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제국(1세계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이베리아 제국 국가문서입니다.)
 
잔글
55번째 줄: 55번째 줄:
 
이후 스페인은 1913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중립국임을 알리면서 1차 세계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스페인은 1913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중립국임을 알리면서 1차 세계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왕국도 얼마가지 못했다. 1918년 입헌군주제에 불만을 가진 공화파 스페인과 현 정부인 왕정파 스페인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하였고, 치열한 내전 끝에 1927년 왕정파 스페인이 승리하면서 내전은 끝이난다.
+
하지만 스페인 왕국도 얼마가지 못했다. 1918년 입헌군주제에 불만을 가진 공화파 스페인과 현 정부인 왕정파 스페인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하였고, 치열한 내전 끝에 1927년 왕정파 스페인이 승리하면서 내전은 끝이난다. 그러나 공화파 스페인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스 정부가 이베리아의 월경지인 이비야를 1928년 초에 점거한 후, 이를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에게 반환하였다. 후에 스페인과 프랑스는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져, 4-50년 즈음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도 일어났었다.
  
1927년부터 스페인은 내전복구에만 집중하며 세계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또한 1927년부터 스페인은 내전복구에만 집중하며 2차 세계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지쳐버린 시민들은 왕정을 뒤엎고 공화국을 건국하여 자신들의 뜻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당시 왕이 아니였던 펠리페 5세가 혼란을 틈 타 권력을 잡아 이베리아 제 2제국을 선포하며 1969년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로 변경하였다.
+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지쳐버린 시민들은 한번 더 왕정을 뒤엎고 공화국을 건국하여 자신들의 뜻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당시 왕이 아니였던 펠리페 5세가 혼란을 틈 타 권력을 잡아 이베리아 제 2제국을 선포하며 1969년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로 변경하였다.
  
 
펠리페 5세는 시민들이 왜 왕정을 뒤엎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국민의회' 를 설립하여 국민의 의견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자 국민들의 반발은 줄어들었고, 국왕도 국민과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이후 이베리아 제2제국은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펠리페 5세는 시민들이 왜 왕정을 뒤엎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국민의회' 를 설립하여 국민의 의견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자 국민들의 반발은 줄어들었고, 국왕도 국민과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이후 이베리아 제2제국은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2020년 8월 26일 (수) 12:28 판

이베리아 제국
이베리아 제2제국
Iberian Empire
이베리아 제국 국기.jpg
국기
이베리아 제국 국장.png
국장
국호이베리아 제국
Iberian Empire
상징국가국왕 행진곡
국화카네이션
국수황소
표어보다 더 멀리
PLVS VLTRA
자연환경면적(영토)505,990㎢
인문환경인구47,932,720명
공용 언어에스파냐어
정치국체군주제
정부형태전제군주제
국왕펠리페 6세
국민의회
의장
페드로 산체스
경제GDP약 $1조 4,278억
1인당 GDP$32,961

개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해 있는 전제군주제 제국이다. 입헌군주제였던 스페인 왕국이 몰락하면서 건국되었다. 현재 이베리아 제국은 포르투갈 영유권을 주장한다.

역사(1711~)(타국의 역사를 반영하지 않음)(수정예정)

1711년 이전에는, 이베리아 반도에 포르투갈 제국(이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하 스페인) 제국, 카탈루냐(이하 카탈루냐) 왕국이 있었다.(포르투갈 제국과 스페인 제국은 현실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카탈루냐 왕국은 현재 카탈루냐 지방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식민제국으로, 포르투갈은 브라질,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등 영토를 확장하면서 초강대국으로 꼽혔다.

하지만 1710년, 포르투갈의 국왕인 주앙 3세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정해놓은 왕태자도 없었다.)이에 포르투갈은 혼란에 빠졌다. 당연히 당시 식민지들도 혼란을 틈 타 독립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려는 야망이 있던 스페인의 국왕인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상황을 보고, 포르투갈에 속국이 되라고 최후통첩을 하였다. 하지만, 주앙 3세의 동생인 공작 테오도지오 2세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이내 자신이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스페인을 국제적으로 비난한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행보에 화가난 스페인이 결국 포르투갈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를 포르투갈-스페인 1차 전쟁이라 부른다.(1713년)

아직 상황이 진정되지 않았던 포르투갈이라, 그 많던 식민지를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715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패배하게 된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조용하게 남아있던 카탈루냐까지 집어삼키려 한다. 이러한 펠리페 2세의 행동에 시민들과 신하들은 반발하였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반발하던 신하와 시민들을 결국 처형시켜 카탈루냐까지 침략한다. 결국 카탈루냐는 별다른 저항없이 합병을 당하게 된다.(1720년)

이후 펠리페 2세는 국호변경을 선언하며, 1723년 이베리아 대제국(이하 이베리아)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베리아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2번의 전쟁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독립운동을 전개하게되고, 카탈루냐에서도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식민지와 카탈루냐를 강력하게 탄압하면서 무단통치를 실시하게 된다. 하지만 독립열풍은 계속되었고, 본토에서도 반발이 심하였다. 결국 여러 식민지와 본토에서도 폭동이 일어나고, 왕궁까지 피해를 입자 펠리페 2세는 리스본으로 피난을 가게된다. 하지만 리스본도 이미 점령당하였고, 결국 펠리페 2세는 분노한 포르투갈 시민들에게 잡혀 1749년 처형당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브라질은 1750년 독립하게 된다.

