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자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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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елыйя республика
Republic of Belija , Belija Republic , 白國 , 벨리자 공화국
벨리자기.png 벨리자국장.png
국기 국장
국가벨리자인의 합창
도마루왕국의 위치.png
수도모스크바
최대 도시모스크바
정치
대통령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부총리
귀족원 의장
국가두마 의장
드미트리 아그레스트
미하일 미슈스틴
파벨 야프
뱌체슬라프 볼로딘
 
지리
면적17억 982만 5천㏊ (1위)
내수면 비율13%
시간대벨리자 공화국 표준시 (UTC+2 ~ +12)
인문
공용어벨리자어(사실상 러시아어)
인구
2019년 조사1억 4,593만 4,462명
인구 밀도8.4명/km2
경제
 • 전체4조 2,134억 달러
 • 일인당29,267달러
 • 전체1조 6,306억 달러
통화코로카 (BEC)
기타
ISO 3166-1BE, BEL
도메인.be, .би
국제 전화+7

개요

벨리자 공화국(벨리자어: белыйя империя, 영어: Belija Republic)은 아시아와 유럽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상징

국호

국기

국가

국화

국장

역사

공국 시대

전기

벨라이자 도마루를 대족장으로 하는 벨리자인들이 기존 키예프 루스가 세력화되기 이전 볼가강 유역에서 축출하고 벨리자인들이 볼가강에 벨라이자 도마루를 공작으로 하는 벨리자 공국을 건국하였다.

제1대 벨리자 공작을 칭한 벨라이자 1세는 토착인들인 러시아인과의 융합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볼가 강 유역 정복 전쟁을 개시했는데 904년부터 910년까지의 이 전쟁을 '볼가 전쟁'이라 한다. 볼가 전쟁 기간 동안 키예프 루스 잔당과 볼가강 유역을 완전히 정복하는데 성공한 벨라이자 1세는 추후 루스인 자객에게 사망한다.

벨라이자 1세 사후 벨리자 공국의 기틀을 닦은 것은 4대 벨리자공 벨리 1세였다. 벨리 1세는 벨리자 공국 수립에 도움을 준 4대 족장들의 후손을 귀족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벨리자 공국의 관료로 편입시켰으며 볼가강을 통해 운수업과 무역업을 육성시켰다. 한편 수공업 발달을 적극 지원했는데 수공업의 발달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 이시기에 형성된다. 벨리 1세는 내정에 주력한 군주로 앞서 말한 상공업 육성과 관제 개혁 등을 실시하다가 950년에 사망한다.

벨리 1세가 탄탄한 내정을 닦아놓자 그의 아들인 레카 1세는 965년에 군사 활동을 재개했다. 볼가 불가르를 벨리자 공령으로 복속시켰고 하자르 왕국 등을 정벌했다. 그러나 레카 1세는 990년에 남부 드네프르 강 유역 정벌에 나서다가 전사한다. 정복왕 레카 1세는 후계 지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사해버렸고 이는 곧 있을 남북전쟁의 서막을 예고했다.

남북전쟁

레카 1세 사후 그의 장남인 라호라 1세가 벨리자공으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우선 마저 드네프르 강 정벌을 마무리하고 드네프르를 벨리자 공령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가 드네프르 원정을 떠난 동안 그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레카 1세의 동생, 즉 벨리 1세의 차남인 레다가 수도의 4대 가문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레다는 정부를 장악하고 대립공작으로 자신의 아들, 레이를 허수아비로 추대한다. 라호라 1세는 레다가 세운 대립정부에 해산을 명령하지만 레다가 이를 무시하자 라호라 1세의 선방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라호라 1세는 폴타바 전투에서 대립정부군을 격파하고 곧이어 재상 블라디미르가 이끄는 군대가 쿠르스크에서 니콜라이 만토바 장군이 지휘하는 대립정부군을 무찌르면서 대립정부는 점차 전세에서 밀리기 시작하고 대립정부 내부에서도 레다의 권력 팽창을 반대하는 4대 가문과 레다의 권력 확대를 찬성하는 친위 파벌 간 갈등이 격렬해진다.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대립정부군은 대패하고 벨리자 공국은 다시 통일된다.

