졌다. '''트루먼 독트린'''의 선언과 함께 유럽 국가들과 같이 라리마 러시아도 미국으로부터 재건을 지원받아 빠른 속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소련에서는 여전히 라리마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종전 이후, 특히 캄차카의  '''아니안''' 에 대한 주장이 거세졌다. 소련은 라리마 러시아의 아니안 섬에 시도때도 없이 함대를 끌고 와 무력시위를 벌이곤 했다. 이에 라리마 러시아 정부가 소련과 똑같이 군함을 끌고와 소련의 캄차카 영해를 침범해 무력시위를 하는 막장으로 이어졌고 소련은 한번만 더 그랬다간 라리마를 당장이라도 '''점령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영토(주장 지역)에 함대를 보낸 것 뿐이니 양측 간의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 소련은 1948년 6월 25일 독일에서의 '''베를린 봉쇄''' 다음날에 태평양 함대를 동원해 아니안 섬을 해상봉쇄했다. 베를린 봉쇄에 이어 '''아니안 봉쇄'''가 시작되자 미영프 3국은 크게 당황했으며 라리마 러시아 또한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베를린 공수와 함께 '''아니안 공수작전''' 또한 실행되어 라리마 섬, 앵커리지와 홋카이도에서 이륙한 미국과 라리마 러시아의 항공기가 아니안 섬에 물자를 실어날랐다. 총 '''7만 1283회'''의 항공기 수송이 진행되었으며 [* 아니안 지역은 서방국 진영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한번에 많은 물자를 수송했다. ] 소련은 베를린 봉쇄 해제와 같은 날인 '''5월 12일'''에 아니안 지역에 대한 해상봉쇄를 풀었다.[* 항공기 수송은 9월 30일까지 진행되었다 ] 아니안 해상봉쇄의 결과로 라리마 러시아 정치계에서는 반공 강경파들이 정권을 잡았고, 아니안 지역에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이 주둔하는 결과를 불렀다. 또한 아니안 봉쇄로 인해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라리마 러시아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에치슨 라인'''에는 '''아니안 섬'''이 선 안쪽에 포함되어 있었다. 1949년에는 대만이 국부천대를 감행하면서 라리마 러시아와 같은 케이스가 생기게 되었다.
 
 
 
<big><big>1950년대</big></big>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 안보리는 남한에 병력을 급파한다. 반공주의 정당이 집권했던 라리마 러시아도 한반도의 '''5000명''' 규모의 병력을 파견해 전쟁을 도왔다. 1950년대 라리마 러시아에서는 반공주의 정당, 러시아국의당이 집권했고, 노시안 지역과 포스페이트 북부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외교적으로 일본과 독일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지만, 공산권 국가들에게는 국가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는 소련의 "하나의 러시아" 스러운 압박으로 인해서다 ]
 
라리마 러시아군는 계속 증강되었고, 라리마 러시아 또한 베이비붐을 맞아 전쟁으로 잃은 인구가 금세 회복됨을 넘어서 가파른 속도로 증가했다.
 
 
 
===1960-1970년대===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포스페이트 지하철.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970년대 포스페이트 지하철  }}}''' ||
 
 
 
