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가국론을 바탕으로하여 저술한 글
원래는 메모장에 원본을 종이책처럼 문단을 첫음절 띄어쓰기로 분리를 해놓았는데 위키 문법때문에 적용이 안되는 것 같네요. 제가 적용해놓은 문법적 구조가 전혀 적용되지 아니하여 읽는데에 상당히 부담이 가실겁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 서문
이 글은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ㅡ "왜 카국계는 스스로를 소진시키는가?" 이 물음이 처음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은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카국계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 안에서 살아온 내가 느낀 막연하지만 지속적인 불편감에서 비롯되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감각. 처방이 오히려 병을 키우고 있다는 느낌. 공동체를 살리겠다는 사람들이 결국 공동체를 죽이고 있다는 역설적인 광경.
카카오톡 가상국가계(이하 카국계)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오랜 성찰의 산물이다. 나는 이 공동체가 현재 겪고 있는 위기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카국계의 병폐는 어떤 제도의 결함이나 특정 집단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별이성(分別理性)이 자신의 권역을 넘어 타당하지 않은 영역에까지 확장되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분별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별하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분명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식론적 역량이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분별이 불가피하다. 마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여주었듯이, 우리의 인식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어떤 틀, 어떤 구조를 전제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판단도 세계를 의미 있게 파악하기 위해 분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분별이성이 특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원에서는 분별이성이 얼마든지 타당하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인과관계를 파악하며, 일반적인 원칙들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분별이성은 필수불가결한 도구다. 또한 사회의 구조를 분석하고, 제도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도 분별이성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인간과 공동체를 대상으로 할 때, 특히 그것이 개별 인간을 판단하고 분류하는 수단으로 작동할 때, 분별이성은 자신의 정당한 영역을 벗어나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이때 분별은 더 이상 이해의 도구가 아니라 배제의 도구가 되고, 인식의 수단이 아니라 폭력의 수단이 되어 버린다. 나는 이것을 분별이성의 자기기만(自己欺罔)이라 부르고 싶다. 분별이성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믿으면서, 사실은 특정한 관점과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카국계가 직면한 위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신규 유저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정치 컨텐츠가 썩어가고 있다. 친인류와 반인류의 패권 전쟁이 심화되고 있다. 모의전과 역극 같은 다른 컨텐츠가 가국을 대체해 가고 있다. 이 모든 현상들이 겹겹이 축적되면서 카국계는 점차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문제의 뒤에는 공통된 근원이 있다. 바로 분별이성의 오용(誤用)이다. 신규 유저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을 조롱하고 배제하는 것, 그것은 분별이성이 "저 사람은 카국을 모른다", "저 사람은 수준이 낮다",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타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친인류와 반인류가 대립하면서 신규 유입자들을 편가르기로 강압하는 것, 그것도 분별이성이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썩어가는 것, 그것은 분별이성이 규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굳혀버렸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같은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나는 도가(道家)의 철학과 칸트 철학의 비판 정신을 참고했다. 칸트가 인식이성의 한계를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듯이, 나는 여기서 분별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도가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태도, 즉 강제와 인위를 내려놓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카국계에 적용하려 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분별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물이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별이성이 적절한 영역과 적절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할 때 공동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특히 나는 이 책을 카국계의 구성원이 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그래서 이 공동체의 '규칙'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신규 유저는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 "반인류는 이런 사람들이다", "가국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암묵적 규칙들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당연함'을 의심하라고 촉구한다. 그 당연함이 정말로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지 습관 속에서 굳어진 것인지를 묻도록 한다. 또한 나는 이 책을 운영자들을 위해서도 쓴다. 운영자로서 방을 관리하고 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노력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운영자가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착각할 때,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운영자의 분별이성도 특정한 관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운영의 시작이 된다고 나는 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나도 과거에 다른 사람들을 분별 속에서 판단했고, 내 판단이 절대적이라고 착각했으며, 그것을 정당하다고 믿었다. 나는 신규 유저들을 "수준이 낮다"고 판단했고, 반인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했으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이 옳은 방식이라고 믿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분별이성에 중독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깨달은 결과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하나의 고백이자 성찰의 기록이기도 하다.
제1부 | 분별이성의 기능과 그 한계
제1장 | 분별이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세계를 대면했을 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정신의 작용은 구분이다.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특정한 현상과 다른 현상을 구별하는 것, 이것이 분별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다. 신생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과 세계를 분리하는 경험을 한다. 어머니의 가슴과 세계의 경계를 느끼고, 자신의 손과 다른 물체의 차이를 인식한다. 이것은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 체계 자체에 내재된 기본적인 작용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분별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정신은 점차 더욱 정교한 분별을 수행해 나간다. 개별적인 개들을 보고 그것들을 '개'라는 범주로 묶어낸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보고 그것들의 공통점을 추출하여 '동물'이라는 개념을 형성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개념 형성의 과정이며, 이것 없이는 추상적 사유가 불가능하다. 분별이성은 이와 같이 현상의 다양성을 개념의 일관성으로 통일시키는 능력이다. 나아가, 분별이성은 단순한 개념 형성을 넘어 판단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어떤 행동의 결과를 예측한다. 어떤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평가한다. 이 모든 과정이 분별이성의 작업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행동을 관찰했을 때, 우리는 그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론하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의 의도나 성격에 대해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 없이 우리는 타인과 상호작용할 수 없다. 더욱이, 분별이성은 가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선(善)하다 하고, 다른 행동을 악(惡)하다고 판단한다. 어떤 정책은 합리적이라 하고, 어떤 정책은 불합리하다고 본다. 어떤 주장은 논리적이라 판단하고, 다른 주장은 모순적이라고 평가한다. 어떤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 모든 것들이 분별이성의 결과다.
이렇게 보면, 분별이성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분별 없이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인간과 의사소통할 수 없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없다. 마치 빛이 없으면 색깔을 볼 수 없고, 귀가 없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듯이, 분별이 없으면 의미 있는 인식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분별이성이 항상 타당한가? 모든 영역에서 분별이성이 우리에게 신뢰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는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여주었듯이, 인식이성도 자신의 한계가 있다. 우리의 인식은 현상의 영역에서만 타당하며, 물자체(物自體)의 영역에까지 확장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별이성도 자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분별이성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은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다. 물리학의 법칙은 명확하고 일관되며, 중력 법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실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다. 논리학의 규칙도 명확하다. 어떤 주장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논리의 규칙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영역에서 분별이성은 매우 신뢰할 수 있는 도구다.
하지만 인간사(人間事)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인간의 행동, 인간의 마음, 인간의 의도, 이 모든 것들을 분별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의 행동을 관찰했을 때, 우리가 그 행동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는가? 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또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분별이성이 이러한 판단들을 내리려고 할 때,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타당한가? 나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을 하고자 한다. 행동(行動)과 사람(人間)을 구분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분별이성의 타당한 영역이다. 우리는 "이 행동은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 "이 행동은 약속을 위반한다", "이 행동은 공동체의 규칙을 어긴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인 기준에 기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을 한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것,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신규 유저가 가국의 기본적인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자. 분별이성은 이 행동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규칙을 어긴 행동이다." 이러한 판단은 타당하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가서 "저 사람은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카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우리 공동체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판단을 내린다면, 그때부터 분별이성은 자신의 정당한 영역을 벗어난다. 왜인가? 왜냐하면 한 번의 행동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규 유저가 가국의 예절을 모른 것은 그 사람의 결함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이 아직 이 공간에 충분히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의 반영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는 서투르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는 규칙을 모른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분별이성이 작동할 때, 그것은 이 '당연함'을 무시한다. 분별이성은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만 보고, "왜 규칙을 어겼는가"를 묻지 않는다. 분별이성은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는 판단만 내리고, "모든 사람이 처음에는 다르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분별이성은 현상만 본다. 그것은 한 번의 행동이라는 현상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그 사람의 본질을 추론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한 번의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이고, 학습하는 존재이며, 성장하는 존재다.
