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제1차 세계대전에 대략 1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편에 참전하였다. 이후 영국은 인도에 여러 개혁 조치들을 개시하였으나, 억압적인 정책들도 피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많은 인도인들이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이끄는 비폭력 운동,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 운동이 전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협력과 평화의 상징으로 떠올라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1930년대 동안 영국은 점진적인 입법 개혁을 진행하였고,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가 여러 차례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다만 이후 10여년 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독립 요구는 일단 일단락되었다. 인도는 2차 세계대전에도 영국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전후 인도 국민회의는 끊임없이 독립을 요구하였고, 북부 지방에서는 무슬림들이 들고 일어나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였다. 결국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지방과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 지방 간에 불화가 일어났다
결별 독립
라호르 대회에서 마침내 인도 아대륙의 무슬림이 많은 지역은 파키스탄으로 인도에서 분리하는 방안을 결의했다. 이후 〈마운트 배튼 결의〉에 따라 이 안이 승인받아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결별하여 독립했다. 이때 벵골지역은 파키스탄령으로 독립하였으며, 카슈미르를 두고 크고작은 분쟁이 시작된다.
제 1차 인도내전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권을 놓고 양국의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영국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은 번왕이 힌두교도이며, 주민의 80%가 이슬람교도였다. 따라서 인도측, 파키스탄 측 중 귀속을 결정하지 못했다. 카슈미르 번왕정은 독립을 원했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파키스탄 귀속을 요구 폭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0월 21일에는 이슬람 민병대가 파키스탄에서 진입을 시작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번왕은 인도에 무력 개입을 요청하여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파키스탄은 수적으로 밀렸고, 배치병력만이 있단 탓에 곧 파키스탄 정규군도 투입되어 카슈미르 서부를 중심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국제 연합은 1948년 1월 20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39로 휴전을 요구했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정전이 된 것은 1948년 12월 31일이다. 그 결과, 카슈미르의 반 이상이 인도의 실효지배에 속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부분이 파키스탄에게 속해졌다. 워낙 다툼이 잦고 크고작은 도발이 만연하던 까닭에 국제 연합 인도 파키스탄 군사 감시단 (UNMOGIP)이 파견되었다.
국제 연합 인도 파키스탄 군사 감시단 (UNMOGIP)이 파견되었지만, 지속되는 충돌을 막을 수 없었다. 이때, 중국이 악사이친에 인민해방군을 배치하면서, 이지역을 중국이 실효지배하게 되었다. 인도-중국 전쟁의 여파로 인도에 혼란이 온 것이다.
제 2차 인도내전
8월, 파키스탄은 중국의 악사이친 점령에 영향을 받아 혼란스러운 인도의 카슈미르를 재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했다. 무장 집단을 인도 지배 지역에 보냈다. 이것을 인도 군이 반응하고 전쟁이 발발했다.
인도군은 펀자브지역 및 카슈미르 남부에도 배치되어 공세를 진행하였고 파키스탄은 수세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 사회의 압력에 의해 양국은 9월 20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211호를 수락하고 9월 23일에 휴전이 되었다. 그런 다음 UNMOGIP 및 국제 연합 인도 파키스탄 감시단(UNIPOM)에 의해 감시가 이루어졌다.
타슈켄트에서 1966년 1월 4일부터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월 10일 양군의 철수가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2월 25일까지 1965년 8월 이전의 위치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제 3차 인도내전
파키스탄과 함께 독립한 동파키스탄(현재의 벵골주)에 파키스탄 본토와의 분열 조짐이 보였으며, 인도는 이에 개입하여 동벵골지역을 확보하기로 마음먹는다.
1971년 12월, 인도는 벵골의 항구를 봉쇄하고 북진하여 동벵골지역을 파키스탄과 분리시켰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를 통한 인도 본토 횡단을 계획하였으나, 펀자브지역에 배치외었던 인도 부대가 방어하여 전선을 수호했으며, 벵골지역을 완전히 인도의 손에 넣는다.
12월 16일, 벵골 주둔세력이 독립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내각의 결정으로 인도의 벵골주 자치령이 되었다가 1972년 7월, 심라협정으로 파키스탄이 벵골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벵골주 자치령은 완전히 인도의 영토가 되었다.
제 4차 인도내전
파키스탄의 이슬람 세력은 이슬람 민족주의와 이슬람 자유주의를 내세우며 이슬라마바드를 건립 계획&논의하고 카슈미르 수복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인도는 인도 내의 이슬람 정당 및 이슬람 세력을 모두 제지하고 탄압하였는데, 이것이 '인도 이슬람 탄압사건'이다.
대대적인 당시 내각의 급진적 태도로 인해 파키스탄은 1973년 2월, 인도에 전면전을 강행하였으며, 본토에 심어진 이슬람세력을 선동하여 이슬람 커뮤니티의 연결고리를 구축했다. 무기를 보급하고 북부와 남부를 있는 전선을 구축하여 인도군을 북진하여 밀어붙였다. 하지만 인도는 곧바로 벵골지역의 해양병력을 출전시켜 카라치 지역으로 상륙하여 봉쇄되었던 인도의 보급로를 재건하였으며 라자스탄주로 진격해오는 파키스탄 군대를 카슈미르군과 함세하여 남북으로 차단하였다. 본토에 남은 파키스탄 병력을 포위하고 잠무카슈미르로 진격하여 이슬라마바드를 수복하고 뒤이어 라호르까지 수복한다. 6월, 파키스탄은 잠무카슈미르를 통해 본토로 재진격해보려 하였지만, 본토 내 포위된 군대가 완전히 봉쇄되었던 탓에 지원이 원활하지 못했다.
인도는 카라치에 상륙한 병력으로 정부와 입법부까지 장악하여 파키스탄의 국가운영권을 손에쥐게 되었다. 1973년 7월 3일, 인도는 <카라치 선언>과 함께 종전을 선언했고 통일된 '인도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0월 까지 몇차례에 걸친 잔여세력의 저항이 있었지만, 1973년에 완전한 인도의 통일을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