<big><big>1960년대</big></big>
 
1559년 쿠바 혁명이 일어나고 쿠바에 공산정권이 세워졌다. 3년 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는 '''아나디르''' 계획의 실행으로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합의했으며, 이는 미국에게 있어 크나큰 위기 소식이었다. 쿠바의 미사일 배치가 확인되자 주 라리마 미군 또한 경계태세에 돌입했으며, 쿠바 봉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이를 무시하며 '''핵잠수함'''을 동원해 선박을 쿠바로 진입시키자, 미국은 라리마 아니안 지역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한다.[* 1961년 이미 아니안에는 이탈리아, 터키와 같이 미사일이 설치된 이력이 있었다. ] 아니안 지역에 배치된 미사일은 소련의 극동 군사도시와 비밀도시를 모두 타격할 수 있었고, 소련 정부는 격분했으며 1962년 10월 24일 소련 함대가 '''2차 아니안 해상봉쇄'''를 시작했다. 이에 라리마는 소련 함대의 '''30m''' 앞에 정박시키고 모든 포를 소련 함대에 겨누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미국은 '''데프콘 2'''를 발령했다. 라리마 러시아군 역시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라리마 러시아 여론에서는 '''소련 정벌론'''[*실질적 성공 가능성은 '''0%''' ]이 크게 대두되었으며, 라리마 러시아 정부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본토 수복'''을 고려하기도 했다.[* 당시 라리마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소련을 이길 수 없어 단순한 표심 전략으로 추정된다 ] 상황이 커지자 흐루쇼프는 이탈리아, 터키, 라리마의 미사일을 철수하면 자신도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하겠다 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주피터 미사일을 3국에서 철수했다. 당연히 라리마 러시아 측에서는 미사일 철수에 관해 극구 반대했지만 미사일은 철수된다. 소련 또한 해상봉쇄를 해제했다. 이는 라리마의 독자적 미사일 개발과 비밀리에 이루어진 '''핵개발'''의 시작이 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반공주의 정당이 집권했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한 미국에 대한 실망이 겹쳐 1960년대 후반에는 최초로 진보 정당인 '''러시아발전당''' 이 집권했다.[*그러나 공산권에 대한 성향은 여전히 반공주의였다 ] 1960년대는 라리마 러시아가 가장 가파른 성장을 이뤄낸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라리마 러시아에서는 유럽과 어느정도 비슷한 기후로 인해 밀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 라리마 러시아의 기후에 최적화된 밀과 '''벼'''[* 러스트라스, 남부지방에서 재배되었다 ] 가 개발되어 식량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들어선다. 라리마의 주요 고속도로와 포스페이트의 지하철은 1960년대에 개통되었다.
 
 
 
<big><big>1970년대</big></big>
 
1971년 대만이 유엔에서 퇴출되었다. 대만은 국부천대 이후로 점점 많은 국가들에게 단교당해오고 있었는데, 1971년 알바니아가 발의한 대만 퇴출 의결안이 가결됨에 따라 대만이 쫓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대만이 축출되자 라리마 러시아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가뜩이나 라리마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러시아 SFSR'''이 유엔에 가입된 상태였다. 이런 주장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는데, '''대만의 유엔 축출'''로 인해 라리마 러시아 내의 중요한 안건이 되었다. 당시 집권당인 '''러시아발전당'''은 진보파였지만 러시아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하고 있었지만, 당시 진행되던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라리마 러시아만 극단적인 적대를 유지하는 것도 무리수였다. 그렇게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상황에 소련 정부가 1972년 유엔에서 '''라리마 러시아 퇴출'''을 시도했다. 대만과 달리 라리마 러시아는 엄연한 서방국의 인정을 받는 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안건은 '''부결'''되었지만, 라리마 러시아 퇴출 시도는 시도는 군사적인 방법 말고도 소련의 라리마 견제책이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라리마 러시아 국민들에게 일깨워준 셈이 되었다. 라리마 러시아 정치계에서도 국명 변경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어졌고, 1973년 6월 14일 '''러시아발전당(->라리마발전당)'''의 중심으로 개헌이 이루어졌다. 국명은 러시아제국에서 '''라리마제국'''으로 변환이 이루어졌으며, 국기 또한 후의 공모를 통해 러시아제국기에서 '''라리마 삼색기'''로 바뀌었다. 1917년 러시아제국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철회되었다. 옛 러시아제국 영토의 영유권 주장도 사라졌다. 이에 대한 당장의 외교적 성과로 1973년 라리마제국은 유고슬라비아, 몽골, 폴란드와 수교를 이루어낸다. 당시 데탕트 시기였던지라 소련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되었다. 다만 국명 변경은 단지 국가의 이름을 바꾸는 것 뿐이며 새로운 국가가 되거나 정통성 계승 의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라리마 정부가 밝혔다. 또한 1978년 영국으로부터 '''셀레스틴'''을 받환받으면서 현재의 영토가 확립되었다. 여담으로 1971년 미메타이트의 한 광산에서 팩톨라이트[*Pectolite, 규산염 미정질 광물 ] 의 하늘색 변종이 발견되어 국가의 이름을 따 '''"라리마(Larimar)"'''라고 명명되었다.[* 현실에서는 1974년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발견되었다 ] 라리마는 또 1971년 OECD에 가입하였다.
 