이것이 분별이성의 첫 번째 한계다. 분별이성은 특정한 현상으로부터 일반적인 판단을 도출한다. 그리고 그 일반적인 판단을 마치 영원히 타당한 것처럼 취급한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 과거의 행동이 현재의 그 사람을 완전히 규정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행동이 미래의 그 사람을 완전히 규정하지도 않는다. 분별이성의 두 번째 한계는 그것이 차이(差異)룰 만난다는 것이다. 분별이성이 타당하려면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려면, 그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분별이성은 그 차이를 즉시 가치 판단으로 전환한다. "다르다"는 것이 "열등하다"는 것으로 변환된다. "다르다"는 것이 "배척해야 한다"는 것으로 변환된다. 이것을 우리는 더 명확히 볼 수 있는가. 세계의 모든 문화, 모든 전통, 모든 가치관이 같은가? 절대 아니다. 세계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함 자체가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분별이성이 작동할 때, 그 다양함은 위협이 된다. 분별이성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즉시 "이해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배척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변환한다.
카국계에서 이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친인류와 반인류의 대립이다. 친인류는 "우리의 가치관이 옳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 판단은 분별이성에 기반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판단은 분별이성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판단이 옳고 그름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저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다", "저 사람들은 우리와 공존할 수 없다", "저 사람들은 배척해야 한다"는 판단이 도출된다. 이것이 바로 분별이성이 자신의 정당한 영역을 넘어서는 지점이다.
분별이성의 세 번째 한계는 그것이 자신을 절대시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이성의 자기기만'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이성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우리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분별이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것이 옳다"고 판단할 때, 그것이 단지 우리의 관점에 기반한 판단이라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판단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극도로 위험해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떤 기준에 따라 신규 유저를 판단했다. "저 사람은 카국을 모른다", "저 사람은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판단은 특정한 기준에 기반하고 있다.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나는 카국을 오래 했으므로 알고 있다", "나의 이해가 옳은 이해다"는 암묵적인 가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 자체가 타당한가? 반문해 보자. 카국을 오래 했다는 것이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나의 이해가 유일한 올바른 이해인가? 다른 방식의 이해는 불가능한가? 이 질문들에 대해 명확하게 답할 수 없다면, 분별이성이 내린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특정한 관점에서의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다. 그런데 분별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그 주관적인 판단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이것이 분별이성의 가장 위험한 작동 방식이다.
정리하자면, 분별이성은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식,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논리적 타당성의 평가 등의 영역에서는 매우 유용하고 타당한 도구다. 하지만 인간 자체를 판단하고,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며,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영역으로 확장될 때, 그리고 더욱이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착각하면서 주관적 판단을 절대화할 때, 분별이성은 자신의 정당한 영역을 벗어나 폭력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제2장 | 분별이성이 인간을 대할 때의 오류
앞의 장에서 우리는 분별이성의 기본적인 성격과 그것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한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더욱 구체적으로, 분별이성이 인간을 판단하고 분류할 때 어떤 종류의 오류에 빠지는지를 살펴보자. 이것은 순수히 이론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카국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분별이성이 인간을 대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인간을 어떤 범주(範疇)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저 사람은 신규 유저다", "저 사람은 반인류다", "저 사람은 기존 구성원이다" 따위의 범주 설정이다. 이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과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본적인 정보가 필요하고, 그 정보는 필연적으로 일반화(一般化)된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범주가 설정되는 순간, 범주 내의 개별 인간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규 유저"라는 범주를 보고, "신규 유저의 일반적 특성"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개별 인간을, 그 인간의 고유한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채, 단순히 "신규 유저"라는 범주의 사례로만 대한다. 이것을 우리는 환원(還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을 어떤 범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철학에서 환원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현상을 더 단순한 요소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물을 수소와 산소로 환원하는 것, 생명 현상을 화학 반응으로 환원하는 것, 이것은 환원이다. 환원 자체는 과학적 방법의 일부다. 복잡한 것을 더 단순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어떤 범주로 환원시키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단순히 "신규 유저"도 아니고, "기존 유저"도 아니다. 인간은 이 모든 범주를 초과한다. 어떤 신규 유저도 그것이 단순히 신규 유저일 뿐이 아니라, 그 이상의 복잡성을 가진 개별 인간이다. 그 사람은 현실에서는 회사원일 수도 있고, 학생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경험, 자신의 고유한 문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분별이성이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신규 유저"라는 단 하나의 범주로 환원시킬 때,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폭력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이러한 환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가치 판단이 자동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신규 유저"라는 범주가 설정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설명적 분류가 아니라 암묵적인 가치 판단을 포함한다. 왜인가? 왜냐하면 카국계에서 "신규 유저"라는 범주는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규 유저는 "카국을 모르는 사람", "규칙을 모르는 사람",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표현된다. 이 표현들이 중립적인가? 절대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부정적인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범주의 낙인화(烙印化)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범주가 설정되는 순간, 그 범주는 사회적 낙인이 되어버린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이 말했듯이, 낙인이란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표시를 의미한다. 한 사람이 "신규 유저"라는 낙인이 찍혀버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개별 인간으로 대우받지 않는다. 그 사람은 "신규 유저"라는 범주의 전형적인 특성을 가진 인간으로 간주되고, 그에 따라 대우받는다. 이러한 낙인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보려면, 우리가 어떤 신규 유저를 마주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신규 유저가 어떤 질문을 했을 때, 우리는 "신규 유저가 묻는 전형적인 질문이네"라고 생각한다. 그 신규 유저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 우리는 "신규 유저라서 그렇지"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판단은 이미 그 개별 인간 위에 "신규 유저"라는 자막을 덧붙여서 모든 것을 해석한다. 우리는 그 인간을 그 인간 자체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신규 유저"를 본다. 이것의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배제다. 배제는 한 순간에 일어나는 명시적인 행동이 아니다. 배제는 무수한 미세한 거부들의 누적이다. 신규 유저를 "우리와 다르다"는 시선으로 보는 것, 그 사람의 질문에 교육하듯 답하는 것, 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여기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신규 유저에게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넌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이런 메시지를 받은 신규 유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떠난다. 또는 자신을 숨긴다. 또는 더욱 깊게 자신이 다르다고 확신한다. 어느 쪽이든, 카국계는 신선한 생명력을 잃는다. 신규 유저라는 새로운 관점,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가능성이 사라진다. 카국계는 기존 구성원들끼리만 남아,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것들만 반복하는 폐쇄적인 공간이 되어간다. 분별이성이 인간을 대할 때의 두 번째 오류는 '시간을 무시하는 것'이다. 분별이성이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그것은 현재의 모습에만 기반한다. "지금 저 사람은 카국을 모른다", "지금 저 사람은 예의가 없다", "지금 저 사람은 우리와 맞지 않는다." 이 모든 판단들이 현재에만 근거한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 속에서 변한다. 인간은 학습하는 존재고, 성장하는 존재다. 신규 유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카국을 배운다. 언동이 부족한 사람도 경험을 쌓으면서 성숙해진다. 한 번의 실수를 한 사람도 그 실수로부터 배운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분별이성의 판단은 이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그 판단은 고정화된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결론이 내려지면, 그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 편향(確證偏向)이 작동한다. 우리는 우리의 초기 판단을 확인해 주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주목하고, 그 판단과 모순되는 정보는 무시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신규 유저가 첫 날 몇 가지 실수를 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사람을 "수준이 낮은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그 이후로 그 사람이 아무리 잘해도, 우리의 눈에는 그 사람이 여전히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보인다. 왜인가? 왜냐하면 우리의 초기 판단을 강화하는 정보만을 우리는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좋은 발언을 했을 때도 "운이 좋게 잘 말했네"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을 때도 "누군가 도와줬나봐"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불공정하다. 더욱이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다. 인간은 정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열려 있는 존재다. 현재의 모습이 미래의 모습을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 분별이성이 시간을 무시하고 현재의 모습만 보고 판단할 때, 그것은 인간의 이 '열려 있음'을 폭력적으로 닫아버리는 것이다. 