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근대사 요약
오스만 2세, 부패해진 예니체리를 해체하려다 실패하여 살해당함. 이후 100년간 예니체리가 부패한 상태로 지속되어 오스만 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이후 셀림 3세가 다시 오스만 제국의 서구화를 시도하였으나 다시 예니체리의 반발로 실패하여 살해당함.
마흐무트 2세가 유럽식으로 무장한 신군을 조직하여 화포로 예니체리 막사를 쓸어버림(행운의 사건)
마흐무트 2세,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정책인 탄지마트를 시작하여 제도적인 근대화가 차대 파디샤인 압뒬메지트 1세대까지 이어졌으며 전체 탄지마트 기간 동안 압뒬메지트 대에 제도적인 근대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짐.
다음 파디샤가 된 압뒬아지즈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초로 외교 목적으로 유럽을 순방한 파디샤가 되었으며, 유럽의 루브르 박물관에 인상을 받은 압뒬아지즈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건설을 명령함.
그러나 근대화와 교육의 개선으로 인해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지식인 계층이 생겨났고, 오스만의 전제군주정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들이 주도한 1차입헌혁명에 의해 압뒬아지즈가 폐위되고,민주화에 대해 긍정적이였던 무라드 5세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가 됨.
이후 5일 만에 폐위된 압뒬아지즈가 암살당했고, 이 사건의 충격으로 무라드 5세의 정신질환이 심화되어 파디샤 직무의 수행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한 군부는 무라드 5세를 3개월만에 폐위하고, 압뒬하미트 2세가 파디샤에 추대됨.
초기의 압뒬하미트는 개혁에 옹호하였으나, 언론의 개방으로 인해 민족주의가 발달하여 지방에서의 반란이 잦아지자,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전제군주제를 복구함을 넘어 이전보다 더 강력한 전제군주정을 구축하고, 입헌군주제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여 붉은 술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됨.
그러나 이 시기에 할리치의 조선소가 서구화되고, 히자즈 철도가 건설되고, 공군이 창설되는 등 물질적인 근대화가 대거 이루어졌으며, "유럽에서 무언가가 발명되었다면, 그게 무엇이든 오스만 제국에도 있어야 한다"라는 압뒬하미트 2세의 어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음.
그러나 압뒬아지즈의 때와 같이 교육과 생활 환경이 개선되어 서구 민주주의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 계층이 다시 생겨났고, 튀르크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였던 청년 튀르크당의 이스마일 엔베르를 주축으로 하여 다시 2차 입헌 혁명이 발생하여, 입헌군주제로 다시 환원되었다.
혁명 1년 후, 압뒬하미트의 범이슬람주의 정책에 향수를 느낀 일부 군부의 압뒬하미트 2세의 복권을 위한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청년 튀르크당은 압뒬하미트 2세를 폐위하고 차나칼레로 유배를 보내고, 허수아비 군주인 메흐메트 5세 레샤드를 파디샤에 세움.
민주주의를 표방하였던 청년 튀르크당은 이후 변질되어 의회를 해산시키고 헌법을 정지시킨 뒤 삼두독재 시대를 열었으며, 이때 압뒬하미트 2세의 균형 외교 정책이 완전히 파기되고, 친독 노선으로 갈아타게 되고,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에 휘말리게 됨.
1차대전에 휘말린 오스만 제국은 결국 1917년 협상국에게 항복했으나, 성지인 메디나에서는 파흐레딘 파샤가 항복을 거부하여 1918년 1월까지 전투가 이어짐.
이후 세르브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은 영국에게 통제되기 시작했고, 오스만 제국의 지방 지역이 유럽 열강에 의해 분할되고, 레반트와 메소포타미아, 히자즈와 예멘 지역을 전체 상실함.
메흐메트 6세 바히데딘의 지방의 군벌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케말 파샤는 이에 따르지 않고 1919년 삼순에 상륙하여 군벌들을 통합하여 열강의 공격에 맞섬.
1922년 10월, 케말파샤가 이끄는 대국민의회가 영국의 지배로부터 이스탄불을 수복하고, 친영이였던 메흐메트 6세 바히데딘을 폐위하여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으며, 칼리파직은 압뒬메지트 2세가 승계받음.
1923년,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튀르키예 전쟁이 끝나게 되고, 현대의 튀르키예가 형성됨
이후는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