 
 
===1980-1990년대===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후보 1.pn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997년 80년만에 적백내전의 종식을 알리는 두 국가정상  }}}''' ||
 
 
 
<big><big>1980년대</big></big>
 
1980년대는 라리마에게 비교적 조용한 시기였다. 1980년대에도 진보당인 '''라리마발전당'''이 집권해 나라를 이끌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로는 양국 간의 평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고위급 회담이 여러 차례 열렸다. 1983년에는 역사적 동지였던 '''중화민국'''과 연을 끊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다. 국내에서는 언제나 그랬듯 경제발전이 있었고 1987년에는 대규모 행정구역 개편을 이루어 현재의 지도를 이루었다.  1980년대 말에 들어서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단체로 무너지기 시작하자 라리마의 외교정책은 동구권 국가들에 집중되었다.[*1990년대 중반쯤 가게 되면 이미 라리마를 인정하지 않는 동구권 국가는 없었다. 동유럽정책은 라리마의 가장 성공적인 외교 정책 중 하나로 남게 된다. ]
 
 
 
<big><big>1990년대</big></big>
 
1991년 12월 26일, 한 시대를 장식했고 라리마를 몰아냈던 '''소비에트 연방''' 이 붕괴되었다. 이 시점에서 라리마는 이미 영토를 포기한 지 오래라 별다른 공격적인 반응은 없었고, 러시아를 제외한 소련 구성국들과 빠르게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 공화국과의 대화는 조금 더 시간이 소요됐다. 1993년, 1995년에 정상회담이 연이어 열렸고 각각 '''상트페테르부르크''', '''포스페이트'''에서 진행되었고 앞서 1991년에는 예카테린부르크의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의 시신들의 DNA를 확인할 때 당시 라리마 제국의 황제 블라디미르 3세의 자료가 활용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안장식에는 블라디미르 2세가 직접 찾아와 지켜보았다. 황실을 중심으로 한 양국 간의 교류를 통해 러시아 연방 공화국과 라리마 제국은 1997년 3차 정상회담에서 양측에 대한 국가인정과 함꼐 수교를 포함한 '''관계 정상화'''를 이루어냈다. 장장 80년이 흐른 이후 적백내전의 종결을 알린 것이다. 시간이 흘러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당시 라리마제국 또한 어느정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과 같이 국가부도에 비하면 매우 평화로운 수준이었다.
 
 
 
==2000년대 이후==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포스페이트의 오늘날.jpg|width=500]] ||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라리마 강과 포스페이트의 마천루의 야경, 오늘날  }}}''' ||
 
2000년이 되어 새천년이 시작하고 21세기가 밝았다. 옐친 재임 시절에 최고에 다다랐던 라리마-러시아 관계, '''양명관계'''[兩溟關係, 양쪽 해안의 관계라는 뜻으로 양안관계와 같은 의미이다. 명(溟)자는 현대 와서는 해안의 의미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 는 푸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한다. 푸틴 대통령은 대러시아스러운 정책을 펴긴 했지만 2008년까지는 꽤나 괜찮았는데,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러시아가 다시 팽창을 원한다는 것을 라리마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주었고 양명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서방시장에 의존도가 높았던 라리마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발발로 인해 극단적인 경제침체를 겪었지만 비교적 빠르게 회복해냈다.  2014년이 되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점령하고 투표를 통해 합병해버리자 라리마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편에 서서 러시아를 가장 강하게 규탄했다. 라리마는 러시아와 2014년을 기점으로 다시 사실상 '''적대관계''' 수준으로 변화하였다. 2014년을 기점으로 '''주라미군'''은 축소에서 증가 방향으로 바뀌었고 라리마군 또한 그랬다. 2020년 코로나 19가 전세계로 확산하면서 라리마제국도 마찬가지로 경제침체를 앓았지만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역을 진행했으며 백신을 가장 먼저 들여온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과의 관계는 2021년 '''후쿠시마 원전 방류 이슈''' 당시 살짝 냉각되었지만 금세 다시 좋아졌다. 2021년 라리마제국 황실과 정부는 백신 접종 완료율 81%인 희망적인 상황에서 '''러시아제국 300주년''' 을 기념하여 대규모 축제를 열였다.
 
 
 
 
 
== 각주 ==
 
<references />
 
 
 
[[분류:라리마 제국]]
 

2023년 10월 9일 (월) 10:5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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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이후 다시 재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