분별이성이 인간을 대할 때의 세 번째 오류는 '정황을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항상 어떤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가 화를 낸다고 했을 때, 그것이 아무 이유 없이 화낸 것일 수도 있고, 무언가 억울한 일이 있어서 화낸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질문을 할 때, 그것이 진정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조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별이성이 작동할 때, 그것은 이러한 정황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분별이성은 "이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을 내릴 때, 그것이 옳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기 전에, 먼저 판단을 내린다. "저 사람은 규칙을 어겼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우리는 "왜 규칙을 어겼는가"를 묻기 전에 이미 그 판단을 고착시킨다. 카국계에서 이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친인류와 반인류의 대립이다. 어떤 사람이 반인류적 발언을 했다고 하자. 분별이성은 즉시 "저 사람은 반인류"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 사람이 그런 발언을 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혹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혹시 그 사람이 어떤 상처나 두려움으로부터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닐까? 혹시 그 사람이 실제로는 배울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질문들을 분별이성은 무시한다. 분별이성은 행동의 표면만 본다. 그것은 정황과 맥락을 관통하는 능력이 없다.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별이성은 자신의 판단 기준이 절대적이라고 착각하므로, 그 판단 기준 밖의 정황이나 맥락을 '변명'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세 가지 오류를 통해 보면, 분별이성이 인간을 대할 때 어떤 일관된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별이성은 복잡한 인간을 단순한 범주로 환원한다. 시간을 무시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그 인간 전체를 판단한다. 정황을 무시하고 행동의 표면만 본다. 그 결과로 인간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분별이성의 틀에 맞춰 왜곡된 형태로 보인다. ㅡ 그리고 이 왜곡된 인식이 쌓이고 쌓이면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배제가 일어난다. 신규 유저는 점차 자신이 환영받지 않는다고 느낀다. 반인류는 점차 자신이 철저히 거부당한다고 느낀다. 그 결과로 그들은 떠난다. 또는 더욱 극단화된다. 어느 쪽이든, 카국계는 그들을 잃는다. 이것이 바로 분별이성의 폭력성이다. 분별이성 자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 분별이성은 무고한 개별 인간을 배제하고 상처를 입히는 도구가 된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 폭력이 명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저 사람은 우리와 맞지 않아"라는 미세한 거부들의 누적이다. 그것은 한 번의 강렬한 폭력이 아니라, 무수한 약한 폭력들의 축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더욱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제3장 카국계에서의 분별이성의 작동 양태
이제 우리는 더욱 구체적으로, 카국계라는 특정한 공동체 속에서 분별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우리가 분석한 분별이성의 오류들은 단순히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들은 현실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신규 유저의 유입이 끊기고, 정치가 썩고, 친인류와 반인류가 대립하며, 가국의 정체성이 형해화되는 모든 현상 뒤에는 분별이성의 오작동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신규 유저의 배제 문제를 보자. 카국계의 신규 유저들은 들어오는 순간부터 분별이성의 낙인화를 경험한다. 그들은 "신규 유저"라는 범주로 즉시 분류된다. 그리고 그 범주는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신규 유저는 뭘 모른다", "신규 유저는 이렇게 행동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단 형성되면, 그것은 매우 강력하다. 모든 신규 유저는 이 고정관념의 틀 속에서 평가된다. 어떤 신규 유저가 부족한 표현을 했을 때, 우리는 "신규 유저라서 그렇지"라고 생각한다. 어떤 신규 유저가 좋은 질문을 했을 때도, 우리는 "신규 유저치고는 잘 물었네"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평가는 항상 이미 정해진 범주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결과로 신규 유저들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환영받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무도 "너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수한 미세한 신호들을 통해, 신규 유저들은 자신들이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이것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실감하려면, 우리가 어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어떤 모임에 처음 갔을 때, 우리는 자신이 환영받는지 거부당하는지를 즉시 감지한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신호들—눈빛, 목소리의 톤, 반응의 속도—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신규 유저도 똑같다. 그들도 이러한 미세한 신호들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그리고 그 신호가 부정적이면, 그들은 떠난다. 이것의 결과가 무엇인가? 신규 유입의 단절이다. 카국계는 기존 구성원들만 남게 된다. 그리고 기존 구성원들끼리만 있으면, 공동체는 어떻게 변하는가? 내부적 다양성이 사라진다. 기존 구성원들의 관점만 강화된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올 여지가 없어진다. 공동체는 점차 경직되고, 폐쇄적이 되며, 침체해 간다.
다음으로 정치의 썩음을 보자. 카국계의 정치가 쇠락하는 데 있어 분별이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처음에 정치는 놀이였다. 가상의 국가를 세우고, 선거를 하고, 전쟁을 벌이는 행위들은 현실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권력과 결정의 감각을 모의하는 순수한 창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는 점차 규칙화되고 정교화되었다. 헌법이 만들어지고, 법률이 제정되고, 절차가 규정되었다. 이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어느 정도의 구조화는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분별이성이 작동했다. 분별이성은 "이렇게 해야 올바른 정치다"는 판단을 내렸다. "민주주의는 이래야 한다", "선거는 이런 절차를 따라야 한다", "의회는 이렇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판단들이다. 이 판단들이 내려지는 순간, 정치는 더 이상 자유로운 놀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규칙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된다. 그 결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 참여의 자발성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자신의 흥미와 의지에 따라 정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규칙에 따라 참여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창의성을 표현하는 것이 정치였다면, 이제는 규정된 절차를 따르는 것이 정치가 되었다. 이것이 정치의 공허화(空虛化)다.
그리고 이 공허함은 참여자들에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점차 정치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규칙이 너무 복잡하다", "절차가 너무 많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나"라는 불만이 제기된다. 하지만 분별이성은 이 불만을 무시한다. 분별이성은 "규칙은 필요하다", "절차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분별이성은 자신이 "올바른" 것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정치의 죽음이다. 형식만 남고 생동감이 사라진 정치,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가 없는 정치, 그것은 더 이상 생명력 있는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절차를 밟는 의식(儀式)일 뿐이다.
이것이 분별이성의 역설이다. 분별이성은 정치를 "올바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의 본질인 창의성과 자발성을 죽여버렸다. 규칙으로 정치를 살리려 했으나, 결국 규칙이 정치를 질식시켜 버렸다. 이제 친인류와 반인류의 대립을 보자. 이것이 분별이성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친인류와 반인류의 구분 자체는 분별이성의 정당한 작동이다. 세계에는 다양한 관점과 가치관이 있고, 그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다. 친인류와 반인류는 실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입장들을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구분이 점차 강화되고 절대화되었다는 것이다. "친인류는 옳고 반인류는 그르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입장의 차이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이 되었다.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사람들의 배제가 시작된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 판단이 모든 신규 유입자에게 강압된다는 것이다. 신규 유저가 들어오면, 우리는 즉시 "넌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 이것은 신규 유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넌 이 공동체에 속하려면 먼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신규 유저에게는 이 공동체 자체에 대한 탐색과 이해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즉시 진영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신규 유입을 차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다. 신규 유저들은 이 강압 속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자신이 진영의 전략적 가치로만 평가된다고 느낀다. 그들은 자신이 개별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분별이성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배제와 강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친인류는 옳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 판단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그르다"고 간주된다. 분별이성은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고, 그 판단 밖의 모든 것들을 배척한다.
마지막으로, 가국의 정체성 형해화 문제를 보자. 모의전과 역극이 가국을 대체해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컨텐츠가 더욱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모의전과 역극에서는 순수한 창작과 놀이의 정신이 살아 있다. 거기에는 분별이성이 강압적으로 규칙을 정하고, 판단을 내리고, 배제를 하는 일이 없다. 반면에 가국은 어떻게 변했는가? 가국도 점차 규칙과 절차의 공간이 되어갔다. 가국도 점차 진영과 정파의 대립의 장이 되어갔다. 가국도 점차 어떤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이것이 가국의 본래 정체성을 훼손한 것이다. 가국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가치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현실과 가상을 섞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는 현실의 나와 가상의 나가 동시에 존재했다. 현실의 우정 위에서 가상의 전쟁을 할 수 있었고, 가상의 경쟁 위에서 현실의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국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분별이성이 이것을 규칙화하고 절차화하기 시작했을 때, 이 '섞임'이 불가능해졌다. 이제 가국도 다른 컨텐츠처럼 규칙에 따르는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욱 자유로운 모의전으로, 더욱 순수한 역극으로 간다. 가국이 제공했던 독특한 경험을 가국은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한다.
정리하자면, 분별이성이 카국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면, 그것이 일관되게 네 가지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범주로 환원한다.
둘째, 그것은 그 범주에 낙인을 찍고 절대화한다.
