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 분쟁

하파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23일 (토) 13:51 판

개요

Western Australia Conflict, The Clash

1933년부터 1994년까지 61년간 이어졌던 서호주 독립파와 왕당파 간의 분쟁. 호주 왕국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점이기도 하다. 독립파-왕당파 간의 분쟁에 초점을 두었으나, 독립파-중앙정부 간의 갈등이 더욱 비중있는 사건이다.

역사

사실 서호주는 본래 연방 가입에 부정적이었던 식민지 중 한 곳으로, 대표적인 연유로는 골드 러시의 여파로 시드니맬버른 등의 동부 해안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소득이 불균형해지고 연방 차원에서도 별다른 지원 정책을 약조하지 않아 불만이 고조되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주정부만의 원한에 불과하였고, 나름 경제 회생에 대한 희망이 충만했던 주민들의 압력으로 서호주의 연방 가입이 성사되었으나 이후에도 캔버라가 수도로 지정되면서 동부에 인프라 편중현상이 지속되었고 이는 현지 주민들로 하여금 서호주가 다른 주들에 비해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되는 일명 신데렐라 주(Cinderella State)로 각인되기에 충분하였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서호주 정부와 주민들은 연방 당국에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불만은 서호주 주간지 더 선데이 타임즈(The Sunday Times)[1]의 소유주이자 분리주의자인 제임스 맥칼럼 스미스(James MacCallum Smith)에 의해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대중들의 심기를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분리주의 강세에 힘입은 스미스의 주도 아래 분리주의 동맹이 설립되고, 웨스트레일리아 독립군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1930년대 대공황이 닥치며 서호주의 주요 수출품인 밀의 가격이 폭락하여 낙농업이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실업률은 30%에 달하여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당하는 경제적 혼란이 도래하자 실업자들이 재무청사를 점거해 농성을 벌이고, 호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개시하는 방식으로 고충을 토로하나 연방 정부는 이들의 사정을 외면한 채 긴축정책을 실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언론플레이를 시도하던 스미스는 이를 기회삼아 노동자들을 대변하며 분리주의의 필요성을 대대적으로 역설해 대중들을 선동한다.

분리주의 여론이 득세하자 서호주 연방연맹이 조직되어 연방 탈퇴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연방 정부에서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조셉 라이언즈 전 총리와 조지 피어스 상원의원, 빌리 휴즈 전 총리를 파견하여 주민들을 회유하기 시작하나, 사태를 연일 방관하던 연방 당국을 불신하던 주민들은 이들을 향해 계란세례를 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친연방주의자들은 서호주의 고충을 조사하기 위한 헌정위원회를 개최하길 희망하였으나 깊이 뿌리내린 반연방 정서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3년 4월 8일에는 제임스 미첼 국민당[2] 주총리의 주도로 서호주의 분리독립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기에 이른다. 서호주 국민당은 탈퇴를 지지했고, 서호주 노동당은 잔류를 호소하는 식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총 68%의 유권자들이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고, 극성 연방주의자들이 대다수인 일부 광산 지역에서만 반대표가 우세를 점하였다. 서호주 국민당은 투표에서 승리하였지만 이내 실각하였고, 노동당이 정권을 탈환하게 된다. 서호주 노동당은 친연방주의 정당으로서 분리독립에 거세게 반대하였으나 국민투표 결과에 불복할 수는 없었기에 형식상의 절차로 독립을 승인받기 위한 대표단을 런던으로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서호주 노동당은 연방 정부와의 밀실회담을 통해 영국 하원에 분리독립 부결을 청원한다.

영국 하원은 투표를 최종 부결시켰고, 서호주의 독립이 사실상 좌절됨에 따라 상황은 반전된다. 결국 분리세력은 호주 연방은 탈퇴하지만 영연방국으로서 자치를 보장받고자 하는 친영파(웨스트레일리아 독립군)와 호주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별도의 국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공화국파(웨스트레일리아 공화국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혁명파(서호주 공산당) 등으로 세력이 다분화된다. 양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은 서호주 독립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무력 투쟁을 전개하고, 이에 분개한 친연방주의자들도 서호주 연방연맹으로 결집하여 분리주의에 대응하는 무장단체를 창설한다. 이로써 분리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 갈등이 본격화된다.

