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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 공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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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Concilium Oecumenicum Vaticanum Secundum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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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회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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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1962년 10월 11일 - 1965년 9월 14일 (총 4회기) | |
| 장소 | ||
| 소집자 | 요한 23세 교황 | |
| 바오로 6세 교황 | ||
| 참석자 | 2,625여명 | |
개요
| 개회식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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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9월 14일까지 4회기 동안 로마에서 개최된 가톨릭 교회의 제21차 보편공의회.
상세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한 회기(1개월에서 3개월)씩 4번 회의가 진행되었다. 요한 23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첫 번째 회기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고, 바오로 6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나머지 3개의 회기는 1963년 9월 29일부터 12월 14일까지, 1964년 9월 14일부터 11월 21일까지, 1965년 9월 14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즉, 이 공의회의 시작은 요한 23세가 했고, 마무리는 바오로 6세가 했다.
'제2차'라는 수식어에서 보듯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도 존재하지만,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초점은 교황 무류성에 교계적이고 법적인 명시이기에 신자들의 실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1]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신학 내부에 존재하던 현대 세계와의 적극적이고 대회 지향적인 입장들을 공의회의 이름으로 확정하면서[2], 아직까지 잔존한 '현대에 대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입장들'[3]과 선을 긋게 되었다.
여기 서술된 내용이 끝이 아니라 더 많은 개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관련 전문서적과 논문을 읽기를 추천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변화와 개혁의 규모는 깊고 광범위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비오 9세와 달리 개최한 업적만으로도 기적심사를 면제받아 성인품에 올랐으며, 이는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와 영향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배경
1960년대 가톨릭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변화하느냐, 전통을 고수하느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던 차였다. 근대 이후 과학과 세속 권력은 점차 기존의 신권(神權)을 압도해 갔고, 프랑스 혁명 등의 여파로 그 흐름은 결정적이 되었다. 1869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권, 특히 교황권의 우위를 재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청과 가톨릭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쇠퇴했다.[4]
이는 이탈리아 통일로 인한 교황령의 축소와 무관하지 않았다. 아무리 종교와 신의 이름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현실 권력은 부와 영토, 군대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유럽 각 국가들은 이전과 달리 교황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으며, 민족주의, 민족국가 건설을 내세우며 식민지 쟁탈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백인의 의무'나 '기독교 전파' 같은 구호를 외쳐대긴 했지만 이는 그저 침탈을 포장하기 위한 면피성 발언이지 가톨릭 교권을 의식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와 19세기 말을 거치면서 '교황'과 '가톨릭'은 현실 권력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일개 종교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뒤이은 1차,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가톨릭은 전화(戰禍)를 누그러뜨리는 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추축국에 협조하거나 방관한 일부 주교들의 사례 등 그릇된 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외면하는 일도 있었다.[5] 결국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을 강타한 염세주의와 비관적인 시각은 일반 대중들마저 종교보다 '현실의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가톨릭이 유럽인들 생활과 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50년대 말이 되자 '가톨릭'은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이나 믿는 종교라는 시각이 유럽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잔존한 젊은 가톨릭 신자들과 새로운 세대 성직자들은 바티칸의 완고한 권위주의가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에서 똑같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개혁 의지가 없음을 깨닫고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의 가톨릭도 제약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당시 가톨릭은 훨씬 더 신자에게 거는 제약이 많았다. 특히 이혼과 피임이 큰 화두였다.[6] 20세기 중반 이후 가톨릭 신자에게도 이혼할 권리를 원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커졌다. 한편 양차대전 전후 베이비 붐과 폭발적인 인구 성장으로 피임에 반대하는 인구학상의 논거는 약해졌고, 오히려 당시만 하더라도 폭증하는 인구를 경계해 각 국가 정부들은 대놓고는 아니어도 은근슬쩍 피임과 낙태를 권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황히 이렇다보니 유럽 각국은 젊은층의 냉담자화와 가톨릭 신자의 감소를 은근히 반겼다. 이혼과 피임에 줄기차게 비타협적인 태도로 이에 반대했던 교회 당국은 고립되었다.