셋째, 그것은 그 판단을 근거로 배제와 강압을 정당화한다.
넷째, 그것은 공동체의 본래 본질을 규칙과 절차로 대체해 버린다.
그 결과로 신규 유입은 끊기고, 정치는 썩고, 진영 간의 대립은 심화되고, 가국의 정체성은 형해화된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분별이성의 오작동이 있다. 분별이성이 자신의 영역을 넘어, 인간을 판단하고, 가치를 결정하고, 배제를 정당화할 때,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이것이 분별이성비판의 핵심이다.
제2부 | 분별이성의 극복 ㅡ 무위포용주의의 논리
제4장 | 무위(無爲)의 개념 재구성
이제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분별이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태도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의 과제다. 나는 여기서 도가의 무위(無爲)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나는 동양 철학을 그대로 서구 문제에 적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가의 무위는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발생한 개념이고, 그것을 21세기 카국계의 현실에 적용하려면 재구성이 필요하다.
무위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오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하지 않음'이 아니라 '인위(人爲)를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억지스럽게 강제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물을 보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자신이 흘러야 한다고 강제하지 않는다. 물은 험한 바위를 만나도 우회한다. 물은 어떤 장애물도 폭력적으로 부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이 흐르고 흘러서 결국 어떻게 되는가? 물은 가장 단단한 돌도 깎아낸다. 물은 멀리서 봤을 때는 약해 보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가장 강한 것들도 무너뜨린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힘이다. 무위는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위는 다만 인위적인 강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는 자신의 본래 성질에 따라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노자는 이것을 "천지는 무위한데도 일을 이루고, 성인은 무위한데도 일을 성취한다"고 표현했다. 이것을 칸트의 비판 정신과 연결해 보면 어떻게 될까?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이성이 자신의 정당한 영역을 벗어나 초월적(超越的)이 되는 것을 막았다. 칸트는 이성에게 "이것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다"라는 경계선을 그었다.
나는 비슷한 일을 분별이성에 대해 하고자 한다. 나는 분별이성에게 "이것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분별이성은 객관적 사물의 인식과 행동의 옳고 그름의 판단에는 타당하지만, 인간 자체를 절대적으로 판단하고 배제하는 것은 그 정당한 영역을 벗어난다. 분별이성이 이 한계를 인식했을 때, 무위라는 다른 태도가 가능해진다. 무위란 이 맥락에서 '분별이성의 절대화를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무위란 판단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안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위란 분별이성이 자신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객관적 사물의 분석, 행동의 평가, 논리의 검토)은 하되, 그것을 인간 존재 전체의 판단으로까지 확장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행동(行動)과 행위자(行爲者)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분별이성의 정당한 역할이다. 우리는 "이 행동은 타인을 해친다", "이 행동은 규칙을 어긴다", "이 행동은 공동체를 훼손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인 기준에 기반할 수 있고, 따라서 타당하다.
하지만 그 행동을 한 사람 자체를 그 행동으로부터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어떤 행동으로도 완전히 정의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 행동보다 크고, 현재의 상황보다 크며, 예상된 미래보다도 크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정의를 초과하는 존재다. 이 구분이 무위라는 개념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무위적 태도는 "너의 행동은 문제가 있다. 그것을 바꿔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무위적 태도는 행동에 대해서는 명확하다. 하지만 동시에 무위적 태도는 "너는 그 행동을 한 사람일 뿐이다. 너는 그 행동 자체가 아니다. 너는 변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으며,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힘이다. 무위는 엄격한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다. 무위는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기준을 유지한다. 하지만 동시에 무위는 그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항상 개선되고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무위는 엄격함과 관대함을 동시에 가진다.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무위적 태도는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첫째, 무위는 현상을 본다. 그것은 "신규 유저가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무위는 그 사실을 무시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둘째, 무위는 그 현상의 정황을 묻는다.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가?" 무위는 행동 뒤의 의도, 상황, 맥락을 이해하려고 한다. 무위는 그 이해가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위는 이해가 판단을 더욱 정확하게 만든다고 본다.
셋째, 무위는 판단한다. "이 행동은 공동체의 규칙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개선되어야 한다." 무위도 판단을 한다. 무위는 분별이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무위는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넷째, 무위는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방식이다. 이렇게 해 보자." 무위는 피동적이지 않다. 무위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하지만 그 개입은 강압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무위의 개입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른다.
다섯째, 무위는 기다린다. 무위는 그 사람이 배울 시간을 준다. 무위는 한 번의 실수로 그 사람을 영원히 판단하지 않는다. 무위는 그 사람의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여섯째, 무위는 필요하면 제지한다. 하지만 제지하는 것도 무위다. 분별이성의 강압과 달리, 무위의 제지는 해로운 행동을 멈추게 하면서도 그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치 제방이 물을 막으면서도 물을 없애지 않는 것처럼, 무위의 제지는 행동을 바꾸면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무위이다. 무위는 완전한 자유방임이 아니다. 무위도 어떤 형태의 질서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 질서는 강압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무위의 질서는 마치 생태계의 질서처럼,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 아니라 시스템 내부의 힘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분별이성의 극복이다. 분별이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분별이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별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안에서만 분별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분별이성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무위라는 다른 차원의 태도가 가능해진다.
제5장 | 포용(包容)의 원리
포용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포용은 '품어안기' 정도로 이해된다. 무언가를 자신의 범위 안에 받아들이는 것, 모순되거나 이질적인 것들을 함께 품는 것, 그것이 포용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피상적인 이해다.
진정한 포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다르다. 포용이 흔히 이해되는 방식은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 비록 넌 다르지만, 나는 너의 차이를 용서한다"는 식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상위와 하위의 관계가 있다. 나는 정상적이고, 너는 다르며, 내가 너를 받아주는 것이다. 이것은 포용의 모양을 한 또 다른 배제일 수 있다. 반면에 진정한 포용이란 "넌 다르고, 나도 다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 속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용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을 시로 표현한다면, 노자의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ㅡ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장 큰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색깔을 포함하는 것을 흰색이라고 하고, 모든 소리를 포함하는 것을 침묵이라고 부르듯이, 진정한 포용도 모든 다양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갖지 않는다.
카국계에서 이 포용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신규 유저들을 마주했을 때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 환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를 자신보다 낮게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규 유저가 서툰 것은 그들의 결함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아직 이 공간에 머물기 시작했다는 사실의 반영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는 서툴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환대의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자. 환대란 신규 유저가 실수했을 때, 그 실수를 그 사람의 본질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환대란 신규 유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넌 이것도 모르냐"라고 비난하지 않고,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환대란 신규 유저를 "신규 유저"라는 범주의 전형적 사례로 보지 않고, 개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뇌는 자동으로 범주화한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 체계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의 뇌는 즉시 그 사람을 어떤 범주에 집어넣으려고 한다. 이것 없이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신규 유저를 환대한다는 것은 이 자동적인 범주화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노력이 가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노력 없이는 공동체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신선한 피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는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새로운 관점을 필요로 한다. 신규 유저들이 가져오는 것들—그들의 질문, 그들의 관점, 그들의 에너지—이 모든 것이 공동체를 활성화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포용이 모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포용의 한계가 있다. 어떤 행동들은 포용할 수 없다. 테러, 신상 유포, 집단적 괴롭힘 같은 행위들은 공동체의 소통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포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포용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포용의 대상은 "소통을 훼손하지 않는 모든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비판 정신과 만나는 지점이다. 칸트도 무한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칸트는 "네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자유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포용도 "소통을 훼손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을 명확히 하지 않은 포용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포용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신규 유저, 반인류, 기존 유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개별 인간으로서 존중한다. 둘째, 우리는 각자의 관점과 입장의 차이를 인정한다. 차이는 위협이 아니라,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요소다. 셋째, 우리는 어떤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될 때, 그 판단을 명확히 하되, 그것이 그 행동을 한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넷째, 우리는 소통을 훼손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지한다. 하지만 그 제지도 그 사람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한다. 이것을 친인류와 반인류의 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포용의 원리는 다음을 의미한다. 친인류는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친인류의 정당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친인류는 반인류 사람들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로 봐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친인류와 반인류 간의 입장 차이가 상당하다면, 더욱 어렵다. 하지만 포용이라는 원리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왜인가?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비록 입장이 다를지라도,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장의 차이가 대화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큰 변화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 일어났다. 물론 폭력과 혁명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만든 것은 대화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바꾸는 것은, 그 사람을 폭력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비롯된다.
