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공화국

조선민주공화국
朝鮮民主共和國
democratic republic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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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국장
면적100,210km²
인구5164만 명 (2018년)
수도서울특별시
공용어조선어(한어)
정치형태공화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대통령지인주
국무령나윤필
중추원 의장백석동

조선민주공화국(朝鮮民主共和國, 영어: democratic republic of Joseon, 약칭: DRJ)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에 있는 민주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북쪽으로는 고려사회주의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조선민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특별시이고, 실질적 행정 수도는 세종특별자치시이다. 국기는 조선민주공화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 국가는 조선애국가, 국화는 무궁화이다. 공용어는 조선어와 조선 수어이다. 조선민주공화국 내에서는 조선민주공화국을 간단히 조선(朝鮮)또는 남공화국(南共和國)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민주공화국은 독립 이후 이래 일명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1990년대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를 겪으며 몇 년간 추락하였다. 1999년 이후 정보통신 경기의 활황과 거품 붕괴 등 여러가지 대내외적 요인에 의한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고 있다. 2019년 명목 기준 1인당 국민 총소득(GNI)은 3만 1,430달러로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었으나 경제적 양극화가 자속화 되어가고 있다.


조선민주공화국의 역사

광복과 정부수립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조선민주공화국은 일제 치하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반도는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에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구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광복 이후 은재일, 지홍구 등은 1939년 설립한 지하독립조직인 해방민족동맹을 모태로 조선해방준비위원회를 1945년 9월 서울서 개최하였고, 은재일, 하영자 등에 의해 임시내각이 수립되었다. 같은 달 중화권 일대에서 조선독립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고 석달간의 논의 끝에 12월 조선해방준비위원회와 조선독립임시정부가 결합해 '조선민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1948년 8월 15일 광복 3주년을 맞이해 38도선 이남에서만 초대 의정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초대 의정원이 탄생하였고, 8월 20일에 조선민주공화국 임시 국무령이었던 은재일이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조선민주공화국 제헌 헌법이 구성되었다. 12월 20일에는 국민투표로 조선독립임시정부 마지막 의정원 의장 출신이 서만수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같은 날 중추원이 구성되었다.

군부독재 시절

광복 이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조미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었고 조선민주공화국의 미국 경제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며 경제적 불안이 지속되었다.

조미경제원조체제가 지속되자 강력한 경제독립 의식을 가지던 좌파정부가 구성되었고 좌파정부는 한반도단일경제 구상안을 발표하며 고려사회주의공화국 등과의 경제협력 의사를 밝히자 한반도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거라 감지한 미국은 우파적 사상과 친미성향의 군부를 지원해 군사정변을 꾸몄고 1960년 군부에 의해 좌파정부가 무력으로 전복되었다.

1960년 12월 5일 군사 정변을 주도한 조희대 등에 의해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그는 의정원의 역할을 축소해 국무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중추원의 선거방식을 간접선거로 고쳐 민주주의 근간을 위협했다. 그는 외교적으로 친미 정책과 한일 협정을 추진했다. 대학가를 위주로 반정부 시위가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력 진압을 강행했다. 1960년대 개발 독재의 일환으로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발전과 한일협정•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통한 외화 획득으로 경제 발전을 꾀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과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저임금 노동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도 남겼다.

경제성장과 반대로 빈부격차와 야당의 통합등으로 불안감을 느낀 조희대는 1975년 고려사회주의공화국과 75년 한반도공동구상선언발표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켰고 이에 노동운동계, 재야와 학생 세력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잇따른 긴급조치를 통해 억눌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및 노동운동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미국마저 조선의 '인권 침해'와 '반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한미 간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 70년대 후반 경제위기와 내부 혼란이 크게 가중되었다.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었다. 또한 권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1978년 조희대가 스스로 대통령직에 내려와 아르헨티나로 망명하며 제2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1978년 국무령이었던 고현덕은 미국정부와의 협상과 제3공화국 출범을 통한 민주화를 추진했고 그간 조희대 정권이 조치한 긴급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고, 1979년 12월 대통령선거와 80년 2월 의정원선거 1980년 4월에 중추원선거를 실시했다.


민주화 이후

다시 수립한 좌파정부는 제3공화국을 안정적으로 출범시켜 경제 안정에 매진했다. 그러나 고려사회주의공화국의 무력도발과 한반도 불안이 지속되며 국민들의 불안이 터져나왔으며 끝내 보수정당에 의해 정권교체되었다. 84년 부터 집권한 보수정권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준비없는 대규모 개방을 강행했고 이 과정에 대량의 해고사태와 기업부도 그리고 공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결국 다시 5년 만에 국민들의 높아진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야당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대통령선거에는 사상 처음으로 중도실용주의정당과 좌파정당이 규합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당시 새롭게 출범된 정권은 자유경제체제 속에 기업의 체질 개선 등을 단행했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 다시 승리하였고 국민적 기대 속에 고려사회주의공화국과 경제 협력을 추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 정권에서 2000년 한반도새천년선언을 발표함으로 장기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조선민주공화국의 정치

조선민주공화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절서에 입각한 민주 공화국으로 국가원수로 대통령을 직접투표로 선출한다. 대통령은 주로 외교, 국방등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을 가진다. 정부수장으로 조선민주공화국의 상원격인 의정원에서 선출한 국무령이 정부수반을 맡는다. 내각은 의정원 출신의 의원으로 구성하여 행정권을 맡으며 하원격인 중추원에서 입법권을 행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