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역사

루스 카간국

루스 카간국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 중반까지 오늘날의 유럽 러시아지역에 존재했던 정체(政體)를 가리키는 말이다.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의 전신이며 현재의 러시아의 북부에 있는 국가 또는 도시 국가이다.

루시라고 불리는 자들과 노르드인(Northmen) 또는 바랑기아인이라고 불리는 스웨덴인들이 건국한 국가이다. 카간은 고대 투르크어로 왕이라는 뜻이다.

바이킹의 일파인 루스(Rus)족이 라도가 호수변에 건설한 요새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대략 바이킹 등의 북유럽인들과 현지 슬라브인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오늘날의 나라 이름인 러시아(rus+sia)도 루스족에서 유래했다. 이때쯤 남하했던 그 북유럽 노르만인들은 주로 교역에 목적을 두고 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은 현지인(슬라브인, 추드인, 크리비치인, 메레인, 벱스인)들에게 과도한 삥뜯기무리하게 공물을 받으려 해서 그들을 바다 너머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현지 부족들은 서로 간에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바랴기)을 찾아가 자기들 대신 통치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청하였다.(원초연대기에서 발췌.) 초기에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중심 도시로 했으며, 노브고로드 공국, 폴로츠크 공국, 체르니고프, 야로슬라블, 로스토프, 할리히-볼히니아 등의 여러 공국들이 성장하였다.

키예프 루스

가장 번영했던 도시인 키예프를 중심으로 러시아 최초의 나라가 생겼다. 현대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쪽은 소공국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황금의 고리) 아직 러시아 공국들 사이에서도 변방이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여러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며 대부분의 러시아를 영향권 하에 두었고 이곳의 지배자는 대공이라 불렀다. 정교회를 받아들인 블라디미르, 최초의 법전을 편찬한 야로슬라프 대공, 야로슬라프의 종손 야로슬라프 모노마흐 등 위대한 대공들의 황금시대가 10세기를 전후해서 100년 정도 이어졌다. 키예프는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농민은 농노 신분이 아닌 자유민 신분으로 민회에서 참정권까지 가졌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서유럽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4]. 예를 들어보자면 프랑스 국왕 앙리 1세 왕비였던 키예프 대공녀 안나(1024~1075)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프랑스의 집들은 음침하고, 성당은 초라하고, 풍습은 혐오스러운 야만적인 나라로 평가했을 정도였다. 프랑스가 그 당시 서유럽에서 그나마 좋은 편인데, 이런 평가를 받으니 다른 나라들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실제 역사상 대공녀 안나는 결혼 서약서에서 유창하게 서약서를 썼지만 그녀의 남편인 앙리 1세는 정작 쓸 줄 아는 글자가 X자 하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화 면에서도 앞서는 면을 보였는데 블라디미르가 통일된 종교를 수용하기 위해 기독교로 결정하고 신하들을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으로 두 그룹씩 보냈다.

신성 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가톨릭 미사를 보았지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정교회의 성찬예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자신들이 신계에 있었던 건지, 지상에 있었던 건지라고 그 감동을 그대로 보고했다. 이후 블라디미르는 정교회로 종교를 통일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진흥에도 힘을 썼다. 이후 대공으로 즉위한 야로슬라프는 루스카야 프라우다란 이름의 러시아 고대법전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키예프 러시아의 황금시대는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무역로 덕분에 가능했다. 지중해의 무역이 사라센 해적들에게 방해받은 탓에 흑해에서 드네프르 강을 타고 키예프 지역을 통해 발트 해로 둘러가는 무역이 성행했던 것. 아울러 블라디미르의 손녀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 왕, 또 한 명은 헝가리 왕, 셋째는 노르웨이 왕과 각각 결혼해 서유럽과 많은 연결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전후해서 사라센 해적들이 약해지고, 베네치아 등의 지중해 무역국가들이 성장해 직항로를 트게 되면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아시아 유목 민족인 플로프치족(혹은 쿠만족)이 스뱌토슬라프와 블라디미르가 쳐놓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1095년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키예프도 몰락한다. 이후의 공국들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상태였으므로 나라다운 나라라고는 노브고로드 공국, 블라디미르-수즈달, 할리히-볼히니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며 본격적으로 멸망하는 것은 후술할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서 시작되었다