제이의 사상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제이가 주장한 '유화적 성격'이라는 것이 바로 이 포용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제이는 반인류도 "저질스러운 행태를 보이는 절대다수"와 "논리적 사고력과 생각을 가진 극소수"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 극소수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척살과 배척보다는 친인류의 정당성을 깨닫도록 하여 전향시키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이렇게 분별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아니하지만 어쨋든 이것이 바로 포용의 원리다. 포용은 모든 것을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포용은 심지어 상대방의 입장이 "저질스럽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용은 그렇더라도 그 사람을 설득하고 대화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포용의 원리가 카국계에 적용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첫째, 신규 유입이 증가한다. 신규 유저들이 환대받고 개별 인간으로서 대우받는다면, 그들은 머물 것이다. 둘째, 진영 간의 대화가 재개된다. 친인류와 반인류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대화한다면, 극단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셋째, 공동체의 에너지가 생성된다.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가 공동체를 활성화한다.
정리하자면, 포용의 원리는 공동체의 본질적 필요다. 공동체는 동질성만으로는 살 수 없다. 공동체는 차이 속에서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를 배울 때 비로소 성숙해진다. 포용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고, 패배가 아니라 승리며, 타협이 아니라 성찰이다.
제6장 | 자유방임(自由放任)과 그 한계
무위포용주의가 대안적 태도를 제시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방임'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자유방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방임은 적극적인 태도이며, 그것의 한계도 명확히 해야 한다. 자유방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운영자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할 때, 공동체의 생동감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해야 할 것"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공동체를 의무의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반면에 자유방임은 이 구조를 역전시킨다. 자유방임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만약 하고 싶다면 마음껏 해"라는 태도를 취한다. 이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참여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흥미와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을 할 때, 그것은 훨씬 창의적이고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운영자가 "모든 유저는 매달 한 번씩 정치 활동을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람들은 의무감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들의 참여는 형식적이고, 심지어 거부감을 일으킨다. 더욱이, 이 규정은 자동으로 정치를 배제한 사람들을 생성한다. "난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들은 자동으로 '불성실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반면에 자유방임이 작동한다면?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 관심 없는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정치가 진행되고 있으니,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어."라는 태도가 된다. 이 경우 무엇이 일어나는가? 정치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만이 참여한다. 그들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따라서 창의적이며 지속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방임이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방임도 경계가 있다. 그 경계가 무엇인가? 그것은 "소통을 훼손하지 않음"이다.
자유방임이 의미하는 자유는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해치지 않는 한에서의 자유"다. 예를 들어,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하되,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억압하거나, 다른 사람을 신상 유포로 협박하거나, 다른 사람을 집단적으로 괴롭힐 자유는 없다. 이것이 자유방임의 한계다. 이것을 우리는 '칸트적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 칸트는 "네 자유의 사용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자유방임의 자유도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한에서의 자유"다. 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동, 공동체의 기본적인 신뢰를 파괴하는 행동, 이러한 행동들은 자유방임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면, 자유방임이 운영자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운영자는 규정을 최소화해야 한다. 모든 것을 규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규정이 적을수록, 구성원들의 창의적 활동 공간이 커진다.
둘째, 운영자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어떤 유저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면, 운영자는 "해도 된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운영자는 필요할 때만 개입해야 한다.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운영자는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운영자의 책임도 있다. 자유방임이라고 해서 운영자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운영자의 책임은 더욱 섬세해진다. 운영자는 다음과 같은 책임을 진다.
첫째, 소통을 훼손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지해야 한다.
둘째, 공동체의 기본적 신뢰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 진입할 수 있는 여지를 항상 남겨두어야 한다.
이것이 자유방임의 역설이다. 자유방임은 수동적이지 않다. 자유방임은 적극적으로 자유를 지키는 활동이다. 마치 무위가 '하지 않음'이 아니라 '인위를 하지 않음'을 의미하듯이, 자유방임도 '통제하지 않음'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강제를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카국계에서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먼저 정치를 보자. 정치가 썩어가는 이유는 정치가 규칙화되고 의무화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에 자유방임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첫째, 정치 참여를 의무로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국가는 국회를 가져야 한다", "모든 시민은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식의 규정을 없애야 한다. 대신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해야 한다.
둘째, 정치의 형식을 단순화해야 한다. 복잡한 헌법, 방대한 법전, 세밀한 절차들이 정치 참여의 장벽이 되고 있다. 이것들을 대폭 단순화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쉽게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정치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해야 한다. 반드시 국가 수립, 국회 설립, 선거 실시 같은 정형화된 형태만이 정치가 아니다. 조그만 지역의 쟁점에 대한 토론도 정치고, 국가 간의 외교담도 정치고, 사소한 의사결정도 정치다. 이 다양한 형태의 정치들을 모두 인정할 때, 정치는 살아난다.
넷째, 운영자는 정치에 개입하되, 지배하지 않아야 한다. 운영자가 정치 이벤트를 제공하고,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운영자가 그 정치의 결과를 미리 정하거나, 특정 진영이 이기도록 개입하거나, 참여를 강압하면, 그것은 자유방임이 아니다.
다섯째, 운영자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이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들도 환대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이 작동할 때, 정치는 어떻게 변할까? 정치는 자신의 생명력을 되찾을 것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정치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참여하게 되고, 그 참여는 훨씬 더 창의적이고 열정적일 것이다. 또한 자유방임은 다양한 형태의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 한 명의 운영자가 모든 정치를 통제하고자 할 때는, 정치도 단순해지고 획일화된다. 하지만 자유방임이 작동할 때, 각 개인이 자신의 방식으로 정치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큰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누군가는 작은 도시의 의회를 만들고, 누군가는 간단한 외교담을 나눈다. 이 모든 형태의 정치가 공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자유방임이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 국가는 다른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고 하자. 이것이 자유방임의 범위 안에 있는가? 아니다. 왜인가? 왜냐하면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어떤 사람이 "내 국가는 다른 국가의 사람들을 신상 유포로 협박하여 복종하게 만들겠다"고 선언했다고 하자. 이것도 자유방임의 범위를 벗어난다. 왜인가? 왜냐하면 이것은 공동체의 소통 자체를 파괴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유방임의 한계다. 자유방임은 한계를 가지며, 그 한계는 명확하다: "다른 사람의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 "공동체의 소통을 파괴하지 않음". 이 두 가지 조건을 위반하는 활동은 자유방임의 범위를 벗어나며, 운영자는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제지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이 경계를 누가 정하는가? 누가 "이것은 소통을 파괴한다"고 판단하는가? 이것이 바로 분별이성의 위험성이 다시 나타나는 지점이다. 운영자가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한다면, 자유방임은 다시 전제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계는 운영자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만들어야 한다. 운영자는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원칙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법이 절대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법이 우리 모두의 동의에 기반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자유방임도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정리하자면, 자유방임은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핵심 원리다. 자유방임은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그 참여를 통해 공동체는 생동감을 얻는다. 하지만 자유방임도 한계를 가진다. 그 한계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햐하지 않음"이며, 이 한계는 명확하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지켜야 한다.
제7장 | 공동체의 자율적 활성화
무위포용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이제 우리가 다루었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분별이성의 비판, 무위의 개념, 포용의 원리, 자유방임의 한계—이 모든 것들이 실제 카국계에서 구현되려면,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운영자로부터 강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운영자가 "자유방임을 하세요"라고 강제한다면, 그것은 이미 모순이기 때문이다. 자유방임을 강제하는 것은 자유방임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통제다. 따라서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활성화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공동체의 자율적 활성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강제 없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과정도 사실은 운영자의 지혜로운 부재(不在)에 의존한다. 운영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을 선언하는 것"이다. 운영자는 한 번만이라도 명확하게 선언해야 한다 ㅡ "이 공동체는 모든 사람을 환대한다. 신규 유저든 기존 유저든, 친인류든 반인류든, 모두가 여기 속할 수 있다. 다만 공동체의 소통 자체를 파괴하는 행동은 할 수 없다. 그 외에는 모두 자유다."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를 보자.