후기

남북전쟁 후 벨리자는 엄청난 변혁을 맞이한다. 기존 반란군 편에 선 상당수의 귀족들이 숙청되었고 그 공백을 공작에게 충성하는 관료집단들이 차지하면서 왕권이 대폭 강화된다. 그리고 레다계열의 왕족이 전멸하면서 자연스레 레카계열의 왕족이 도마루 왕조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면서 라호라 1세는 중앙정부의 권한 강화에 몰두한다. 지방 운수업을 위임받은 '리보라' 해체를 단행한 라호라 1세는 지방의 물류망은 모두 모스크바를 거쳐야한다는 규칙을 제정하는 한편(모스크바 조례) 지방세습영주들를 없애고 국왕이 임명한 행정관이 지방 사무를 관장케 하면서 라호라 1세의 치세에 벨리자 공국은 중앙집권국가로 등극한다.

라호라 1세 사후 즉위한 신임 벨리자공인 라하루아라는 동슬라브족 복속을 개시하여 서부로의 진출을 시작한다. 동슬라브족 복속 과정에서 발트족과 핀족 등도 라하루아라의 정복 활동 속에 벨리자 공국의 공령으로 편입되었고 공령이 늘어나면서 라하루아라는 총독을 공령에 파견하여 공령에 조금의 자치권을 부여한다. 각 공령에 자율권을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공령 지역에서 효율적인 행정 능력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라 공령 지역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공령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본토와 비슷해지면서 라하루아라의 의도와는 다르게 지방분권화가 시작된다. 겉으로는 들어나지 않았지만 공령은 점차 중앙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지역 운영이 가능한 수준까지 성장하게되고 라하루아라가 사망하고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벨라이자 4세가 즉위하고 벨라이자 4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타 황후의 섭정이 시작된다.

엘리자베타 황후는 외척가문 등용을 통해 자신의 가족들을 중앙정부의 핵심 요직에 앉히기 시작하고 중앙정부를 장악한다. 이에 반발한 관료집단이 집단으로 공령으로 좌천되는 '모스크바의 변'이 일어나는데 공령으로 좌천된 관료집단들은 반정부 감정을 가지게 되게 되고 점차 공령 정부를 장악해 나간다. 각 공령을 완전히 장악한 관료집단들이 단체로 반기를 들어 중앙정부를 타도하는 '8월 정변'이 일어나는데 8월 정변을 기점으로 공작 벨라이자 4세와 외척 가문은 처형되고 신임 행정부와 새 공위를 어느 왕족에게 줄지 격렬한 논쟁이 각 공령 간에 발생하였고 결국 각 공령이 서로 다른 중앙정부와 왕족을 공작으로 세우면서 벨리자 공국은 분열된다.

동란 시대

불가르VS플로츠크

북부의 노브고로드 공령이 내부 권력 암투로 진작에 플로츠크 공령으로 병합당하고 드네프르 공령이 전국 통일 대신 내정에 집중하면서 서부의 플로츠크 공령과 동부의 불가르 공령의 양자 구도가 형성된다. 불가르 공령은 일찍이 아바스 왕조와의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였고 플로츠크 공령은 유럽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확보해둔 상태였다. 이 양자간 전쟁은 '거인의 전쟁'이라 묘사되며 치열하게 치루어졌고 양측은 벨리자 공국의 수도인 모스크바 탈환을 수십차례 반복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전쟁은 양측의 국력에 엄청난 소모를 일으켰고 남부에서 내정에 집중하며 플로츠크와 불가르를 상회하는 경제력을 가지게 된 드네프르 공령이 나서기 시작한다.

통일 전역

드네프르 공령은 플로츠크가 유럽과 교역을, 불가르는 아바스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면 드네프르 공령은 남부 비잔티움 제국과 드네프르강 교역을 통해 막대한 재원과 경제력을 확보했다. 드네프르 공령의 3대 공작인 라호라 2세는 우선 플로츠크 공령 정벌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103년에는 불가르 공령 정벌을 개시한다. 1102년에 시작된 플로츠크 정벌은 1104년에 종료되었고 수도 플로츠크가 함락되자 플로츠크 공작 벨리 2세가 드네프르에 입조하면서 플로츠크 공령은 종말을 맞이하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불가르 공령도 마지막 공작인 벨라이자 5세가 자결하면서 1107년에 항복한다. 1108년까지 공령들의 잔당 세력을 토벌한 라호라 2세는 당년에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천도, 자신을 공작 중 공작인 대공으로 격상하면서 벨리자 대공국이 시작된다.