실제로 1950년대부터 서유럽 전역에서 미사 참례율이 꾸준히 낮아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7] '가톨릭 인구 감소' 문제는 이미 신자들이 사는 현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좀 더 명민한 가톨릭 지도자들이 알아차렸듯이 더 이상은 이런 문제를 전통과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다룰 수 없었고, 1940년대 말과는 달리 반공주의를 자극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톨릭은 굼떴고, 주요 인사들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교권의 절대성 고수에만 매달려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상황을 타개한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하였다. 요한 23세의 전임 교황인 비오 12세는 권위적인 보수파였던 데다가 치세 동안 건강 문제 때문에 교황의 정치적 권한을 비서 수녀인 파스칼리나 레네르트에게 위임할 정도였다. 파스칼리나 수녀는 여교황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교황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여 추기경단을 비롯한 가톨릭 수뇌부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런 두 사람의 행보에 질려 버린 보수파를 비롯한 가톨릭 상층부는 적당히 나이도 많고 성품도 온화해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론칼리 추기경을 교황 요한 23세로 선출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전임 교황과 비선실세의 괄괄한 성미에 질렸던 추기경단이 '좀 쉬자'는 의미로 뽑은 거라, 요한 23세가 선출될 당시까지 가톨릭 외부에서도 '큰 일 안벌리고 쉬기 위해 뽑힌 징검다리 교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온화하여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가톨릭 내부만이 아니라 격변하는 세상의 흐름에도 주목하여 가톨릭이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교황이 되자 이를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보수파들의 반대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962년 10월 11일 공의회를 열어 현대 가톨릭의 방향성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꾀하였다. 쉬려고 했는데 일만 늘어났다
당시 공의회는 그 규모뿐만 아니라 구성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했는데, 당시 공의회에는 가톨릭 주교들 외에도 이제까지 이교(離敎), 이단으로 규정되던 다른 계열 기독교 교회 및 공동체의 대표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초청받았다. 또한 준비 위원회 작업은 교황청 관료들이 맡았으나, 일단 공의회가 열린 뒤에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모인 공의회 교부들이 각 위원회에 배속되었다. 전 세계 각지의 가톨릭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현장의 목소리를 쏟아내었을 때, 역시 자리에 참석한 교황청 관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들이 사목 현장과 괴리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요한 23세는 소련과 동유럽의 의견도 청취하기 위해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1961년부터 대소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큰 힘을 기울였다. 이에 흐루쇼프가 호응하면서 흐루쇼프는 요한 23세의 팔순 생일을 축하하는 공식 축전을 보내 왔고, 소련과 동유럽에서 35명의 주교들이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이중에서는 폴란드의 젊은 주교인 카롤 보이티와 주교도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한 명의 주교도 중국 밖을 나가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공의회의 토론을 거쳐 개정된 교령들과 확대된 위원회의 작업 결과는 대체로 진보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후임자 바오로 6세 때에도 매년 가을에 회기를 시작하는 방식으로 계속되어 1965년 12월 8일에 폐회했는데,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문서 16개를 교령화했다.
내용
주목할 만한 결과
- 타 교파 영세자를 가톨릭 교회로 전입시키는 일치 예식에서 이단을 끊겠다는 서약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곧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인 책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 신부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톨릭이 교회의 안위를 위한다는 이유로 나치 독일 등의 전체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한 일이 영향을 준 것이다.
- 현대 사회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인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에서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폭력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위한 대체 복무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
|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5장> 중 |
- 자기 탓 없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선하게 살 경우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였다.[12] 왜냐하면 선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고, 최대한의 내적 양심의 명령을 따라 본인이 알고 있는 선에서라도 가능한 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은총을 간직하려고 노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외적인 비가톨릭 신자일지라도 본인의 고의적이지 않은 무지의 상황에서라면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만, 이러한 공의회의 해설은 흔한 오해와는 달리, 기존에 없었는데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갑자기 뜬금포로 새로 생겨난 신학이 아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한참 전부터 가톨릭의 공식적인(혹은 주류적인) 신학 견해였던 것을 무류성으로서 재확인한 것일 뿐이다.[13][14] 물론 선행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의 '자기 탓 없이'가 어느 정도까지 적용 가능한지, 그리고 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적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공의회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는데, 사실 몇몇 비신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이 범위는 공의회 이전부터 비교적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상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참조.[15]
- 교회 내 평신도의 역할을 더욱 강조했다. '직무 사제직'이 성직자에 국한된 것이라면 '보편 사제직'은 모든 신자가 세례로써 받게 되는 사제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을 함께 찬양하며,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힘차게 증언하며,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교회 헌장 10항 참조)".