첫째, 이것은 공동체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공동체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명확히 한다.
둘째, 이것은 기존의 문화적 관성을 타파한다. 지금까지 신규 유저를 배제했다면, 이 선언은 그 문화를 거부한다.
셋째, 이것은 경계를 명확히 한다. 무엇은 허용되고 무엇은 허용되지 않는가를 분명히 한다.
이 선언이 내려졌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처음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왜인가?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새로운 방향성이 진정한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것인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행동 방식이 이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기존 구성원들은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 싫을 수 있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신규 유저를 배제해왔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운영자가 이 선언을 일관되게 유지하면, 점차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신규 유저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여기는 나를 환대해줄 수도 있겠다"는 신호를 받으면, 더 오래 머무른다.
둘째, 기존 구성원들의 일부가 이 새로운 방향성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렇다면 이렇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바꾼다.
셋째, 신규 유저들과 기존 유저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생긴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 자체가 공동체를 활성화한다.
이것이 자율적 활성화의 시작이다. 운영자가 강제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상호작용에 의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공동체도 이 기본적인 방향성이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 운영자가 처음 선언을 한 후에, 운영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관성 있게 그 선언을 지키는 것'이다. 운영자가 선언한 기본을 위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공동체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예를 들어보자. 운영자가 "모두를 환대한다"고 선언했는데, 나중에 어떤 신규 유저를 부당하게 배제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무엇이 일어나는가? 다른 신규 유저들은 "결국 이곳도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떠난다. 기존 유저들도 "운영자가 선언한 것은 거짓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신뢰는 무너진다. 따라서 운영자의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다. 운영자는 자신의 선언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어렵고 불편한 상황도 감수해야 한다. 신규 유저가 처음에는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운영자는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 어떤 유저의 행동이 규칙을 어겼을 때, 운영자는 그 행동을 지적하되, 그 유저를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운영자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큰 책임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운영자의 행동과 선택이 공동체 전체의 문화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운영자가 신규 유저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다른 기존 유저들도 신규 유저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학습한다. 이것이 우리가 '문화의 형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화는 명시적인 규칙만으로는 형성되지 않는다. 문화는 사람들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특히 지도자의 행동을 모델로 하여 형성된다. 따라서 운영자가 환대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줄 때, 공동체도 점차 환대의 문화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가 눈에 띄게 빠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화의 변화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 바뀌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 시간을 감수할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자율적 활성화의 의미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강압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변화다. 운영자가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을 일관되게 지킬 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그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변화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공동체의 자율적 활성화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첫째, 신규 유저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약할 수 있지만, 그들이 환대받는다고 느껴지면, 점차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둘째, 기존 유저들 중 일부가 신규 유저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얻는다. 그들은 "아, 신규 유저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구나"라고 깨닫는다.
셋째, 정치에도 변화가 생긴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관심에 따라 참여하기 시작하면, 정치가 다시 살아난다.
넷째, 공동체의 에너지가 생성된다. 신선한 관점과 기존의 경험이 만날 때,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능성이 나타난다.
이 모든 변화는 운영자가 "이렇게 하세요"라고 강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운영자가 "기본을 지킬 테니, 너희는 자유롭게 활동해"라고 했을 때,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변화다. 하지만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자율적 활성화가 일어난다고 해서, 운영자의 역할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운영자는 여전히 필요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운영자의 개입이 필요하다.
첫째, 공동체의 기본이 위협받을 때. 누군가가 소통 자체를 파괴하려 할 때, 운영자는 명확하게 제지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동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운영자는 지혜를 모아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부정의가 발생했을 때. 어떤 유저가 다른 유저를 부당하게 대했을 때, 운영자는 개입하여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자율적 활성화는 "운영자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운영자가 현명하게 개입하는 것"이다. 운영자는 필요한 곳에서만 개입하고,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진정한 의미다.
제8장 | 운영과 구성원의 책임
지금까지 우리는 운영자의 역할에 대해 주로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무위포용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운영자만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책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분별이성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분별이성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자신이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판단을 한다.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 주관적이고 한정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첫 번째 책임은, 자신의 판단 행위 자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는가? 그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가? 내가 그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환원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판단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성찰을 요구하고, 자기 성찰은 항상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타인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감수할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구성원이 자신의 분별이성을 자각하는 순간, 그 구성원은 더 이상 분별이성의 노예가 아니다. 그 구성원은 자신의 판단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구성원의 두 번째 책임은 '포용의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포용은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고, 심지어는 억지스러워 보일 수 있다. 특히 자신의 관점과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을 마주했을 때, 포용은 쉽지 않다. 하지만 포용은 기를 수 있다.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그것은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와 의견이 다를 때, 우리는 즉시 그 사람이 "틀렸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포용의 태도는 먼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묻는다. 그 사람이 왜 그런 관점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 사람의 경험과 배경은 무엇인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관점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자동으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증가시킨다. 완전한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의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한다. 그리고 이 이해가 바로 포용의 시작이다.
구성원의 세 번째 책임은 '신규 유저에 대한 환대'이다. 이것은 운영자뿐 아니라 모든 기존 유저가 져야 할 책임이다. 신규 유저가 들어왔을 때, 기존 유저들이 어떻게 대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운영자가 환대한다고 해도, 기존 유저들이 거부한다면, 신규 유저는 결국 떠날 것이다. 환대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신규 유저가 질문했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답하는 것. 신규 유저가 실수했을 때, 그것을 "신규 유저라서 그렇지"라고 무시하지 않고, 함께 해결하려고 하는 것. 신규 유저가 어색해 보일 때, 그것을 비웃지 않고,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환대다.
구성원의 네 번째 책임은 '공동체의 기본을 지키는 것'이다. 무위포용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방임도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 한계는 "소통을 파괴하지 않음"이다. 이 한계를 지키는 것은 운영자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책임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신상 유포를 하려고 할 때, 다른 구성원들이 이것을 적극적으로 말렸을 때, 그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단순히 "규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강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문화를 지키는 방법이다. 규칙책에 쓰인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기본을 지키는 것. 이것이 훨씬 더 강력하다.
구성원의 다섯 번째 책임은 '자신의 참여를 책임지는 것'이다. 자유방임은 "하지 않아도 된다"를 의미하지만, "하기로 한 것은 책임진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유저가 어떤 활동에 참여하기로 했다면, 그 유저는 그 활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했다면, 그 사람은 그 국가를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운영할 책임이 있다. 또는 누군가가 정치 이벤트를 주최하겠다고 했다면, 그 사람은 그 이벤트를 제대로 진행할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공동체에 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자유는 책임과 함께 온다.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했을 때, 그 선언은 곧 그 사람의 책임을 나타낸다. 자유방임의 문화가 건강하려면,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운영자의 책임도 다시 정리해 보자. 운영자는 다음과 같은 책임을 진다.
첫째, 공동체의 기본을 선언하고 지키는 것.
둘째,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일관된 행동을 보이는 것.
셋째, 신규 유저들을 특히 주목하고 환대하는 것.
넷째, 공동체의 기본을 위협하는 행동에 대해 명확하게 제지하는 것.
다섯째, 공동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이 모든 책임들이 상호작용할 때, 무위포용주의는 실제로 작동한다. 운영자가 기본을 지키고, 구성원들이 포용의 태도를 기르고, 모두가 공동체의 기본을 보호할 때, 카국계는 활성화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단시간에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문화의 변화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이 책임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 공동체는 점차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것이 된다.
제3부 | 무위포용주의의 실천
제9장 | 신규 유저에 대란 환대(環待)
위의 내용들을 모두 이해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무위포용주의의 이론을 실제로 구체화해야 할 때가 되었다.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신규 유저의 환대 문제다.
왜 이것을 가장 먼저 다루는가? 왜냐하면 신규 유저의 환대가 카국계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신규 유입이 없으면, 카국계는 자동으로 침체와 소멸로 향한다. 신규 유저를 환대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그것은 신규 유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신규 유저는 카국의 기본적인 문법을 모를 것이다. 신규 유저는 이곳의 관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신규 유저는 어색하고 서툰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환대는 이 자연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너는 처음이니까 모르는 게 당연해. 그래서 난 너를 도와줄 거야"라는 태도다. 이것이 신규 유저가 받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신규 유저가 규칙을 어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신규 유저가 또 이것도 모르네", "신규 유저치고는 정신을 못 차리네" 같은 반응이 많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배제의 시작이다. 환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우리는 신규 유저를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라야 한다.
