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다르 1세(식혜)

식혜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4일 (목) 19:57 판 (→‎작위)
유고슬라비아 국왕 휘장.png
유고슬라비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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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제2대 국왕
알렉산다르 1세
Александар I

Kralj aleksandar1.jpg
왕호
알렉산다르 1세
Александар I
출생
1888년 12월 16일
몬테네그로 공국 체티네
사망
1934년 10월 9일 (45세)
프랑스 마르세유
묘소
다뉴브 토폴라 오플레나츠
재위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국왕
1921년 8월 16일 ~ 1929년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왕국국왕
1929년 10월 3일 ~ 1934년 10월 9일
서명
1920px-Alexander I of Yugoslavia Signature.png
이름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가문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배우자
루마니아의 마리야[1]
자녀
페타르 2세, 토미슬라브, 안드레이
아버지
페타르 1세
어머니
몬테네그로의 류비카[2]
형제
옐레나, 밀레나, 조르제, 안드레이
종교
세르비아 정교회

Offical Portrait of King Aleksnadar I.png

공식 초상화

개요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국왕(1921~1929)이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제2대 국왕. 남슬라브 민족을 통합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워 통일왕 알렉산다르(Александар Ујединитељ)라고도 불린다.

작위

유고슬라비아 국왕 휘장.pngRoyal Monogram of King Alexander I Yugoslavia.svg
문장모노그램
  • 세르비아의 알렉산드르 2세 카라조르제비치 전하 Његово Светло Височанство кнез Александар II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Србије (1888년 12월 16일 ~ 1903년 6월 15일)
  •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자 전하 Његово Краљевско Височанство Принц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Србије (1903년 6월 15일 ~ 1909년 3월 27일)
  •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세자 전하 Његово Краљевско Височанство Принц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ник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Србије (1909년 3월 27일 ~ 1918년 12월 1일)
  •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세자 전하 Његово Краљевско Височанство Принц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ник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СХС (1918년 12월 1일 ~ 1921년 8월 16일)
  •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알렉산다르 1세 카라조르제비치 국왕 폐하 Његово Величанство краљ Александар I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СХС (1921년 8월 16일 ~ 1929년 1월 6일)
  •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 카라조르제비치 국왕 폐하 Његово Величанство краљ Александар I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Југославије (1929년 1월 6일 ~ 1934년 10월 9일)

생애

출생과 성장과정

알렉산다르 1세는 1888년 몬테네그로의 당시 수도였던 체티네에서 페타르 1세조르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페타르 1세는 당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몬테네그로의 공주였다.[3]

알렉산다르는 어머니 조르카가 산후 부작용으로 사망한 1890년까지 체티네에서 살다가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 갔으며, 열 살이 되던 1898년 러시아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1903년 페타르 1세가 세르비아의 왕으로 귀국했을 때 알렉산다르도 귀국하여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다. 당시 알렉산다르의 나이는 1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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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왕자, 1904년

알렉산다르는 자신의 형 조르제와는 달리 아버지의 뜻에 따르려고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그의 형 조르제는 공격적인 성격에 자주 폭력을 휘둘렀으며 스캔들도 일으켰다. 이러한 이유로 페타르 1세는 조르제에게 왕위계승권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으며, 조르제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자 1909년 4월 알렉산다르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했다.

왕세자와 섭정으로서의 알렉산다르

라쉬카 지방과 마케도니아를 놓고 오스만 튀르크와 발칸 연합군이 싸운 제1차 발칸 전쟁, 그리고 뒤이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를 놓고 싸운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왕세자 알렉산다르는 세르비아 제1군의 명목상의 사령관이었다.