대공국 시대

전기

라호라 2세는 콤니노스 왕조 치하의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벨리자 대공'의 세습작위를 공식적으로 하사받으면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드네프르 공령과 교역하면서 드네프르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했었고 드네프르가 동란 시대의 승리자가 되자 비잔티움 제국은 벨리자 대공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시기에 본격적으로 비잔티움의 문화와 동방정교가 벨리자 대공국에 보급된다.

라호라 2세 이후 벨리자 대공국은 드네프르강과 볼가강에서의 교역과 유럽, 아바스 왕조와의 무역을 진행하며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룩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성장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와 벨리자인들의 토착 문화가 융합하여 벨리자 대공국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몽골의 침략

벨리자 대공국은 1200년대 중반까지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사이에 아바스 왕조와 비잔티움 제국이 쇠퇴하긴 했지만 벨리자 대공 벨라이자 6세는 동유럽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켜 이를 극복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이 쇠퇴하면서 역내의 비잔티움에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고 벨리자 대공국은 점차 비잔티움과는 별개의 영향권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 것은 1223년에 즉위한 벨라이자 7세의 치세로 벨라이자 7세는 처음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대공위 세습을 허가받지 않고 즉위한 벨리자 대공이었다. 그러나 벨라이자 7세 아니 벨리자 대공국은 여태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이들의 침공을 받는다.

사실 벨리자 대공국은 아랍과의 교역을 통해 몽골이 점차 서쪽으로 진출하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고 성곽 재정비와 상비군 소집령 발령, 해자 건설과 더불어 국경에 군사 사무를 즉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행정관들을 파견하여 몽골의 침략을 대비하였다. 근데 몽골은 벨리자 대공국이 생각한 것보다 더 강력한 나라였다. 몽골군은 수부타이 장군의 지휘 하에 벨리자 대공국의 타타르지아(現 타타르스탄)을 점령했고 곧이어 리잔까지 점령한 다음 모스크바로 진군을 시작했다. 벨라이자 7세는 모집한 상비군과 지방으로 파견했던 행정관들이 보낸 군사들을 바탕으로 몽골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상대는 우수한 전략가인 수부타이와 그의 지휘를 받는 몽골군이었고 벨라이자 7세는 전사, 벨리자 대공국은 국가 존속의 위기에 놓인다. 그의 전사 후 관료회의와 지방행정관회의가 노브고로드에서 개최되었고 위대한 왕, 벨라이자 7세의 장남인 레카 4세를 국왕에 추대한다. 레카 4세는 전국에 파발을 띄워 뒤늦게나마 전시체제를 선포한 다음 '전농노해방령'을 발포하여 농노를 병사로 충당시킨다. 몽골군과 대적할 준비를 마쳤다 판단한 레카 4세는 아직 몽골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행정관령에 군사 소집을 명령하고 몽골군이 점령한 드네프르강 및 볼가강 유역 수복을 개시하는데 1243년 야로슬라브 전투를 시작으로 레카 4세는 금장 한국과 전쟁을 치룬 끝에 금장 한국의 봉신국이 되는 조건과 벨리자 대공국은 드네프르강 유역과 플로츠크 지방을 금장 한국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금장 한국과 정전을 맺는다.

후기

금장 한국과 평화를 맺은 벨리자 대공국은 망조가 들기 시작한다. 금장 한국의 지원을 받은 반정부 세력이 지방의 행정관과 관료들을 현혹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지방의 관료제 사회는 붕괴되었다. 한편 중앙정부는 레카 4세 이후로는 암군만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벨라이자 8세 치하에서 몇몇 명문가들이 귀족가문으로 득세하여 약 300년 동안 사라졌던 귀족 계급이 재등장했다. 전농노해방령은 폐지되었고 농노 출신이었던 이들은 도로 농노가 되어 지대를 납부하기 시작한다. 갈수록 구매력이 높은 평민 계급은 축소됐으며 구매력이 낮은 농노 계급이 그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관료집단들은 지방귀족과 결탁하여 폭정을 일삼았고 중앙정부마저 대공들의 단명으로 왕권이 급격히 추락하면서 이대로 벨리자 대공국은 멸망하는가 싶었다.

