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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통상적으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기독교 내부의 대규모 개혁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평가되며, (세부적으로는 시선 차가 있지만) 이 시기를 기준으로 중세와 근대를 구분한다. 종교 개혁의 결과로 가톨릭에서 분리된 교회들을 통틀어 개신교라고 부른다.
대중적으로는 위와 같이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 마르틴 루터 이전에도 개신교라고 할 수 있는 종파는 여럿 등장했었다. 그리고 가톨릭도 개혁 시도를 했다. 때문에 오늘날 종교 개혁이라는 말은 대개 개신교의 등장과 팽창을 위시한 개혁을 의미하나, 넓게 보면 가톨릭의 개혁까지 포함한다. 본 문서에도 가톨릭 중심으로 개혁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널리 퍼진 것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라고 하면 개신교가 가톨릭(천주교)에서 갈라져 나간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마르틴 루터 개인의 공헌이 매우 큰 사건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루터 한 사람에 의해서만 촉발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모순 등의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그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쪽이 정확하다.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유럽사에서 워낙 큰 사건이었기에 'the Reformation'으로 표기하며, 고유명사로 쓰인다. 이는 유럽 내 다른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도 예외는 아니며, 이를 la Reforma로 표기했다. 다른 종교의 개혁에 대해서는 정관사 the가 빠지고 소문자만으로 'reformation'라고 표기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이 단어가 기독교, 유럽 중심적이란 비판이 일어나자 일부에선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대체 용어를 쓰려는 추세다. 그러나 기존 용어가 상당히 오랜 시간에 결쳐 관습적으로 쓰여 왔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폐기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둘을 병용하고 있다.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면 가톨릭을 포함하는 의미로 쓸 경우엔 '기독교 개혁', 개신교의 출현만을 의미한다면 '프로테스탄트 개혁' 정도로 번역해야겠지만, 그러면 또 번역상의 난제가 생기는 탓에(예를 들어 '개신교 개혁'이라고 하면 한자어 특성상 겹말처럼 보일 수 있다. 개신교라는 명칭은 한자로 '개혁된 새 교회'라는 뜻이기 때문) 오래 쓰인 종교 개혁이란 번역을 사용하고 있다.
배경
종교 개혁은 특정한 개인이나 계기가 그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고,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맞물려서 일어난 결과이다. 가령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마르틴 루터의 저작이 독일어권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아는 종교 개혁은 독일 지역 수도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그쳤을 가능성도 있다. 기술적인 요인 뿐 아니라 각종 사회적인 문제들이 얽혀있기에 종교개혁의 배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표면적으로는 면죄부, 성유물 판매 등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비판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많다. 우리의 눈에는 면죄부나 성유물 판매가 심각한 부패로 보이지만, 그 정도 부패는 이전 시대의 부패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부패에 대한 비판이 곧장 교리의 개혁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성직자들의 부패가 문제라면 부패한 성직자들의 행위를 비판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부패의 원인을 신학에서 찾았다. 루터에게 있어 교회의 부패는 잘못된 신학의 여러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종교개혁이 단순한 교회 정화운동을 넘어 사상사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터 개인의 업적 뿐 아니라 시대적 배경 역시 종교 개혁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는 루터 이전에도 있었고 심지어 이후에도 있었다. 종교 개혁 직전 시대에는 아비뇽 유수로 촉발된 서방교회 대분열이 있었다. 95개조 반박문이 등장하기 100여 년 전인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은 마감했지만 교황청은 잃어버린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울러 분열의 통합 과정에서 교황수위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으며, 이는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의 전통이 갖는 신앙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당대 사회도 종교 개혁가들이 주창한 새로운 사상이 퍼지는 데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였다. 자유도시의 코뮌들은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맞서 지방의 권한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중세 이래로 도시 자치의 중심은 원래 주교였고, 주교는 사실 상의 도시 영주 내지 시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도시별로 선출된 주교는 도시민들의 자치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치를 지키기 위해서 교황의 간섭이 강할 때는 황제와 결탁하기도 했고, 반대로 황제의 간섭이 강할 때는 교황과 결탁하는 등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 알프스 이북 지역은 황제-교황의 권력 다툼이 황제의 승리로 기울어져 교권 대비 황권이 일방적으로 강화되었고, 주교들은 황제의 봉신으로써 황제 권력을 견제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문에 독일의 도시들은 교황도 아닌 황제도 아닌 새로운 이념적 구심점이 필요해졌고, 이 상황에서 일어난 종교 쇄신 운동은 그들의 요구에 부합했다. 이러한 지방의 군주들은 종교 개혁 운동이 살아남는 정치적 안전장치를 제공하였다.
종교 개혁의 원인에 대한 이해는 수백 년간 많은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인해 많은 오해와 대립이 생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점이나, 오류가 포함된 관점, 불공정하게 해석한 관점이 널리 퍼져있기에 오해를 피하는 것 역시 이해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아래의 세부사항들 및 쟁점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