첫째, '차이를 결함이 아닌 다름으로 본다.' 신규 유저가 기존 유저와 다른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저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기 전에, "저건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사고의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결함은 고쳐야 할 나쁜 것이지만, 다름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규 유저가 공식적인 표현 대신 구어체를 사용했다고 하자. 기존 유저들은 "저 사람은 예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환대의 태도는 "저 사람은 이곳의 문화를 아직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판단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전자는 그 사람을 배제하고, 후자는 그 사람을 환대한다.
둘째, '설명하되 비난하지 않는다.' 신규 유저가 규칙을 어겼을 때, 그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지적은 비난의 형태가 아니라, 설명의 형태여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해"라고 설명하는 것과 "넌 왜 이것도 못 해?"라고 비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다. 설명은 그 사람을 도우려는 의도를 담고 있고, 비난은 그 사람을 낮추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신규 유저는 우리의 언어와 태도를 민감하게 감지한다.
셋째, '실수를 배움의 기회로 본다.' 신규 유저가 실수했을 때, 그것을 그 사람의 본성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배움의 기회로 본다. "이번에 이런 실수를 했으니, 다음엔 이렇게 해보자"는 태도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왜냐하면 인간이 배우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통해 배운다. 신규 유저도 마찬가지다. 신규 유저가 몇 번의 실수를 거쳐 카국의 문화를 학습할 때, 그 신규 유저는 진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첫 번째 실수에서 그 사람을 배제한다면, 그 사람은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다.
넷째, '시간을 주고 기다린다.' 신규 유저가 변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며칠 안에 모든 규칙을 익히고, 모든 관습을 터득할 수는 없다. 환대는 이 시간을 주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한다. 신규 유저가 빨리 변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무위의 태도는 이 조급함을 내려놓는 것이다. 물이 돌을 깎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이, 신규 유저가 변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다섯째, '신규 유저의 관점을 소중히 여긴다.' 신규 유저들은 우리가 익숙해져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본다. 신규 유저들의 질문은 때로 불편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공동체가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소중한 자극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해?", "이 규칙의 의미가 뭐야?", "다른 방식으로는 안 되나?" 이런 질문들은 기존 유저들에게는 흔하지 않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해왔으니까"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규 유저의 질문은 우리에게 "정말 그럴까?"라고 묻게 만든다. 이것이 공동체의 성장을 만든다.
여섯째, '신규 유저가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 환대는 단방향이 아니다. 환대는 신규 유저를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규 유저가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신규 유저는 배우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규 유저도 공동체에 뭔가 제공할 수 있다. 신규 유저의 신선한 관점, 신규 유저의 열정, 신규 유저의 에너지. 이 모든 것이 공동체의 자산이 될 수 있다. 환대는 신규 유저가 이런 것들을 제공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신규 유저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 우리는 "그건 우리가 이미 해봤는데?"라고 말하지 말고, "오 그런 방식도 있겠네. 같이 ㄱㄱ?"라고 말할 수 있다. 신규 유저가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질 때, 신규 유저는 무엇을 느끼는가? 그들은 자신이 환대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이 감정이 생길 때, 신규 유저는 머물게 된다. 그리고 신규 유저가 머물 때, 공동체는 살아난다. 신규 유저의 환대 문제는 사실 단순하지 않다. 이것은 공동체의 기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편견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주관적 판단을 의식하며,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감수할 때, 카국계는 살아난다.
제10장 | 진영을 넘어선 대화
이제 조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자 한다. 카국계의 또 다른 핵심 문제는 친인류와 반인류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신규 유입을 차단하고, 공동체를 양극화시키며,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무위포용주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먼저, 우리는 친인류와 반인류의 입장이 실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대립은 환상이 아니다. 실제로 두 진영은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다르고, 따라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모두 같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따라서 무위포용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진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영을 넘어선 대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그것은 '적대를 유지하되 증오를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친인류로서 반인류에 맞서는 것은 정당하다. 친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반인류의 세계관은 위험하고 부당하다고 보일 수 있다. 그 판단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인류 사람들을 "우리가 척살해야 할 악"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다. 친인류는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반인류 사람들을 개별 인간으로 존중할 수 있다. 이것이 포용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친인류는 반인류의 특정한 입장이나 행동에 대해 명확하게 거부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친인류는 반인류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한 적"이 아니라 "다른 관점을 가진 인간"으로 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어떤 경험이 그런 관점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바로 대화의 시작이다.
둘째, 그것은 '전향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을 의미한다. 제이의 사상에서도 나왔듯이, 반인류 중에도 "논리적 사고력과 생각을 가진 극소수"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대화를 통해 관점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일어나려면, 먼저 대화의 기초가 형성되어야 한다. 만약 친인류가 처음부터 반인류를 배척한다면,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대화는 상대방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인간"으로 봤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무위포용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친인류가 반인류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생각을 가진" 반인류와의 대화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승리가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가? 둘 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진정한 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을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상대방의 관점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상대방의 관점이 어떤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셋째, 내 관점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세 번째 조건이 가장 어렵다. 우리는 자신의 관점이 옳다고 강하게 믿는다. 특히 도덕적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친인류와 반인류의 대립이 심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둘 다 자신이 옳다고 강하게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의 비판 정신을 여기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의 인식이 현상의 차원에서만 타당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도 우리의 관점, 우리의 경험, 우리의 시대적 상황에 조건지어져 있을 수 있다. 이것을 인정할 때, 대화의 문이 열린다. 우리는 상대방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왜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너는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본다, 너는 어떻게 보는가?"라고 묻게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친인류와 반인류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될 수 있다. 친인류가 반인류에게 묻는다 : "왜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어떤 경험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ㅡ 반인류가 답한다 : "나는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이유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대화를 통해 친인류는 반인류의 관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이해가 반드시 동의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친인류는 여전히 반인류의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 판단은 상대방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대화의 가치다. 대화는 반드시 합의에 이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화는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해를 통해 적대는 유지되지만, 증오는 감소한다.
이것이 카국계에 가져올 변화가 무엇인가?
첫째, 신규 유저들이 진영의 강압으로부터 해방된다. 신규 유저가 들어왔을 때, "넌 어느 쪽이냐?"는 강압적인 질문이 사라진다. 대신 신규 유저는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야"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둘째, 진영 간의 대화가 재개된다. 지금까지 친인류와 반인류는 대화를 포기했다. 하지만 무위포용주의의 태도가 자리잡으면, 대화가 다시 시작된다. 이 대화가 반드시 합의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화 자체가 중요하다.
셋째, 공동체가 공존의 방식을 학습한다. 친인류와 반인류가 영원히 같은 관점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함께할 수 있다. 이것이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제11장 | 정치의 부활
카국계의 핵심 컨텐츠인 정치가 썩어가고 있다. 규칙이 많아질수록, 정치의 생명력은 떨어진다. 무위포용주의는 정치를 어떻게 부활시킬 것인가?
먼저, 우리는 정치가 본래 무엇이엇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치는 본래 놀이였다. 역사를 만들고, 국가를 건설하고, 외교를 벌이고, 전쟁을 하는 것. 이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가상의 공간에서는 가능한 창작 활동이었다. 정치의 본질은 창조성에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는 점차 규칙화되고, 절차화되고, 의무화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정치의 죽음이다.
정치를 부활시키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것은 정치를 다시 "하고 싶으면 하는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어떻게? 규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무위포용주의에서 말하는 정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정치 참여는 의무가 아니다. 누군가가 정치에 참여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참여하지 않고 싶다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을 강압할 수 없다.
다음으로, 정치의 형식은 다양해야 한다. 반드시 국가를 세우고 국회를 만들고 선거를 하는 식으로만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개의 도시국가가 경쟁하는 것도 정치고, 지역의 특정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정치다. 심지어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외교담도 정치다. 이렇게 다양한 형식의 정치를 모두 인정할 때, 정치는 살아난다. 왜인가? 왜냐하면 각자가 자신의 관심에 맞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유저는 큰 국가를 건설하는 데 관심이 있다. 또 다른 유저는 작은 도시의 시장이 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세 번째 유저는 국가는 세우지 않지만,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담을 벌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네 번째 유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역사나 문화에 관심이 있다. 이 모든 관심들이 카국 안에서 표현될 수 있을 때, 카국은 다양성을 갖춘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이 다양성이 공동체를 활성화한다.