왕정 선포

벨리자 대공국이 쇠퇴 속에 허덕이던 민중은 결국 봉기들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전국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면서 전국을 혼란스러워졌고 1350년대에는 흑사병까지 창궐하여 사회가 붕괴되기에 이른다. 지배계급에 반감을 가지는 이들이 속출했고 민란들은 더욱 격렬히 일어났다. 주요 민란으로는 1358년에 일어난 알렉산드르 보프의 '자리크의 난'과 1360년에 일어난 드네프르 농민 전쟁 등이 있다. 이 상황에서 금장 한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고 금장 한국과 결탁한 궁정 귀족들이 이전보다 더 큰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1385년에 즉위한 이카벨 2세는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외척가문인 란제바르흐 가문과 협력하여 란제바르흐 가문의 인사들을 중앙고위직에 기용하였고 그리고리 스테판 란제바르흐를 재상에 등용했다. 그리고리 스테판 란제바르흐는 서기국을 장악하여 금장 한국과 주고 받는 서한을 조작하여 궁정귀족과 금장 한국 간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한편 이전부터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궁정귀족 간 분열을 유도한다. 궁정귀족 입장에서 란제바르흐 가문과 왕실은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란제바르흐 가문과 왕실 입장에서는 아주 유리한 판이 나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궁정귀족이 서로 권력다툼으로 약해진 사이, 란제바르흐 가문과 왕실은 친위쿠데타를 결행했고(4월의 졍변) 여기서 승리한 이카벨 2세는 왕권 재정비를 목적으로 재상 스테판 란제바르흐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된다.

왕국 시대

전기

이카벨 2세는 스테판 란제바르흐의 보좌 하에 여러 분야에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행정 개혁을 결행하여 지방 관료 조직을 재건했고 강력한 관료제를 법률 체계에 삽입하여 견고한 국가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지방귀족들을 향한 대숙청을 감행해서 지방 통제력을 강화, 중앙집권국가로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윽고 재정 개혁과 사법 개혁, 군제 개혁, 종교 개혁 등의 개혁들을 추진하며 이카벨 2세의 치세 말기에 벨리자 왕국은 국가로 재도약하는데 성공한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라이타하스 1세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정복 전쟁을 개시, 동부의 카잔 한국 합병을 시작으로 북부에서 개기고 있던 궁정귀족들의 후예인 노브고로드 공국을 박살내는 한편 북방 진출을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자 라이타하스 1세의 후계인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와 혼인하고 자신을 동로마 제국 황제이 계승자. 동방정교회의 수호자로 격상시킨다. 이로서 벨리자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성을 갖게 된다. 허나 이에 반발한 금장 한국이 벨리자 왕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지만 보로네슈에서 벨리자 왕국의 명장, 타마쇼프 장군에게 대패하면서 벨리자 왕국은 그동안 금장 한국과의 예속 관계 청산을 선포한다. 이후 리타리아 1세 치세에 리투아니아 원정을 실시하여 리투아니아로부터 동유럽 일부 영토를 획득하기도 하였고 1551년에는 정복왕 라와디 1세의 지휘 하에 아스트라한 한국과 시비르 칸국을 정벌하여 1552년에 완전 복속시켰다. 1558년에는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서부 리보니아를 폴란드, 스웨덴 등에게 뺏겨버리는 치욕을 경험했으나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동부로의 팽창에 주력하고 1570년대 말까지 꾸준히 동부로의 영토 확장을 이어가며 우랄 산맥까지 벨리자 왕국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윽고 1586년에는 샤이반 왕조 정벌을 단행하였으며 1594년 제2차정벌에서 완전히 샤이반 왕령을 복속시킨다.

