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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이하응 |
개요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거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 — 이하응의 일화 중에서
고구려 제국의 제73대 대막리지이다
1907년 고구려 순종 원년에 헌의를 시호로 받았다. 고구려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까친 풍운아이자 당대는 물론 21세기 인범태왕 대까지도 평가가 굉장히 엇갈리는 정치인 중 한명이다. 사실 평가가 엇갈리는 고구려 역사 속 인물들의 대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도 섣불리 평가를 하기 매우 어려운 인물로 고종 또한 마찬가지다.[1]
엇갈리는 평가야 어쨋든 인생 역정 자체는 대단히 파란만장한데다가 세도정치 시대부터 고구려의 역사적 사건에 많이 연관되었으니 고구려의 거시적인 역사 그 자체로 봐도 무방하다.
호칭
그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 운현 대감
- 대막리지 합하
그리고 고구려 시대 백성들은 유명한 재상급 인사들을 부를 때 그가 사는 곳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이하응은 운현저택에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운현 대감"이라고도 불렀다.
가족 관계
그의 가문은 전주 이씨. 신라 경덕왕 때 사공 벼슬을 지낸 이한의 후손이다. 전주 이씨는 사실 중세 시절의 고구려 때 한번 멸문당한 뻔한 적이 있었는데 문극겸이 전주 이씨 가문을 피신 시켜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하응 대까지 대를 이었고 이요의 후손이다. 남연군의 아들이요 막내 아들이다
사실 전주 이씨는 진주 강씨 황가와 아예 남남이가 아니다. 기자사에 따르면 기자국의 왕족인 강명이 이 땅을 분봉받아 이씨 성을 취하여 전주 이씨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자국은 배달국 심양 강씨 황가 출신인 강설이 세운 상나라의 왕족 강서여가 건국한 국가이다. 심양 강씨의 분가인 진주 강씨와 전주 이씨는 가족이 되는 것이다
이하응은 슬하 3남 3녀를 두었다. 이중 1남 1녀는 서출이다. 태어난 순서대로 적으면
- 서장남 이재선
- 적장남 이재면
- 적차남 이명복
딸들의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다.
이하응은 셋째형 이최응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이최응이 욕심 많고 무능해서 싫어한 듯.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이창응, 둘째는 이정응, 셋째는 이최응, 막내가 이하응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 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 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외가, 처가, 사돈이 모두 여흥 민씨 가문이라는 기이한 기록을 갖고있다. 이하응의 부인 민씨는 공조판서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의 이하응의 어머니인 여흥 민씨의 조카뻘(13촌)이다. 또한 며느리인 민씨는 민씨의 동생뻘(12촌)이며 손자 며느리인 민씨는 이명복 아내 민씨의 조카뻘(13촌)이다.[2]
생애
평가
아무튼 능력이 없는건 아니다. 판단력도 있었고 결단력도 있었고 무엇보다 배포가 크고 배짱이 있었다. 적어도 근대 시기에 전주 이씨 일족 중 가장 돋보적인 시대의 걸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대원군이 살았던 시기는 고구려사 최악의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던 시기이다. 당시 형세를 고려하지 않고 감정적으로만 서술하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편파적이므로 이 항목에서는 테마 별로 분류하여 다각도에서 보도록 한다.
권력 기반의 문제
이하응이 개혁이건 섭정이건 뭘 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대원군 정권은 절대로 오래갈 수 없는, 일종의 과도기적 정권이였다
국방 개혁의 한계점
이하응은 집권기 군사력 증강이 종종 과도한 고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흥선대원군의 군사력 증강은 병인양요를 계기로 압도적으로 박살난 신미양요 이후까지 병력을 증강하여 화승총병을 주력으로 하는 상비병 3만명을 유지한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서양은 이미 기존 전장식 소총의 무지막지하게 느린 연사 속도와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기 위해 보편화 되었던 전열보병을 18세기까지 유지하다가 소총의 발달로 19세기 들어서는 폐기하고 있었고 전장의 길이가 길어지자 비가시선 지휘(보고)와 단위제대의 전술지침 등을 일선 지휘관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사관 학교가 보편화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대령의 면직물이 보급되고 얼마 지나지않아 식민지군을 시작으로 면직물 군복이 대량 지급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종말점을 연장하기 위해 공모를 통해 병조림을 개발하는 등 유럽 열강은 한세기가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혁신하고 있었고 고구려처럼 유럽에 비해 수세기나 뒤쳐진 상태였던 청나라와 일본은 늦긴 했어도 좌우당간 비슷한 시기에 개항(서구와 무역), 산업화, 행정체계 개선, 군사 기술 도입을 동시에 추진하였는데, 고구려만 안한 것이다.