- 파문 제재가 과거의 영구 제명으로서의 의미에서 교정 벌로서의 의미에 가까워졌다. 과거에는 파문도 대파문(영구 제명, major excommunication. anathema라고도 함)[16]과 교정 벌로서의 소파문(성사 참여 제한, minor excommunication)으로 나뉘었는데, 공의회 이후에는 사실상 파문의 개념 자체가 소파문으로 바뀌었다.
-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공식 지정된 교회의 금서 목록에 대한 외적 제재가 풀렸다.
여기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설명하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개신교 예배 참석 및 개신교 성경, 개신교 서적, 타 종교 서적, 기타 이단 서적의 '허가 없는' 열람 및 소지 행위는 1917년판 구교회법에 최대 파문까지 명시된 대죄였다.[17] 이것들 중 허락 없는 타 종교 및 타 종파 서적 열람의 교회법상 처벌 규정이 해제된 것인데, 금서 목록 제도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했던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외적인 강제 규범으로서의 금서 목록은 해제되었으나, 이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들이 지켜야 할 양심 법으로 남아있다"고 직접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위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고의로 정교회 성찬 예배에 참석하거나, 때를 불문하고 고의로 개신교 예배 또는 성공회 감사 성찬례에 고의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18] 마찬가지로 타 종파 신자의 영성체 참여 또한 개방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개신교를 비롯한 형제 교파와의 성경 공동 번역 작업도 허용되었다.[19] 이 공의회 직후에 영미권 최초의 공동 번역 성경인 RSV-CE가 1966년에 출간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개신교와의 협업을 통한 《공동번역 성서》가 출간되었다.[20] 또한 개신교와 성공회 등 타 기독교 교파와의 공동(에큐메니컬) 기도회, 예배(미사와 같은 성찬 예배, 일반 예배)가 가능해졌다. 유의점으로는, 일치 기도회 등의 행사는 가톨릭 교회 당국자들이 결정하는 것이지, 평신도가 그런 것도 아닌데 에큐메니컬에 편승하겠답시고 교구의 명령과 허락 없이 타 교파 예배에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의 젊은 가톨릭 신자들은 별 신경 안 쓴다.[21]
- 매년 1월 18일에서 25일 사이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등이 함께하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가 이 시기부터 활성화되었다.
평가와 영향
1970년대 초반 이 문서들과 공의회의 전반적인 토의 내용들이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심지어 공의회 교부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생겨났다. 이 변화의 폭을 한 줄로 요약하면 천주교, 아니 기독교 전체의 역사는 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이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서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주교와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 주교 등이 교황청에서 주목을 받고 중용되는 계기를 잡았다. 또한 기존의 교회 속에 잔존해 있던, "우리는 현대(Modern)와 대화할 생각 없으니 가만히 내버려둬라."라는 극단파들을 완전히 손절했으며, 현대 사회로부터 '게토'를 쌓고 방어적으로 일관하던 태도는 가톨릭 신학 내부에서 더 이상 지지받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공의회의 논조가 기존 가톨릭 신학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만 하더라도, 세계 공의회 차원에서의 지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처음이지만, 가톨릭 신학에 이미 존재하던 스탠스였으며, 일부 비주류 신학자들의 극단적인 진보 신학 같은 것도 아니었다. 19세기 가톨릭이 반대한 것은 무신론, 이신론적 세계관이지 민주정이 아니었으며, 가톨릭 국교화를 세속 국가에 강요하지도 않았다.
