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국가 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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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 6년 10월 ~ 30년 7월 |
→ | 신나라부흥운동 37년 1월 ~ 51년 7월 |
→ | 후신 52년 9월 ~ |
신 新│Sin Dynast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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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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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전쟁 종전 직후의 신 (9년 7월) 연한 파란색은 김해전쟁 이후 병합한 영토 | |||||
| 6년 10월 20일 ~ 30년 7월 12일 |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 김 | 니카제국 | ||||
| 별칭 | 전신(前新) | ||||
| 위치 | 룡도 최서남단 포인트 분지 → 룡도 서남부 | ||||
| 수도 | P.H. → 히메지시(姫路市) | ||||
| 민족 | 신족 | ||||
| 언어 | 국제어, 낙조반도어 | ||||
| 문자 | 룡자 | ||||
| 종교 | 천명교[3] |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 국가 원수 | 왕[4] | ||||
| 국성 | 점가 신씨(點家 新氏) | ||||
| 주요 국왕 | 분쟁왕 (6년 10월 20일 ~ 29년 7월 1일)[5] 단명왕[6] (30년 6월 12일 ~ 7월 12일)[7][8] | ||||
| 현재 국가 | |||||
개요
역사
자세한 내용은 신/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행정구역
자세한 내용은 신/행정구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대 군주
| 대수 | 묘호 | 시호 | 이름 | 출생 | 사망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추존 | 시조 (始祖) | 무명상왕 (▨▨上王) | 신폭렬 (新暴裂) | BCE 59년 4월 13일 | 12년 6월 11일 | - | - | 창릉비 (昌陵碑) |
| 01 | 태조 (太祖) | 분쟁민평신중개혁태왕 (紛爭民平神仲改革太王) | 신언후 (新彦珝) | BCE 39년 1월 14일 | 29년 7월 1일 | 전광(戰狂, 6년 10월 ~ 12년 6월) 숙모(肅慕, 12년 6월 ~ 29년 7월) | 6년 10월 ~ 29년 7월 | 분쟁태왕릉 (紛爭太王陵) |
| 고조 (高祖) | 고조 성황제 (高祖 聖皇帝) [9] | |||||||
| 02 | 무종 (武宗) | 병신배란대왕 (兵信配瀾大王) | 신풍헌 (新風獻) | BCE 14년 4월 22일 | 30년 7월 14일 | 병살(兵殺, 29년 7월 ~ 30년 5월) | 29년 7월 ~ 30년 5월 | (辱陵) [10] 공유릉 (共有陵) |
| 03 | - | 개 (改 [11][12] | 신남용 (新男慂) | 4년 10월 17일 | 30년 7월 14일 | 병살(兵殺, 30년 5월 ~ 6월) [13] | 30년 5월 ~ 6월 | 공유릉 (共有陵) [14] |
| 04 | - | 단명가국대왕 (斷冥家國大王) [11] | 신명길 (新明吉) | 6년 5월 4일 | 30년 7월 12일 | - | 30년 6월 ~ 7월 | 공유릉 (共有陵) [14] |
여담
- 신은 수도 없이 많은 반란을 일으킨 국가로 유명한데 해당 국가는 총 두 번의 반란 끝에 건국 된 국가다.
- 신의 왕릉의 경우 상당히 특이한데, 왕과 왕비를 같은 왕릉에 매장한다. 그 어떤 국가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라 왕릉 구분하기 편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 편이다.
- 해당 국가는 사실상 태조를 제외하곤 전부 왕이라고 하기 뭐 할 정도의 업적을 보인 국가인데, 무종이 국가를 버리고 피란한 시점 부터는 그 신조차도[15] 대왕(大王) 칭호에서 왕(王)으로 격하했을 정도다.
- 제2차 신씨 숙청 이후 신랑과 신상만 생존해 대를 이을 수 있었는데, 신랑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남겨둔 채 제4차 포인트 반란을 이끌다 제국군에게 사살됐다. 신상은 살아남아 현재 후신의 추존왕으로 추존되었다.
- 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신에서도 왕후는 단 한 명만 두고 있는데, 이로 인해 혈통이 끊기면 다른 분파를 찾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 ↑ 신폭렬이 사하기 전까진 김족의 혈통이었으나 그의 사후 신족으로 분리되었다.
- ↑ 신의 경우, 김에서 혁명을 일으켜 건국된 국가인데 김은 도시 부터 사건들이 대부분 영문이었으며, 신 또한 자신의 도시명이나 수도 등이 영문인 점을 착안해 공용 문자인 듯 했으나 진로시가 설치되며 룡자를 쓰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지금은 미사용 되는 문자가 되었다.
- ↑ 분쟁왕을 신격화한 종교다.
천명신화 - ↑ 국제적 연호를 해당 국가의 연호로 사용했기에 황제국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황제라고 칭하진 않았다.
- ↑ 니카제국의 추존 황제일 만큼 세운 업적이 많아 사실상 신 처럼 치부되는 왕 중 하나다.
- ↑ 단명왕은 자신의 형인 개신왕과 같이 묘호가 없던 국왕인데, 후신이 왕조실록을 개조함과 동시에 묘호를 수여했다.
- ↑ 가장 불쌍한 왕인데, 즉위와 동시에 병신왕이 뿌린 똥을 치우기 위해 항복 의사를 표했으나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김의 김씨 왕가에서 숙청을 일으키며 가문 전체가 몰살됐다. 그러나 신서라의 희생으로 삼남이었던 신상과 그의 아들이 살아 남는데 성공하며 후신이 건국될 수 있었다.
- ↑ 왕호의 단명은 짧을 단(短)과 목숨 명(命)일 거 같지만, 끊을 단(斷)과 어두울 명(冥)으로 침체기[신말니초]를 끝내겠다는 의미를 지녔다.
- ↑ 니카제국의 추존 황제다.
- ↑ 이명은 병신왕릉(兵信王陵).
- ↑ 11.0 11.1 굵은 글씨는 후신의 충신왕이 추가로 올린 존호다.
- ↑ 52년, 후신의 국왕 충신왕 건의로 개병신(改秉臣)에서 개신(改臣)으로 정정되었다.
- ↑ 이때도 병신왕의 연호를 썼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급하게 즉위하여 연호를 지정 못 했다는 게 정설로 치부되고 있다.
- ↑ 14.0 14.1 김이 주도한 제2차 신씨 숙청으로 인해 유해가 김에게 있었는데, 김에서 신 왕조 능멸 사건이 발생하자 신-니카 김 북벌 전쟁을 일으켜 김을 분할 점령한 뒤, 유해를 수습해 욕릉에 신씨 왕가의 유해를 매장했고 이때부터 공유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 ↑ 아무리 쓰레기같은 행보를 보였다 한들 자신의 전통성을 우상화하여 업적을 과시하던 국가가 바로 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