하지만 두 세력은 무장 사정이 좋지 못하여 초기에는 분쟁이라 하여도 둔기를 이용한 집단 패싸움에 불과하였다. 본격적으로 화기가 동원된 시기는 1935년으로, 당시 국민당 총재 존 라담이 당내 개혁을 가시화하면서 국민당 내 분리주의자들이 대거 출당되었고 이들 중에는 상당한 부를 축적한 중진 의원들과 앞서 언급한 제임스 맥칼럼 스미스같은 언론재벌도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토사구팽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연방 정부에서 분리주의 정당 및 정치인의 출마를 범법화 시키면서 의회 진출조차 좌절되자 분리주의 세력들을 적극 지원하며 연방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1차대전 이후 재고가 쌓여있던 미국산 무기들을 밀수해 분리주의자들에게 보급하며 무장 세력을 양성해나가게 된다.

분리주의 세력은 동부 지역에 대한 억하심정으로 인해 서호주 이외에도 퀸즐랜드, 뉴사우스웨일스 등 다른 주에서도 무력 투쟁을 감행하여 인명 피해를 야기하기 시작했으며, 반전 여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살상 대상을 지배 세력을 넘어 민간인으로 확대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행보는 다른 주들이 위협감을 느껴 결속하는 효과를 낳게되고, 점차 서호주를 배제하는 경향이 호주 사회에서 만연하기 시작한다. 비록 반전 여론을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하였지만 서호주와 다른 주들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별도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양 지역 간의 국경선이 사실상 확립될 조짐을 보이는 등 분리주의자들의 의도대로 정세가 흘러가자 조셉 라이언즈 총리는 현 체제가 지속될 수 없음을 판단하고 1935년에 주정부협의회를 개최해 신 연방국가를 모색하며 변화를 예고하였는데, 이를 캔버라 총독부에서 개최했다 하여 '캔버라 회의' 또는 '1935 회의' 라 칭한다.

골드 러시 이후 영국에서 호주로 이주한 앵글로 오스트레일리아인(Anglo-Australian)들은 이전부터 호주 정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고, 특히 상대적으로 부유한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에 그 현상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영국의 군주제와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매우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강경 연방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앞서 언급한 1935 주정부협의회에 폭넓게 관여한 이들은 "국론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통합의 선구자가 필요시되는 상황." 이라며 호주를 연방군주제에 입각한 왕정으로 개국할 것을 제언하였다. 재위요구자로는 1차대전 당시의 명망있는 호주군 사령관이자 빅토리아 토착 가문인 링컨 가문(House of Lincoln)[3]의 수장 헨리 에드먼드(Henry Edmund)[4]를 지명하였다. 하지만 정통성이 전무한 일개 가문의 수장을 국왕으로 옹립하자는 주장에 각계가 우려를 표하였다. 또한 그는 호주에서 출생했지만 모계 상으로는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혈통을 가졌기에 반외세 성향이 짙은 공화파 분리주의자들이 극렬히 반발하였다.

연방공화국과 자치령 존속 등의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6개 주와 1개 준주(노던 준주)는 1936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 수립안에 서명하며 호주 왕국의 기반을 마련한다. 호주 왕정 수립건은 대표단을 통해 영국 하원에 회부되었고, 영국 국왕이 호주의 독립을 승인하며 1937년 1월 1일, 호주 왕국이 탄생한다. 헨리 에드먼드의 대관식이 치뤄지고 신 내각이 구성되며 호주는 주권국으로서의 기틀를 갖추어 나가는 한편, 서호주가 왕국을 구성하는 일개 주가 되었다는 사실에 격분한 분리주의자들은 투쟁 수위를 높여나갔다.

