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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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Concilium Oecumenicum Vaticanum Secundum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BbiT8AtBtx0KuUp6O905w2aXTFYlXN68xMSA2x41hnl2aEVlkEzdk1 PWqBzOQZfDYgU9W76zK3pysSeEXCEk5QBmoCBNX dYQLGzRIiTA eXBN9f3RynI0fpaJqQjzLE2eMW4GpF2uRNo3r2XwEjA.webp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회식 장면.
일시 1962년 10월 11일 - 1965년 9월 14일
(총 4회기)
장소 바티칸 시국 국기.png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소집자 요한 23세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참석자 2,625여명

개요

개회식 장면

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9월 14일까지 4회기 동안 로마에서 개최된 가톨릭 교회의 제21차 보편공의회.

상세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한 회기(1개월에서 3개월)씩 4번 회의가 진행되었다. 요한 23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첫 번째 회기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고, 바오로 6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나머지 3개의 회기는 1963년 9월 29일부터 12월 14일까지, 1964년 9월 14일부터 11월 21일까지, 1965년 9월 14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즉, 이 공의회의 시작은 요한 23세가 했고, 마무리는 바오로 6세가 했다.

'제2차'라는 수식어에서 보듯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도 존재하지만,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초점은 교황 무류성에 교계적이고 법적인 명시이기에 신자들의 실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1]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신학 내부에 존재하던 현대 세계와의 적극적이고 대회 지향적인 입장들을 공의회의 이름으로 확정하면서[2], 아직까지 잔존한 '현대에 대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입장들'[3]과 선을 긋게 되었다.

여기 서술된 내용이 끝이 아니라 더 많은 개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관련 전문서적과 논문을 읽기를 추천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변화와 개혁의 규모는 깊고 광범위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비오 9세와 달리 개최한 업적만으로도 기적심사를 면제받아 성인품에 올랐으며, 이는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와 영향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배경

내용

각주

  1. 심지어 교황권과 관련해서도, 공의회 전후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정의(定義)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무류성 선언을 할 수 있다"라는 구체적인 기술 메뉴얼이 아니라, 충만한 조건이 채워진다면 교황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 향유하기를 원하신 무류성을 지닌다"는 이론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엇무엇이 무류한 교리인지는 가톨릭에서 확정된 목록이 없으며, 교황청 마저도 '무류성 교리 목록' 같은 것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지 않았다. 단지 교황 무류성 정의 그 자체, 1854년의 성모 무염시태 선포, 1950년의 성모 몽소승천 선포 정도만이 모두가 동의하는 무류한 교리들일 뿐이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논조는 이미 그 이전의 20세기 가톨릭 신학에 존재하던 논조이고, Henri de Lubac, Yves Congar, 하느님의 종 Hans Urs von Balthasar 등 공의회 스탠스를 대표하는 가톨릭 신학자들도 이미 공의회 전에 가톨릭 신학계에서 이름 높은 학자들이었다. 중요한 건 이들의 스탠스가 공의회의 이름으로 도장이 찍혔다는 것이지, 없던 신학을 공의회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3.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는 현대랑 서로 대화할 게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우린 우리대로 살겠다"는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