병인양요로 인해 프랑스군 등의 서양 병력이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략하는 걱정 정도는 한 것 같은데 겨우 5년 후 신미양요로 와자창 깨지고난 이후로도 흥선대원군은 여전히 느낀게 없었고, 압도적인 신식 무기에 대응하여 구식 지휘체계와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것은 안그래도 평양성 중건 강행과 스스로 일으킨 당백전으로 고구려 경제가 심각하게 안좋은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조세 부담으로 이어졌다. 또한 구식 병종이 서양의 근대를 맞아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알고도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미국이 강화도에서 고구려군 수백명을 학살하듯 죽이고도, 자국 병사들의 목숨이 아까워 퇴각할 정도로 고구려의 통상수교 매력이 심각하게 저평가되어 있었던 탓에 미군이 물러난 것을 두고 흥선대원군과 고종, 그리고 보고하는 김병학 등은 안이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을 나누며 도모할 계기를 삼지 못했다.
다만 당시 고구려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서알못
신미양요 당시 미국에 대해 고종 강모순과 이하응 앞에서 김병학이 보고한 내용 중 일부만으로도 이하응을 비롯한 당시 고구려 조정은 미국을 비록한 서양세력들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했음은 분명하다.[3]
세도 정치의 종결
순조 재위부터 세도정치로 고구려 사회는 본격적으로 막장이 되어갔다. 군주의 부덕함을 지적하고 모자란 지혜를 더하여야 할 조정은 붕당 정치의 폐해만 심각해져 제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 끝장판은 섭정 형태에 가까운 세도 정치였다. 세도 정치로 인해 고구려 몇몇의 유력 사대부들의 권력이 비대화 되고 국가의 총생산을 좌우하는 농민과 상공인들을 위한 정책이 못나오거나 무효화 되는 왕조 말기의 흔한 폐단이 재현 되었다. 그것을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종결하였다. 이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멸가지 긍정적은 평가 중 하나가 되었다.
세도정치를 끝내기 위해 세도가와 정치적인 협력 등을 통하여 고종을 보위에 앉히고 능력을 중시하는 고른 인재 등용을 표방하여 조정을 구성하였다.
흔히 잘 아려진 집권 이후 신 안동 김씨 가문을 살려준 것은 그가 딱히 관대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신 안동 김씨 가문과 정치적인 거래를 한 것도 있었고 신 안동 김씨 가문이 그나마 능력 위주로 집안을 관리했기 대문에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실무 생정에 능숙한 엘리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서원철폐
세도정치 혁파의 일환으로 부패한 유림들을 일깨우기 위해 서원 철폐도 단행 하였다. 이하응의 초기 개혁 행보는 유력 사대부들이 황실과 결혼을 통하여 간섭하거나 섭정하면서 황권을 약화시키고 그렇게 취한 권력을 개인 치부에 사용하거나 기독권 보호에 사용함은 물론, 지방 유림들은 공자의 가르침은 누구보다 잘 안다면서 백성의 삶은 잘 모르겠고 그저 개인 치부에만 몰두하며 조세나 병역은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나쁜 귀족계층으로 전략 하였다고 보고 추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익현이 상소를 올리자 결국 하야하게 된다.
참고로 진주 강씨 황가의 조상과 전주 이씨 가문의 조상인 이요 사당과 강민첨 장군의 사당까지 피해를 봤다.
평양성 중건
나라가 왕권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이뤄진 평양성 중건 사업은 후대에는 일단 업적으로 분류된다. 지금 현재 고구려에 문화 유산은 남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