타타르의 멍에

사실상 본격적으로 전환기에 들어선 것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서 시작되었다. 키예프 공국이 위치했던 드네프르 강 일대의 평원은 토질이 매우 비옥한 평야지대여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평야 지대 특성상 제대로 방비하지 못할 경우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다. 한마디로 키예프 공국의 위치는 양날의 검이었던 셈이고 몽골 제국은 키예프 공국이 제대로 방비할 역량이 부족했던 시점에서 침략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예프 공국을 위시한 수많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있어서는 불쏘시개나 다름없었다. 사준 사구라 불리는 8장군의 일원이던 제베와 수보타이가 돌아가던 중에 살짝 툭 치고 간 것만으로도 빈사상태에 빠졌고 제대로 갈아엎으며 지나가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대부분의 공국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운 좋게 침략을 면한(봄의 해빙기에 몰려왔던 몽골 기병들이 뻘투성이가 된 땅에 질려서 철수) 노브고로드와 그 외 살아남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역할로 전락했는데, 이들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상납금을 모아 바치는 역할을 하면서 모인 돈을 적당히 떼먹으면서 성장했다. 몽골인들은 직접 러시아를 관리하는 것보다 적당히 공물을 징수하다가 트집을 잡고 쳐들어가서 노예를 잡아오는 편을 선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키예프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주교좌를 옮기게 되면서 종교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5]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1480년 모스크바 공국군과 킵차크 칸국이 대치하다 그대로 전투없이 철군한 우그라강 전투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가 몽골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본다. 루테니아와 러시아 일대에서 몽골 세력의 위상은 14세기 초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으로 인하여 급속히 추락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1483년 이반 3세는 킵차크 칸국과 맺은 조공계약을 불태워 버리면서 전쟁을 걸었고,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이 모스크바를 도우라고 열변을 토하자 거의 모든 공국들이 서방의 십자군 비스무리한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리하여 싸움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면서, (그리고 말 안 듣는 공국들을 때려 잡으면서) 현재의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해방됐지만,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그 이름처럼 러시아에게 가혹했던 몽골의 지배로 인해 키예프 공국에서부터 예로부터 내려온 민회적 전통 등은 거의 다 사라졌다. 특히 세금을 체납하던 농노에 대한 무차별적인 체벌 같은 악습이 남았으며, 속령 러시아와 루테니아의 농노들은 몽골인들에게 노예로 잡혀가느니 차라리 농노로 사는게 났다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농노의 권리보장은 시대가 지날수록 퇴보했다. 이러한 몽골의 격렬한 파괴의 반작용으로 독재와 압제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경쟁자였던 노브고로드 공국은 민회의 권한이 강했는데 이반 3세가 이런 말과 함께 멸망시킨다.

나의 세습영지인 노보고라드에 민회의종 따윈 필요없다 , 오직 나만이 온나라를 지배할것이다

이반뇌제

이반 뇌제까지 이어지는 흐름동안 모스크바 러시아는 류리크 왕조와 함께 성장해왔으나 뇌제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기게 된다. 뇌제의 뒤를 이은 표도르와 그의 후계자이자 이반 뇌제의 아들이었던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표도르 순으로 죽으면서 류리크 가문에서 정식으로 이을 후계자가 아예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로마노프 황가

이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에는 자신을 짜르라 주장하는 이가 여러 명 등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범하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동란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동란시대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를 통해 로마노프 왕조를 열면서 끝나게 된다

표트르 대제

키예프 루시 당시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잘나갔던 러시아는, 이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초토화와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문화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 문화권인 반면 당시 발전하던 서유럽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일색이었던 것도 서유럽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제한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모스크바 러시아가 이반 3세와 4세를 시절 성장한 직후 일어난 동란시대로 러시아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큰 위기를 겪었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맞물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러시아는 이웃국가들에 비해 국가 발전이 상당히 미흡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로마노프 왕조(1613~1917)의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적극적인 서구화 및 북방전쟁의 승전으로 인한 영토확장으로 겨우 '열강클럽'에 끼어들면서 바뀌게 된다.

대러시아제국

덕분에 러시아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달아 병합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할 수 있었다. 군사 기술이 향상되자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정복과 진출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1773년과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고, 1783년에는 크림 칸국을 병합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공세를 시작해서 1792년에는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드네스트르 강에 이르렀다. 북으로는 1790년에 스웨덴을 격파하고 핀란드로 진출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활동으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프로이센도 영국도 아닌 러시아였던 셈이다.

러시아 제국 쇠퇴기

그러나 겉보기에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모습과는 달리 경제수준은 계속 몇 세기 뒤를 달렸고, 여기에 서유럽의 군대가 다시 적극적으로 변혁을 받아들이게 되자 러시아는 또다시 빠른 속도로 뒤떨어지게 되었다. 당대 최강 무능장교들의 집합이었던 크림 전쟁(1853~1856)에서도 한 수 위의 무능함을 자랑하면서 연합군에게 패하여 러시아의 후진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에 패배하면서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일본 1년 국가예산의 5배에 달하는 예산을 써가며 전쟁을 치른 탓에 국가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러시아는 장기전 치른다면 이길 수 있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의 국내 정치 혼란으로 전쟁에서 발을 뺐기에 정작 일본이 승전국임에도 별로 얻은 것은 없다고 하나, 그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실질적인 손익을 무시하고 당시에 만연한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 그래도 '백인 국가'인 러시아가 '황인 국가' 일본에 패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1차대전