펠리페 2세 이후, 그의 아들이였던 펠리페 3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단통치로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봐 왔기 때문에 1751년 18세라는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직후 무단통치정책을 모두 폐지하고, 식민지 동화정책과 문화통치를 실시하게된다. 식민지에 대한 많은 정책으로 인해, 포르투갈 식민지와 카탈루냐는 안정화가 진행되어 안정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펠리페 2세가 싸놓은 똥을 치우느라 힘에 부쳤는지, 펠리페 3세는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1768년 지병으로 사망한다.

또 국왕이 사망한 이베리아는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1770년 펠리페 4세가 즉위하지만 결국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을 시작으로 포르투갈과 카탈루냐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가 전쟁을 선포한다. 이를 이베리아 식민지 전쟁이라 부른다.

아무리 강력한 국가여도 그렇게 많은 식민지가 한번에 전쟁을 일으키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이베리아는 결국 모든 식민지에 있던 군대를 해산시키며 패배선언을 한다. 이떄 이베리아의 모든 해외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된다.(1783년)

해외 식민지들의 독립에 영향을 받은 포르투갈은, 결국 1814년 이베리아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이베리아는 해체되고, 포르투갈-스페인 2차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당연히 스페인의 군사력이 강력했으나, 과거 해외 식민지들의 지원으로 전쟁은 58년동안 진행되었고, 결국 1872년 스페인-포르투갈 평화조약을 통해 포르투갈 지역에는 공화제인 포르투갈 공화국이 건국되고, 포르투갈 영토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에는 입헌군주제인 스페인 왕국이 건국된다.

이후 스페인은 1913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중립국임을 알리면서 1차 세계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왕국도 얼마가지 못했다. 1918년 입헌군주제에 불만을 가진 공화파 스페인과 현 정부인 왕정파 스페인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하였고, 치열한 내전 끝에 1927년 왕정파 스페인이 승리하면서 내전은 끝이난다. 그러나 공화파 스페인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스 정부가 이베리아의 월경지인 이비야를 1928년 초에 점거한 후, 이를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에게 반환하였다. 후에 스페인과 프랑스는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져, 4-50년 즈음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도 일어났었다.

또한 1927년부터 스페인은 내전복구에만 집중하며 2차 세계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지쳐버린 시민들은 한번 더 왕정을 뒤엎고 공화국을 건국하여 자신들의 뜻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당시 왕이 아니였던 펠리페 5세가 혼란을 틈 타 권력을 잡아 이베리아 제 2제국을 선포하며 1969년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로 변경하였다.

펠리페 5세는 시민들이 왜 왕정을 뒤엎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국민의회' 를 설립하여 국민의 의견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자 국민들의 반발은 줄어들었고, 국왕도 국민과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이후 이베리아 제2제국은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치

정부조직도.jpg

국왕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의회 해산권과 권고안 거부권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민의회 해산권을 사용하였던 사례가 없다.

국민의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국민이 선출하는 사람이 국민의회의 의원이 된다. 3년에 한 번씩 선출하며, 국민의회의 의장은 의원의 과반이 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국왕의 승인이 있어야 의장이 된다. 국민의회에서는 국민이 국왕에게 원하는 것이나, 국민의회 자체에서 판단하여 권고안을 작성하여 국왕에게 제출한다. 국민의회도 위원회 해산권이 있지만, 이도 국왕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하다.

왕실사무국은 국왕의 직속 기관이며, 국왕경호를 포함하여 왕실 관련한 모든 업무를 수행한다. 또한 위원회를 관리하지만 위원회 해산권은 없다.

제국안보위원회는 유일하게 왕실사무국의 관리가 아닌, 국왕 직속 위원회이다. 정보기관이며 대.내외 정보활동을 한다. 다른 위원회보다 권력이 더 높다.

각 위원회가 형성된 이유는 왕실사무국의 업무량이 급격하게 늘어나, 과거 펠리페 5세가 각 분야마다 위원회를 두어 업무를 나누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유지되었다.

사법

이베리아 제국에도 재판이 있으며, 재판과 관련하여 모든 사법권한은 법무위원회가 담당한다. 이베리아 제국에도 3심 제도와 비슷한 제도가 있는데, 1심은 법무위원회 담당인데, 법무위원회에서 내린 판결에 관해 거부한다면 항소할 수 있고, 2심은 국민의회에서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이마저도 거부한다면 국왕이 직접 판결하여 왕실사무국으로 전달, 왕실사무국이 국민의회로 전달하여 피고인에게 전달된다.

(작성중)

외교

이베리아 제국은 대만과 포르투갈을 제외하고 모든 국가들과 수교가 맺어져 있다.

(작성중)

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