1613년에 즉위한 하야비 1세가 아들 없이 일찍 죽게 되버린다. 이에 하야비 1세의 이모부이자 자신의 동생인(..) 리타리아에게 왕위가 돌아간다. 리타리아 2세는 명문가인 외척가문을 등에 업고 그동안 여러번의 전쟁으로 구멍이 들어나던 벨리자 왕국의 국력에 대한 대대적인 증강에 나선다. 상공업의 발전을 지원하는 한편 동로마의 문화와 유럽의 문화에 융합을 장려했다. 이러한 조치는 유럽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려는 밑물 작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리타리아 2세는 본격적으로 시베리아와 극동으로의 팽창 정책을 개시했다. 벨리자는 그렇게 모피 산업 확장을 목적으로 실시된 시베리아 원정을 통하여 오늘날 우랄 이동(以東) 영토를 확보한다. 리타리아 2세 사후 도마루 왕조는 리타리아 2세의 외척가문의 피해가 섞이면서 정확히는 '도마루-아나코프 왕조'로 불리우게 된다. 이로서 드네프르 공령파의 승리 후 도마루 왕조의 대통을 계승했던 드네프르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후기

라이타하스 2세가 즉위하고 라이타하스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전쟁을 펼쳐 드네프르 강 유역을 수복한다. 라이타하스 2세는 평소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양 학문과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 생애에 서양에 다녀오려 했으나 건강 악화로 이를 이루지 못하고 대신 아들인 라이를 서양으로 유학을 보낸다. 이때 라이는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배우며 벨리자의 서구화 정책을 고민하게 된다.

라이타하스 2세가 선천적으로 안 좋았던 건강에 만성 폐렴까지 얹어 살게 되고 드디어(?) 1682년에 승하하고 라이가 왕위를 계승한다. 라이 1세는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으며 지방자치를 실시하여 젬스트보와 도시연합을 설치하는 한편 전농노해방령을 재공포하여 옛 사회의 흔적 청산을 개시했다. 한편으로는 농노를 자유민으로 편입시켜 세수를 늘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라이 1세는 서구화를 추진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그곳으로 천도하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서구의 문물을 벨리자에 전파하였다. 라이 1세의 서구화와 함께 선진 운송 수단이 도입됐고 영토가 크고 아름다웠던 벨리자에 능력이 좋은 운송 수단이 도입되자 교역량은 껑충 되었으며 이는 상공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라이 1세의 서구화 정책은 벨리자에 국력이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향후 발발한 대북방전쟁에서 벨리자가 스웨덴을 꺾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이후 발발한 대북방전쟁은 라이 1세의 지휘 하 벨리자 왕국이 승리했고 라이 1세의 벨리자 왕국은 유럽의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라이 1세는 자신을 임페라토르, 즉 황제로 칭하였는데 그의 사후 본격적으로 벨리자 왕국은 벨리자 제국으로 불리게 된다.

전제 제정 시대

전기

벨리자 제국에 전제 제정이 수립되고 벨리자 제국은 유럽으로의 팽창 정책을 개시했다. 벨리나 여제, 예카테리나 여제로 대표되는 여제 시대에 벨리자 제국은 유럽에서의 영향력 확보와 국력 증진에 성공했으며 민생이 안정되어 서민 경제가 성장했다. 한편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사회 간접 자본의 증가와 기반시설 확충 등이 이루어졌고 볼가강과 드네프르 강 등으로 대표되는 수로 무역이 활발해졌다. 교역량은 매년 최고 경신치를 갱신하기도 했으며 폴란드 분할을 통해 서부로의 영토 팽창을 이룩한다. 그러나 라와디 3세 치세 시절 나폴레옹 전쟁이 닥쳐오면서 벨리자 제국은 피해를 입게 되며 군주인 라와디 3세와 명장들도 꽤 고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심한 여파가 일기도 하였으며 이는 후대인 벨리 10세에게로 전승되어 크림 전쟁 때 나폴레옹 전쟁의 후유증,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 등의 앙금이 터져버려 전쟁에서 패배한다. 이러한 벨리자의 상황을 알고 있던 벨리 10세의 제위를 계승한 루에다 1세는 '루에 개혁'을 실시하여 국가두마를 설치하고 양원제 형식의 의회 정치를 시행했으며 재상을 수상으로 교체하고 국가두마에서 지지하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훗날 의원내각제 헌법에 투영되었다. 그는 러시아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한편 노동자의 대우에도 신경을 써서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층에게 갈려나가는 일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그는 그의 개혁에 반대했던 귀족들에게 암살당하게 되고 아들인 히라이는 귀족 견제책을 섞어가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차츰 제3차 도마루 왕조가 되면서 형성되가던 귀족들은 관료집단들마저 집어삼킨 상태였기에 히라이는 귀족들로 구성되는 귀족원의 눈치를 봐야 했다.