하지만 여기서 운영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운영자는 이 다양한 정치들이 서로 조화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한 유저의 행동이 다른 유저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기본적인 규칙을 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규칙은 최소한의 수준이어야 한다.무위포용주의에서 말하는 기본 규칙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국가나 사람의 신상을 유포하거나 협박할 수 없다.
둘째, 다른 국가의 주권을 무단으로 침해할 수 없다.
셋째, 공동체의 기본적 신뢰를 파괴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기본 규칙 이외에는, 각 국가와 개인이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 어떤 국가는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고, 어떤 국가는 왕정을 추구할 수 있다. 어떤 국가는 전쟁을 할 수 있고, 어떤 국가는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 이 모든 다양성이 허용된다. 이렇게 했을 때, 정치는 어떻게 변할까? 정치는 다시 창조성을 얻는다. 각 국가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각 유저는 자신의 관심에 맞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이것이 정치의 부활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정치가 다시 "놀이"로서의 특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결과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을 탐구할 수 있다. 이것이 정치가 가진 가치 있는 측면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정치가 "의무"가 아니라 "놀이"가 되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한다. 왜인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흥미에서 비롯된 활동을 더 오래 지속하고, 더 창의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를 부활시키기 위해 운영자가 해야 할 일은, 규칙을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규칙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다양한 형식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위포용주의의 정치관이다.
제12장 | 분별이성 자체에 대한 반성적 실천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분별이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다. 이 책의 전체를 통해 우리는 분별이성의 오류를 지적해 왔다. 하지만 이 지적 자체도 분별이성의 산물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우리는 분별이성을 비판하기 위해 분별이성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도구를 비판하는 것이 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칼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칼에 대한 지식을 사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분별이성의 한계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분별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분별이성을 사용할 때, 그것의 한계를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반성적 실천(反省的 實踐)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성적 실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하면서 동시에 그 행동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분별이성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나는 지금 분별이성을 사용하고 있다", "이 판단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 판단이 다른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카국계의 구성원들이 이 반성적 실천을 할 수 있다면, 공동체는 질적으로 달라진다. 어떻게 다를까?
첫째,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 구성원은 자신이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나는 지금 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 판단이 옳은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둘째,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틀렸다'고 보일 수도 있다. 내 판단이 나의 관점과 경험에 조건지어져 있을 수도 있다."
셋째,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내가 이렇게 본다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볼까? 내가 놓친 것이 있을까?"
이 세 가지 의식이 있을 때, 분별이성은 자신의 정당한 역할을 한다. 분별이성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돕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분별이성은 하나의 도구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이것을 실제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카국계의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반성적 실천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기존 유저가 신규 유저를 판단할 때, 그 유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ㅡ "저 사람은 규칙을 어겼다. 이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다. 하지만 잠깐, 나는 지금 그 사람을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려는 건 아닐까? 나는 한 번의 행동으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려는 건 아닐까? 아마 그 사람은 규칙을 몰랐던 것뿐이고, 배우면 고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 나는 그 사람에게 규칙을 설명해주고, 배울 기회를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반성적 실천이다. 구성원이 자신의 분별이성의 작동을 의식하고, 그것을 통제함으로써, 더욱 공정하고 포용적인 판단에 도달한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친인류 유저가 반인류 유저의 의견을 들었을 때, 그 유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ㅡ "저 의견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우리가 봤을 때는 그 논리가 모순된다. 하지만 잠깐, 나는 '우리'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저 논리가 일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아, 나는 저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이것도 반성적 실천이다. 자신의 판단을 하면서 동시에, 그 판단의 한계를 의식하고,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이런 반성적 실천이 카국계에 퍼지면, 공동체의 문화가 변한다. 배제 대신 포용이 일상화된다. 맹목적 확신 대신 성찰이 일상화된다. 분별이성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그것의 한계를 의식한 상태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반성적 실천이 각 개인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운영자가 강제할 수 없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판단 과정을 관찰하고, 의식하고, 조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것이 무위포용주의의 실천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규칙과 제도도, 개별 구성원의 이러한 반성적 의식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의식이 있을 때, 어떤 규칙이 없어도 공동체는 자율적으로 건강하게 유지된다.
결론 | 손지위복(損之爲復)
노자의 도덕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ㅡ "손지위복(損之爲復), 덜어내는 것이 곧 회복이다." 이 구절은 이 글의 전체 논의를 완벽하게 요약한다.
카국계가 현재 겪고 있는 위기는 무엇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이 쌓여서 생긴 것이다. 너무 많은 규칙, 너무 많은 배제, 너무 많은 적대, 너무 많은 분별. 이 모든 것들이 축적되면서 카국계는 질식하고 있다. 회복은 덜어내는 것에서 온다. 운영자는 불필요한 규칙을 제거해야 한다. 구성원들은 무의식적인 배제를 멈춰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인 판단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설 것인가? 환대, 포용, 자유방임, 신뢰, 그리고 반성적 의식이다. 이것들이 채워질 때, 카국계는 다시 살아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별이성의 폐기가 아니라, 분별이성의 올바른 위치에 대한 인식이다. 분별이성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규정할 수는 없다. 분별이성은 도구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제시한 무위포용주의는 새로운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도가의 고대 지혜와 칸트의 비판 정신, 그리고 현대의 공동체론의 통찰을 모아 카국계의 구체적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그것은 실현 가능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 대안이 실현되려면, 각 개인의 깨달음과 노력이 필요하다. 운영자가 기본을 선언하고, 구성원들이 포용의 태도를 기르고, 모두가 반성적 의식을 유지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눈에 띄게 빠르지 않을 것이다. 문화의 변화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의 습관이 바뀌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 시간을 감수할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읽는 모든 카국계의 구성원들에게 말하고 싶다. 너는 이 공동체의 일부다. 너의 선택과 행동이 공동체를 만든다. 너가 신규 유저를 어떻게 대하는가, 너가 다른 진영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가, 너가 자신의 판단에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ㅡ 이 모든 것들이 카국계를 형성한다.
너는 분별이성의 노예일 수도 있고, 분별이성의 주인일 수도 있다. 그것은 너의 선택이다. 무의식적으로 습관을 따르고, 타인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포용하고, 다른 관점을 열어두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너에게 두 번째 길을 제안한다. 자신의 판단 과정을 관찰하라. 네 분별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라.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공동체의 기본을 지키되, 그것을 강압하지 말라. 신규 유입을 환대하라. 진영을 넘어선 대화를 시도하라.
이 모든 것들이 모여질 때, 카국계는 부활한다. 신규 유저들이 들어오고, 정치가 살아나고, 공동체가 활성화된다. 이것이 무위포용주의가 약속하는 미래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렇게 흘러서 결국 바다에 이른다."
카국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압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를 때, 카국계는 그 본래의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이 소통과 친목이라는 공동체의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덜어낼 시간이다. 규칙을 덜어내고, 배제를 덜어내고, 판단의 절대성을 덜어내자. 그 자리에 환대와 포용과 신뢰가 들어설 수 있도록. 이것이 이 글이 제시하는 길이다. 이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이 길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길들은 이미 시도되었고, 실패했기 때문이다. ㅡ 이제 남은 것은 선택이다. 우리는 이 길을 가기로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같은 방식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기로 선택할 것인가? 나는 전자를 선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너도 그 선택을 함께 해주기를 바란다.
| "知常容,容乃公,公乃王,王乃天,天乃道,道乃久。 항상함을 알면 포용할 수 있고, 포용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왕 같아지고, 왕 같아지면 하늘 같아지고, 하늘 같아지면 도에 이르고, 도에 이르면 오래간다." |
| 도덕경 제15장 中 발췌 |
카국계가 오래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포용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마지막 메시지다.
막음 | 정리
이 글은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이 글로 인해서 비롯되는 카국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작은 시발점일 뿐이며, 실제적, 현존적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 변화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는, 카국계의 모든 구성원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평가 | 비판
| 내용 |
| 성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