헨리 1세(헨리 에드먼드의 왕명)는 호주 친화적인 면모를 강조하고자 링컨 왕조를 마틸다 왕조(House of Matilda)로 개칭하고 분리주의 세력에 협상을 제안하며 유화적인 태도를 고수하였지만 그들은 헨리를 반겨줄리 만무했고, 오히려 그는 독재자로 낙인찍혀 늘상 위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내야했다. 급기야 암살 미수 사건마저 벌어져 헨리 1세의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지자 근왕주의자들은 서호주의 에스페란스(Esperance)라는 지역에서 왕당파 무장단체(에스페란스 방위대)를 조직하여 분리주의자들과 격돌한다. 추가 인명피해를 방지하고자 정부는 비상 내각을 구성하여 서호주에 호주군을 배치하는 초강수를 두게된다. 군정까지 검토 대상이었으나 서호주 정부의 반발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고 일본군인도네시아를 기점으로 남하할 조짐을 보이자 독립파와 왕당파는 1940년 9월 16일에 임시 휴전을 결의하며 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종전 이후에도 별 다른 충돌이 보고되지 않자 평화 무드가 조성되고 협상이 진전되나 싶었으나 1943년, 헨리 1세가 즉위 6년만에 건강 악화로 승하하고, 1957년에 공화국파가 퍼스 경찰관공서를 습격해 무기고를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져 갈등의 불씨가 재발화된다. 혁명파가 주도하는 공산당은 서호주 길드포드(Guildford)에 소재한 성당에서 총기 난사를 벌여 신자들의 반감을 샀고, 무장단체인 개신교 왕당파(Protestant Royalist)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사건 경위를 보고받은 호주 정부는 이를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여 분리주의 세력을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그들을 영장 고지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서호주에 배치된 호주군은 산발적 테러에 지쳐있던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정부의 무영장 체포와 호주군의 폭정에 반발한 일부 시민들이 집회를 개시하자 군에서는 분리주의 세력의 기만책으로 판단하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응수하며 진압에 나선다. 진압에 밀린 시위대는 해밀턴 힐(Hamilton Hill) 이라는 지역으로 패퇴했고 호주군이 이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일부 병력들의 집단 발포로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이 사건을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이라 칭하게 된다. 사상자들이 모두 비무장이었다는 점에서 호주 최초의 집단 학살사건으로 기록되어있다. 비난이 쇄도하자 피해자들 대상으로 철저한 배상이 이루어지고 현장 지휘관들은 군사재판으로 회부되었으나 정부는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군대만큼은 철수시키지 않으려 했다.

일부 유족들이 무장단체에 가담하고 소년병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으나 , 장기적으로 분리주의 세력은 점차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전 신데렐라 주와 같은 처지와 달리 60년대에 들어서 풍부한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서호주에 광산이 대거 개발되고 광물을 수출하기 위해 조선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1인당 소득이 급증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분리독립을 지지할 이유가 사라졌고, 무장단체에 지원되는 물자도 전무하다시피 하여 분리주의는 세력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결국 일부 분리주의 골수분자들은 대중의 이목을 끌고자 시드니의 힐튼호텔에 폭탄테러를 감행한다. 폭탄을 실은 차량은 호텔 외부에서 폭발하여 3명의 사망자와 1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힐튼호텔에서는 영연방 정상회의가 진행 중이었기에 파급력이 컸다. 이는 분리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증대시켰고 대외적으로도 테러집단으로 각인되며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다. 한편 사전 대비가 미비하였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정부는 보안정보국(Australian Security Intelligence Organisation, 내무부 직속 방첩기관)을 동원하여 테러 주동자들을 색출해내기 시작했으며, 연방청(Commonwealth Police Force)과 캔버라 경찰청(Australian Capital Territory Police)을 현재의 연방경찰(Australian Federal Police)로 통합시킨 뒤 대테러 수사 부처를 신설해 치안을 강화한다.

1980년부터 분리주의파 간부들이 대거 사법조치되고, 1986년 독립군의 주도 아래 러셀가(Russell Street)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수사망은 더욱 좁혀지게 된다. 조직의 기반이 흔들리는 가운데 공화국파의 수장이었던 레오 오토(Leo Otto)가 1994년 2월 23일, 분리주의 세력의 대표 자격으로 정부에 3자(정부-독립파-왕당파) 회담을 제의한다. 정부와 양 세력은 미국 트렌트 로트(Trent Lott) 상원의원을 회담의 공동의장으로 임명하고 종전과 주둔군 철수, 서호주의 연방가입 재확인을 골자로 한 퍼스 협정을 조인하였다. 조약 체결 직후에는 이를 반대하는 독립파와 왕당파 주도로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주민투표 결과 86%의 유권자들이 서호주의 연방 잔류를 희망했고 결론적으로 양 세력은 투쟁을 포기하고 무장을 해제하게 된다. 이로써 61년간 이어졌던 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한 채 막을 내린다.


  1. 당시 서호주의 지역신문.
  2. 자유당의 전신.
  3. 마틸다 왕조의 전신.
  4. 이후 헨리 1세로 추대되는 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