발칸 전쟁에서 승리한 세르비아 내부에서는 고령의 페타르 1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알렉산다르 역시 아버지 페타르 1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이에 페타르 1세는 처음에는 퇴위를 거절했지만 결국 1914년 6월 고령과 질환을 이유로 세르비아 국왕의 자리에서 임시 퇴위, 그의 아들 알렉산다르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이후 알렉산다르가 세르비아 정치에서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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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방문한 섭정자 알렉산다르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알렉산다르는 세르비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전투를 지휘했고 체르산 전투와 콜루바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알렉산다르는 세르비아군이 오스트리아군에 밀려 그리스의 크르프 섬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아피스를 중심으로 한 ‘검은 손’ 조직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니콜라 파시치와 ‘솔룬 재판(1917년)’을 꾸몄다. 아피스 대령은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를 살해하고 정권을 무너뜨린 1903년 5월 반란의 주도자로 당시 대위였다.

말하자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복원에 있어서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다르는 아피스 대령과 9명의 장교들이 자신의 암살을 모의했다고 꾸며 체포했다. 그 중 아피스 대령과 두 명의 장교에게는 총살형을,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투옥한 후 전역시켰다. 비록 1차 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알렉산다르는 이 조작 사건으로 인해 위신이 추락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성립과 왕위 등극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알렉산다르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이 포함된 남슬라브 민족 통일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1918년 11월 24일 세르비아와의 통일을 선포하고 통일을 어떠한 형식으로 이룰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베오그라드에 세 명의 협상단을 파견, 스토얀 프로티치 등의 세르비아 협상단과 그 방법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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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푸 선언

그 결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알렉산다르에게 통일을 청하고 알렉산다르가 그 요청을 수락하는 형태로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알렉산다르는 1918년 12월 1일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Kraljevina SHS)’의 수립을 선포했다(12월 1일 통일). 당시 알렉산다르는 왕을 대신한 섭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왕'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다. 임시 퇴위하였던 페타르 1세가 1921년 8월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하자 섭정자 알렉산다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결혼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왕이 된 알렉산다르는 1922년 2월 루마니아에 가서 루마니아의 군주 페르디난드의 차녀 마리야 호엔촐레른과 약혼하고 같은 해 5월 베오그라드 성 아르한겔 미하일로 교회에서 결혼하였다. 마리야는 영국 에드워드 7세의 조카딸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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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2세와 마리야의 결혼식

알렉산다르는 마리야와의 사이에 세 명의 아들(페타르, 토미슬라프, 안드레이)을 두었으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서로에게 행복하지 않았다.

헌법 제정, 헌법 중단 그리고 독재의 길

1918년 'SHS왕국'이 출범했지만 국내 정치 상황은 줄곧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알렉산다르는 '크로아티아공화농민당(HRSS)'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6월 28일 왕국의 첫 헌법을 제정했다(비도브단 헌법). 비도브단 헌법에 따라 알렉산다르는 광범위한 입법권과 행정권을 획득했으며, 의회 소집권과 해산권, 법률 선포권, 전쟁 선포권, 강화 조약권 등을 가질 수 있었으며, 장관평의회를 구성하는 장관과 그 의장의 임명권을 가졌다. 이로써 알렉산다르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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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당 내에서의 암살 사건, 1928년

크로아티아계 농민당과 세르비아계 급진당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1928년 6월 베오그라드에 있는 의사당 내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세르비아 급진당 의원이었던 푸니샤 라치치가 크로아티아계 의원 두 명(파블레 라디치, 주라 바사리체크)을 살해하고 스테판 라디치를 포함한 세 명의 의원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알렉산다르는 '왕국'이 해체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으나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당수였던 스테판 라디치가 사망함으로써(1928년 8월) 염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자그레브에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등 정국이 어수선했다.

국내의 어지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929년 1월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블라트코 마체크과 스베토자르 프리비체비치가 연 회담이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하자 알렉산다르는 그 다음 날(1929년 1월 6일) 독재 체제 도입을 선포했다. 그는 비도브단 헌법을 폐기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출판물의 검열을 도입하고 자신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을 내각의 수반으로 임명했다. 그는 국가보호법을 되살려 농민민주연합을 탄압하고 그 지도자인 마체과 프리비체비치를 체포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심하게 탄압했다. 이로써 알렉산다르는 자신이 독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1929년 10월 알렉산다르는 국명을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명하였으며, 전국을 9개의 바노비나와 베오그라드로 재편함으로써 그동안 유지되어왔던 민족 중심, 역사 중심의 행정 체제를 개편했다.