각주
- ↑ 심지어 교황권과 관련해서도, 공의회 전후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정의(定義)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무류성 선언을 할 수 있다"라는 구체적인 기술 메뉴얼이 아니라, 충만한 조건이 채워진다면 교황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 향유하기를 원하신 무류성을 지닌다"는 이론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엇무엇이 무류한 교리인지는 가톨릭에서 확정된 목록이 없으며, 교황청 마저도 '무류성 교리 목록' 같은 것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지 않았다. 단지 교황 무류성 정의 그 자체, 1854년의 성모 무염시태 선포, 1950년의 성모 몽소승천 선포 정도만이 모두가 동의하는 무류한 교리들일 뿐이다.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논조는 이미 그 이전의 20세기 가톨릭 신학에 존재하던 논조이고, Henri de Lubac, Yves Congar, 하느님의 종 Hans Urs von Balthasar 등 공의회 스탠스를 대표하는 가톨릭 신학자들도 이미 공의회 전에 가톨릭 신학계에서 이름 높은 학자들이었다. 중요한 건 이들의 스탠스가 공의회의 이름으로 도장이 찍혔다는 것이지, 없던 신학을 공의회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 ↑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는 현대랑 서로 대화할 게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우린 우리대로 살겠다"는 입장.
- ↑ 심지어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탈리아군의 로마 점령으로 강제해산되었다. 오히려 교황권 추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 ↑ 다만, 교황청 및 가톨릭 교계 전체가 나치 정권과 협력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주장은 학계에서 과장된 해석이라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1933년 선거 당시 나치당은 전통적으로 개신교 세력이 강한 프로이센 등지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던 반면, 가톨릭 인구가 많은 바이에른 지역 등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득표율을 보였다. 또한 흔히 나치와의 ‘타협’으로 언급되는 1933년 정교협정(콘코르다트)은 최소한의 종교 활동과 교회 제도를 보장받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나치는 곧 이를 위반하고 가톨릭 단체와 성직자들을 탄압하였다. 태즈매니아 대학에서 역사학 석사 과정을 마친 무신론자 팀 오닐(Tim O’Neill)조차도 이러한 맥락을 인정한 바 있다.# 더불어 교황청의 은밀한 구호 활동을 통해 상당수 유대인들이 구조되었음은 전후 다수의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공적으로 증언되었다.
- ↑ 여담이지만,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온 성공회도 국왕 헨리 8세의 이혼과 관련한 문제로 갈라졌다.
- ↑ 그때까지 순종했던 촌락 주민들의 지리적 이동과 사회 이동, 여성의 정치적 해방, 복지 국가 시대에 들어서 가톨릭 교회의 자선과 교구 학교의 중요성이 감소한 일 등.
- ↑ 아래 정교회와의 화해와 견주어 꽤나 큰 사건이었다. 물론 아직 개신교에 반감을 품거나 교회 일치 운동 등에 반대하는 보수 성향 신자들이 없지는 않으나, 더 이상 교회 차원에서 개신교를 이단 내지는 사이비라 매도하지는 않는다. 물론 개신교가 가톨릭에서 갈라진 '열교(裂敎)'라는 교리 자체는 여전하다. 현대의 가톨릭이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라 부르는 것은 교리 외적인 대외적 관계를 위한 사목적 배려 차원에 가깝다.
- ↑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가톨릭은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이며 가톨릭 교리를 제대로 알게 되었으면서도 가톨릭을 고의적으로 거부한다면 사후에 지옥에 떨어진다는 교리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가톨릭 신자들은 죽어서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확신에 찬 사람이 드물다. 개신교회처럼 천국 혹은 지옥으로 나뉘지 않고, 그 중간 지대에 연옥이라는 곳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면 연옥이 어떤 곳인지 나온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녔으나 완전 착하게 희생하고 살아서 천국에 갈 만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인 강도 등의 죄를 짓고 악하게 살아서 지옥에 갈 것도 아닌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지옥보다는 그 강도가 덜하지만 역시 일정 기간은 벌을 받고 회개해야 하는 중간 감옥 정도인 연옥으로 간다고. 대다수 신자들이 자신들은 연옥에 가리라 생각하기에, 매년 위령 성월(11월)이 되면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개신교의 구원관은 '구원에 확신을 가진 개인'을 강조하는 반면, 가톨릭의 구원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보편 교회에 내려진 구원'을 강조하고, 죄가 씻겨져도 벌이 남아있기에 그 벌을 갚기 위해 선행을 하고 갚지 못한 벌은 연옥에서 씻게 된다고 생각한다.
