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범천 Yoon Beom-che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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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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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19일 |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성진서울병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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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식공립보통학교 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 중동학교 와세다대학 전문부 | |||||||||||||||
성진 창업주 겸 초대 총수 성진전자 초대 회장 성진전자 초대 회장 복직 | |||||||||||||||
기업인 | |||||||||||||||
유교 → 불교 → 원불교 | |||||||||||||||
가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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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의 기업인. 성진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다. 전자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양대 주역이다.
생애
기업가 시절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정부의 신임을 받고 있던 윤범천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다. 임무를 마치자 윤범천은 공기업 사장에 임명되고, 경영의 실제를 배우며 만성적자와 부패의 온상이었던 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돌려놓게 되면서 기업인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중국과 부여를 돌아본 그는 부여와 대한의 중계무역을 하리라 결심했고, 1963년 남포시 (現 남포광역시)에서 성진물산주식회사 창업을 시작으로 무역업을 시작하였다.
윤범천이 1968년 성원일보를 통해 성진이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큰 반발에 부딪혔다. 사업허가가 난관에 부딪히자 윤범천은 박정희 당시 총리를 만나 전자산업은 장래성이 있는 사업이며 국가적 사업이 되어야한다고 설득하였고 박정희는 전자산업에 대한 개방 조치를 하여 성진이 전자산업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1969년 현 성진전자의 전신인 '성진전자공업'이 설립되었다. 성진전자가 개성에 새 공장을 지을 때 43만평 규모로 지으려고 했는데 이 때 임원들이 회사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자 "히타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 더 커야 하지 않겠나?"고 말해 43만평을 고집했다.
어록
짧은 인생은 영원 조국에 |
경인공난이 휴전될 때 쯤에 새긴 좌우명 |
신뢰를 얻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
성진자산운용 출범 당시 연설 中 |
자동차는 더이상 중공업이 아닙니다. 전잡니다! 전자... 전자, 반도체는 우리 성진이 제일 잘합니다! 성진자동차는... 우리 성진의, 엔진!입니다. |
성진자동차의 신차 '아테나' 발표회장에서 한 발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