제1차 세계대전(1914.7~1918.11) 당시의 러시아군은 막장인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는 비교적 잘 싸웠지만 정작 동맹국을 하드캐리한의 주력인 독일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밀어붙이고도 처참하게 관광을 다니며 밀리기에 바빴다. 인민들은 오랜 전쟁에 지치다 못해 분노해 2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러시아 임시정부)이 잠깐 생겼지만, 전쟁을 계속하는 바람에 오래가지는 못하였고 다시 10월 혁명이 터져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국가(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독일을 이길 수는 없었고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엄청난 영토를 내주는 등 사실상의 패배로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적백내전까지 무사히 넘어갔다고 하지만, 소련의 상태는 아직 메롱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나타난 정책이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이다. 사유재산을 일부 도입하면서 사람들에게 근로의식을 자극했고, 그 결과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농공업은 전시 이전의 수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사람들에게 이전보다는 나은 삶을 주었으나, 이는 아직 사람들의 소비량과 생산량의 차이가 문제가 불거질 정도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 문제점은 신경제정책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결부되어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에서 앞으로 소련 정책의 방향으로 거센 싸움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스탈린은 그동안 서기장으로서 가지고 있던 권력과 본인이 쌓아온 인맥으로 트로츠키 및 부하린을 몰락시켰으며, 제1차 5개년 공업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우리가 아는 중공업,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제1차 공업화 이후 제2,제3차 공업화 계획이 진행되며 우리가 아는 독소전을 견딜 공업력을 가진 것은 덤

냉전 시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세계 양대열강에 올라섰다. 이때, 당시의 소련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구권 전역을 영향하에 두고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산 진영의 우두머리였으며 우주개발 등 여러 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륙하였다. 이 시기만큼은 오래전부터 꿈꾸던 열강클럽의 1인자 자리에 가까운 위치였다. 1957년에는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으며 유인 달착륙 이전까지 우주 경쟁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선도하였고 세계의 절반을 휘어잡는 강대국으로 40년이나 군림한 점은 대단한 것.

그러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겉모습과는 달리 원자재에 국가수입의 상당부분을 의존하는 등 경제체제가 워낙에 빈약한 면도 있었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개혁적, 진보적 흐루쇼프 시대 이후, 18년 동안 이어진 반동적, 보수적 브레즈네프 시대에 경제가 정체되었고, 80년대 들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방비가 폭증하여 재정부담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석유가격이 81년 고점을 찍은 이후 폭락하면서 국가재정수입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더 침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까지 터지면서 소련의 경제는 파탄직전에까지 이르는 혼란속에, 개혁개방의 혼란속에 결국 옐친이 주도권을 잡으며 결국 원하든 원치않든 91년도에 공중분해되었다.

러시아 연방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구성국은 모두 독립했고, 소련의 왕초였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러시아 연방으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연방은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소련 해체와 급격한 시장경제 도입은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자산손실과 임금수준의 급격한 하락, 복지정책 감축으로 인한 사회안전망의 붕괴, 빈부격차 심화로 인한 양극화를 초래했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욕을 잃었다. 여기에 혼란한 정치 상황까지 겹치면서 결국 각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리고도 갚지 못해 모라토리움까지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과 국방기술력, 그리고 중공업이 발달한 덕에 각종 무기시장에 값싼 무기들을 대량 유통시키며 짭짤한 수익을 얻은데다 허허벌판이던 시베리아가 자원의 보고로서 각광을 받고, 유가 상승으로 크게 호황을 맞았으며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한 산유국이 되어 전세계 에너지 자원을 쥐락펴락 하고 있다. 덕분에 그동안 외국에 있던 채무를 대부분 처리했으며 오히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자국이 다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가 부도위기에 처하자 돈을 꿔주는 채권자로 격상되었다. 2000년 넘어 1인당 GNP가 만달러가 넘어가기 시작했으며 세계에서 국민당 백만장자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다르게 보면 그만큼 빈부격차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도 된다. 중국이 가장 빠른 속도로 백만장자가 늘고 있지만 현재 러시아 역시 백만장자 수의 증가율이 가장 높은축에 속하여 금방 따라잡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다시 부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소련 해체로 인해 축소된 영향력 회복에 골몰하고 있다. 과거에는 최전방이 수백 km 떨어진 동독이었지만 지금은 소련 시절 짓밟고 다니던 코앞의 발트 3국조차 NATO 가입국이니 러시아로서는 미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은 러시아가 미국의 러시아 영향력 축소 정책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것을 힘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더해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2014년에는 크림 위기와 돈바스 전쟁에 사실상 개입해 친서방 노선을 타는 우크라이나를 무력 압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