알렉산다르의 독재 체제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 내부 정치 상황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과의 대외 관계만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알렉산다르의 독재에 불만을 표시했으며, 유고슬라비아와 소협상국을 이뤘던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도 독재를 비판했다.

이러한 대내외적 어려움에 직면한 알렉산다르는 자신의 독재를 조금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1931년 9월 헌법을 새로 개정했다('강제된 헌법' 혹은 ‘9월 헌법’). 하지만 '강제된 헌법'은 비도브단 헌법보다 훨씬 비민주적이었다. '강제된 헌법'은 군주가 비상 상황하에서 헌법과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필요한 조치를 취한 후 사후 의회의 동의를 구하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정당을 지역이나 민족 혹은 종교를 기반으로 설립할 수 없게 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 체계를 지향했다.

프랑스 방문과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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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직전의 알렉산다르 1세와 장 루이 바르투 외무장관

동맹국과 후원국들의 비판에 직면한 알렉산다르는 소협상국과의 관계 개선과 유고슬라비아의 국제 위상을 높일 필요를 느꼈다. 이에 알렉산다르는 1934년 선박 편으로 프랑스 방문길에 나섰다. 마리야 왕비는 알렉산다르와는 따로 기차를 이용하여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알렉산다르가 탄 배는 1934년 10월 9일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했으며, 프랑스 외무장관 루이 바소의 영접을 받았다. 알렉산다르는 환영 인파로 향하던 도중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 의해 저격되어 바로 숨을 거두었다. 알렉산다르의 베르사유 저격 사건에는 크로아티아 안테 파벨리치의 우스타샤와 ‘마케도니아내부혁명기구(VMRO)’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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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된 알렉산다르 1세의 관

알렉산다르 저격 장면은 프랑스의 한 방송국에 의해 생생히 기록되어 있으며, 미국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필름과 함께 현대사의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다.

가족관계

본인부모조부모증조부모
알렉산다르 1세
(Александар I)
페타르 1세
(Петар I)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조르제 페트로비치
(Ђорђе Петровић)
옐레나 요바노비치
(Јелена Јовановић)
페르시다 네나도비치
(Персида Ненадовић)
제브렘 네나도비치
(Јеврем Ненадовић)
요반카 밀로바노비치
(Јованка Миловановић)
몬테네그로의 류비카
(Љубица од црногорска)
니콜라 1세
(Никола I)
미르코 페트로비치네고시
(Мирко Петровић-Његош)
아나스타시야 마르티노비치
(Анастасија Мартиновић)
밀레나 부코티치
(Милена Вукотић)
페타르 부코티치
(Петар Вукотић)
옐레나 보이보디치
(Јелена Војводић)
자녀이름출생배우자/자녀
1남페타르 2세
(Петар II)
1923년 9월 6일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슬하 1남
2남토미슬라브 카라조르제비치
(Томислав Карађорђевић)
1928년 1월 19일바덴의 마르가리타 공주
슬하 2남 1녀
3남안드레이 카라조르제비치
(Андрија Карађорђевић)
1929년 6월 28일헤세의 크리스티나 공주
슬하 3남 2녀
  1. 본명은 '마리야 호엔촐레른 지그마링겐'. 루마니아의 군주 페르디난드 1세의 차녀였다.
  2. 본명은 '류비카 페트로비치-네고시(Љубица Петровић-Његош / Ljubica Petrović-Njegoš)'. 몬테네그로의 군주 니콜라 1세의 장녀였다. 페타르 1세와 결혼하면서 이름을 조르카로, 성을 카라조르제비치로 바꿨다.
  3. 당시 몬테네그로의 통치자였던 니콜라 1세의 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