후기

루에다 2세는 그레이트 게임에서 영국에게 패배하고 동양에서는 벨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다. 한편 지속되는 전쟁과 악화되는 노동 환경에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대대적인 혁명에는 군인계급마저 참가하게 되었고 결국 루에다 2세는 퇴위, 입헌군주제와 귀족 특권 폐지, 의회권한강화 등을 명시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게 된다(4월의 혁명).

입헌 제정 시대

전기

왕실 내에서 개혁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망명 생활을 지내던 벨라이자 11세가 귀국하여 혁명 세력으로부터 벨리자의 대관을 수여받으며 공식적인 벨리자 제국의 황제에 즉위한다. 벨라이자 11세의 치세에 입헌군주정은 완전히 자리 잡고 의회 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한편 젬스트보와 도시 연합이 공식적인 벨리자의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로 지정된다. 벨라이자 11세 집권 초반에는 입헌민주당과 사회혁명당의 연립정부가 신임을 받았으나 1918년 독일과의 휴전 후 패전 책임으로 불신임을 얻어맞아 총사퇴한다. 직후 인민당과 입헌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국민민주당이 연정을 이루지만 전후 경제 복구에 실패하여 불신임을 얻어맞아버리는 바람에 최종적으로 우파인 국가당과 입헌연합이 정권을 잡는다. 국가당 총리인 조제프 마샬의 주도 하에 벨리자는 경제 복구에 성공하지만 대공황이 닥쳐오자 보이지 않는 손을 운운거리던 우파 연정은 날라가고 정부 개입을 주장한 입헌민주당-사회혁명당 연정이 재구성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벨리자는 경제 회복을 하는 듯 했으나 나치의 침공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며 전쟁 과정에서 벨리자는 막대한 피해 끝에 나치를 축출한다.

후기

나치를 축출하여 1945년에 종전을 이룩한 벨리자 제국은 입헌민주당-사회혁명당 연정의 지도 하에 점차 국토 재건에 착수하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 1950년대 중후반에 이르어 완전히 국가 재건에 성공하고 본격적인 경제 성장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입헌민주당-사회혁명당 연정은 과도한 사회 복지 개혁을 꺼내들었다가 경제가 침체되버리면서 나가리되고 도로 국민민주당과 인민당이 정권을 차지한다. 이들은 국가당, 입헌연합, 입헌민주당, 사회혁명당과 대연정을 구성하여 전 정권이 저지른 실책들을 조정하며 경제 성장을 이룩하지만 1990년대에 그 성장에도 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경제 불황에 지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중앙아시아, 카프카스에 혼란이 발생하여 독립 운동들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벨리자 제국은 이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끝내 무용지물이었고 국민 투표 형식으로 독립 여부를 확인하는 발악을 하지만 결과는 독립파의 압도적 승리였으며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이 독립해 떨어져 나간다. 곡창 지대인 드네프르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벨리자에는 한동안 식량난이 닥쳐오기도 했으며 구성국들의 독립 여파는 벨리자의 외교적 권위의 쇠퇴를 불러왔다. 이시기에 벨리자는 극도의 국력 성장에 정체를 맞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체첸 등에서도 독립 요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현대

1999년에 집권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국가당은 입헌연합과 합당하여 '입헌국민당'을 창당하였고 거대정부를 출범시켰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내각수상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법률을 통과시켜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지방 젬스트보와 도시 연합의 자치권을 축소시키는 한편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 벨리자 주의'를 주창한다. 한편 체첸에서 일어난 체첸 독립 전쟁을 진압하여 벨리자 내에서 강력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구축한 블라디미르 푸틴은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벨리자의 경제 개발을 추진하는 한편 여러 개혁을 추진하여 벨리자를 경제 불황의 늪에서 건져 낸다. 이런 과정 속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현재인 2020년까지 집권하게 되고 독일식 의원내각제 형태의 벨리제 정치 구조는 왜 이렇게 푸틴이 장기 집권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군주위 계보