- ↑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마태 27:24~26.)'를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오용해 왔었다.
- ↑ 가톨릭 교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시절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을 금지해 왔었다.
- ↑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교회 헌장 16).
- ↑ 일부 전통주의 이단들은 이것을 보고 종교 다원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전통주의자들이 존경하는 보수 교황 비오 9세는 공식 문서(Singulari quadam, 1854)에서 처음으로 선의의 무지를 인정하였다. “사도적인 로마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으며 … 그러나 불가피하게 참된 종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느님 앞에 이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이치다.”
- ↑ 1950년대 이전의 성모 몽소승천 교리라거나 19세기 이전의 성모 무염시태 교리다.
- ↑ 흔히 "이건 옛날 관점이고 지금은 달라진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가톨릭 교의 신학에 대한 오해중 하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 가톨릭 교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이 아님을 신앙 교리성에서 공식 발표하였고, 애초에 이 공의회 자체는 교리를 바꾸는 공의회가 아니라 사목적(교회 생활적, 대외적) 요소를 개혁하는 공의회였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도 가톨릭의 교리는 단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 ↑ 일반인에게 알려진 중세 가톨릭 파문의 이미지는 이쪽이다.
- ↑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아예 원천 금지 되었던 건 아니다. 공의회 이전에도 고해 신부나 주임 신부, 또는 상위 성직자의 신중한 허가(관면)를 받았을 경우 학술적, 연구적 목적으로 타 종파 서적을 열람 및 소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신자 본인이 가톨릭 교리에 해박하고 연구를 위한 경우에 한정하여 타 종파 단체에 참관 목적으로 어느 정도 머물 수도 있었다. 또한 결혼식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비종교적 목적으로 타종파 신자의 들러리를 서 주거나 그냥 자리에만 앉아 있는 식으로 수동적으로만 참가해도 교리적으로 죄까지는 안 되었다(출처: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 저, 상해천주교요리, 중권 신덕 설명 중) 다만 완전한 우상 숭배죄에 들어가는 행위, 예를 들면 굿(강신술) 참관이나 집전, 구경이나 점을 보는 행위 같은 것은 엄금되었고 이 규정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유효하다. 그래서 가톨릭 구마 사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검은 사제들을 보면 중간에 무속인이 부마자를 상대로 굿을 하는데 이때 온 김윤석과 강동원이 맡은 신부들은 굿판이 벌어지는 방에 가지도, 보지도 않고 밖에 대기하고만 있는 장면이 있다. 이후 굿판이 무마되자 그제서야 간단한 대화 정도만 나눈다.
- ↑ 단, 이것은 어느 정도 이견은 있다. 물론 개신교로의 회심을 염두에 두거나 이중 신앙생활 목적의 개신교 예배 참석은 당연히 죄가 되지만, 에큐메니컬 정신 차원에서 단회성 체험 목적 참석까지는 죄라고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다. 사실 1993년을 보면 에큐메니컬 목적상 단회성 체험 목적 참석까지 죄라고 보기는 힘든 뉘앙스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펴낸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라는 책자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 ↑ 이는 현행 교회법에도 규정되어 있다(제825조).
- ↑ 가톨릭 교회의 개신교 성경 사용에 대해서, 에큐메니컬 성향의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 성경의 신학적 시각에 유념하며 보조적 용도로 활용한다면 상관 안 하지만, 보수적 성향의 신자는 금지에 가까운 권면을 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과거와 달리 단순히 개신교 성경을 열람했다고 해서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 뿐이며, 가능한 한 가톨릭 성경을 보아야 할 양심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례용이나 신앙 교육 자료용으로는 반드시 가톨릭 교회의 인가를 받은 번역만을 써야 하며, 개인 통독용으로도 교회의 인가를 받은 번역본을 사용하는 것이 강력히 권고된다. 당연하지만 《공동번역 성서》도 가톨릭 교회의 인가를 받은 정식 가톨릭 성경 중 하나다.
- ↑ 출처: 천주교 대구대교구 김경식 보니파시오 몬시뇰 저, 《생활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