☆ 공국 시대
。제1차 도마루 왕조
1대 벨라이자 1세: 900~915
2대 벨라이자 2세: 915~920
3대 벨라이자 3세: 920~934
4대 벨리 1세: 934~950
5대 레카 1세: 950~990
6대 라호라 1세: 990~1013
7대 라하루아라: 1013~1040
8대 벨라이자 4세: 1040~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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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 대립정부 역대 공작
1대 레이: 990~994


☆ 동란 시대
。드네프르 공령 역대 공작:
1대 레카 2세: 1056~1063
2대 레카 3세: 1063~1100
3대 라호라 2세: 1100~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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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르 공령 역대 공작:
1대 벨리 2세(불가르): 1056~1084
2대 벨라이자 5세(불가르): 108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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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츠크 공령 역대 공작:
1대 벨루아: 1084~1099
2대 벨리 2세(플로츠크): 109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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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고로드 공령 역대 공작:
1대 샤잔르: 1056~1067


☆ 대공국 시대
。제2차 도마루 왕조(드네프르 왕조)
9대 라호라 2세: 1100~1134
10대 라호라 3세: 1134~1156
11대 벨리 2세: 1156~1179
12대 벨라이자 5세: 1179~1204
13대 벨라이자 6세: 1204~1223
14대 벨라이자 7세: 1223~1236
15대 레카 4세: 1236~1245
16대 벨리 3세: 1245~1260
17대 벨리 4세: 1260~1289
18대 벨리 5세: 1289~1313
19대 벨라이자 8세: 1313~1320
20대 이카벨 1세: 1320~1324
21대 벨리 6세: 1324~1329
22대 벨리 7세: 1329~1338
23대 벨라이자 9세: 1338~1344
24대 벨라이자 10세: 1344~1349
25대 라호라 4세: 1349~1355
26대 라호라 5세: 1355~1361
27대 레카 5세: 1361~1363
28대 벨리 8세: 1363~1385


☆ 왕국 시대
。제2차 도마루 왕조(드네프르 왕조)
29대 이카벨 2세: 1385~1449
30대 라이타하스 1세: 1449~1486
31대 리타리아 1세: 1486~1516
32대 라디: 1516~1533
33대 라와디 1세: 1533~1579
34대 벨리 9세: 1579~1580
35대 하야비 1세: 1580~1613
36대 리타리아 2세: 1613~1654
37대 라이타하스 2세: 1654~1682
。제3차 도마루 왕조(도마루-아나코프 왕조)
37대 라이타하스 2세: 1654~1682
38대 라이 1세: 1682~1725


☆ 전제 제정 시대
。제3차 도마루 왕조(도마루-아나코프 왕조)
39대 라이 2세: 1725~1741
40대 벨리나: 1741~1762
41대 하야비 2세: 1762~1762
42대 예카테리나: 1762~1796
43대 라와디 2세: 1796~1801
44대 라와디 3세: 1801~1825
45대 벨리 10세: 1825~1855
46대 루에다 1세: 1855~1881
47대 히라이: 1881~1894
48대 루에다 2세: 1894~1904


☆ 입헌 제정 시대
。제3차 도마루 왕조(도마루-아나코프 왕조)
49대 벨라이자 11세: 1904~1936
50대 벨라이자 12세: 1936~1954
51대 벨리 11세: 1954~1980
52대 루에다 3세: 1980~2002


☆현대
。제3차 도마루 왕조(도마루-아나코프 왕조)
52대 루에다 3세: 1980~2002
53대 라호라 6세: 2002~2018
54대 레카토치아: 2018~현재

자연환경

영토

지형

생태

자원

인문환경

인구

언어

종교

교통

행정구역

정치

정당

행정

국제관계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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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문화

군사

단위

법정 연호

시간대

관련 문서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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