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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약탈과 학살로 중원 통치를 실패했던 경험을 얻은 태종은 개봉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민정과 군정을 체험하면서 중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초보적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4월에 회군 중 태종 야율덕광이 병사하자 장자 야율완이 제위를 이었다. 요세종 야율완은 948년 유목민족의 세도가 뿌리박혀 있던 막북에 북원추밀사를 설치했고, 후진의 신하들을 연운 지역으로 보내 남면관 계통의 남추밀사로 임명하였다. 950년에는 이어 북면관과 남면관에 정사성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남, 북면관 직무의 담당과 역할이 명확해졌으며, 요나라 북, 남면 관제가 확립되었다.
 
무분별한 약탈과 학살로 중원 통치를 실패했던 경험을 얻은 태종은 개봉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민정과 군정을 체험하면서 중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초보적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4월에 회군 중 태종 야율덕광이 병사하자 장자 야율완이 제위를 이었다. 요세종 야율완은 948년 유목민족의 세도가 뿌리박혀 있던 막북에 북원추밀사를 설치했고, 후진의 신하들을 연운 지역으로 보내 남면관 계통의 남추밀사로 임명하였다. 950년에는 이어 북면관과 남면관에 정사성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남, 북면관 직무의 담당과 역할이 명확해졌으며, 요나라 북, 남면 관제가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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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의 치세와 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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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hitanMural.jpg|5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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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1년 반란이 일어나 세종이 피살되었다. 뒤를 이은 목종 야율경은 변덕스럽고, 주색에 빠져 살았으며, 통치기간 내내 가문의 세도를 넓히려는 거란 귀족들의 내분이 빈번해져 요나라의 질서가 불안정하게 되었다. 969년 행궁에서 요목종이 노비에게 살해당하여 그 아들 야율현이 뒤를 이어 경종으로 즉위했다. 경종은 어린 시절부터 겪은 반란과 암투 등으로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려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982년에는 경종이 죽고, 그 아들야율융서가 즉위해 성종이 되었다. 즉위할 때 성종의 나이가 열두살에 불과해 귀족과 종실로부터 위협받았지만 성종의 어머니였던 예지태후 소작이 성종을 보좌하여 위기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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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태후의 섭정시기를 포함한 요성종의 치세는 거란과 한족 출신의 유능한 신료들이 기용되어 황권이 공고히 서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던 남북면관 통치제도와 전장 제도가 완비되어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어진 요나라의 전성기였다. 경종 시기에는 과거제가 완비되었고, 한인 문사들은 물론이고, 포로나 투항한 자들 중에서도 인재를 망라해 관리에 임용되었다. 한족 한지고의 손자 한덕양은 대승상의 자리에 올라 여러가지 개혁들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는데 부세가 줄어들고, 법률이 정비되어 청탁을 차단함에 따라 요나라의 대내적인 통치 기반이 굳건해졌다. 대외적으로는 송과 화약을 채결해 세폐와 비단을 조공으로 받았으며, 고려, 고창회골, 서하 등을 굴복시켜 장기적인 평화를 이룩하게 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덕양은 왕에 책봉되고, 야율씨 성을 하사받았을 뿐 아니라 사후에는 황릉 옆에 배장되는 것까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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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시기에는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여러 차례 법령이 개정되었다. 노비의 범죄에 주인이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관부가 죄를 다스렸고, 거란인이 죄를 저질러도 타 민족들과 차별 없이 법률에 따라 처벌되었다. 983년에는 항소 제도가 생겨났으며, 994년에는 관리의 봉급을 백성들에게 거두던 관습을 중지하고, 내탕을 설치했다. 1012년에는 장자 야율종진이 태자가 되어 장자계승제가 확립되었다. 지방에는 5개의 수도가 설치되었고, 전국은 다섯개의 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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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년 성종이 죽자 장자 야율종진이 즉위해 흥종이 되었다. 흥종은 문예와 법리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높은 문화소양을 지닌 군주였다. 그는 성종에 이어 법률제도를 보완했고, 문치 방면에서도 발전을 이루었으나 불교에 지나치게 몰두하였고, 태후 소누근에게 구속되어 사치와 쾌락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소누근은 성종의 황후였던 인덕황후를 모함하여 제거하고 태후가 되었으며, 친인척을 요직에 등용했다. 1034년에는 황태후 소누근이 흥종을 폐하고 동생인 야율중원을 새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야율중원의 보고로 적발되어 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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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중원은 정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유로 황태제가 되어 권세를 휘둘렀으나 1055년 흥종의 아들 야율홍기가 즉위하여 도종이 되자 1063년 병권을 쥐고 있던 야율중원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고 자살하였다. 야율중원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득세한 야율을신은 추밀사로 임명되어 황후 소관음을 사통 혐의로 무고하고, 보복이 두려워 태자를 다시 모함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야율을신의 도당이 황태자와 황후를 감옥에서 암살한 뒤 병사했다고 상주하는 지경에 이르자 요도종은 야율을신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7년만에 죄를 물어 야율을신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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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황실 권력 암투의 격화와 부패한 정치는 요의 통치 역량을 약화시켰다. 여진 오국부와 부아리부에서 요의 통치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며, 요나라의 남부와 동부에서도 잇따라 반요 투쟁이 벌어졌다. 1092년에는 조복의 추장 마고사가 대규모로 반한을 일으켰으며 요나라 서북부의 유목민들도 이에 고무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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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년 마고사가 사로잡힌 것을 시작으로 피지배 부족들의 반요 투쟁은 하나둘씩 진정되었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전군을 동원하고서도 서하에게 원군을 빌려서 8년이나 걸려 반란을 평정했던 요는 각 부족들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모습이 되었으며, 여진과 몽골의 각 부족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흥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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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의 흥기와 요나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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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anggiyan Aguda.jpg|5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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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년 도종이 죽고, 그의 손자 야율연희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이다. 천조제가 즉위할 무렵의 요나라는 이미 국운이 쇠하였다. 민족간의 사회 모순이 심각해졌고, 벌족주의와 뇌물정치로 유능한 관료와 장수들은 요직에서 배척되었다. 도종 시기 야율을신이 누명을 씌워 축출한 관료들은 재임용되지 않았고, 조정과 사회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천조제는 이런 문제의 중요성을 몰랐을 뿐 아니라 대내외 정세에 관한 인식도 부족해 사냥에만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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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제를 포함한 요 상류층이 사냥에 몰두하자 사냥에 사용하는 송골매의 수요가 높아졌는데 이는 여진족들에게서 충당했다. 요나라 관리들은 여진 부락에 파견되어 임의로 가격을 내리고, 재물을 끝도 없이 요구하면서 여진족을 능멸했다. 여진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은 파견갈때마다 부락을 수색하고, 명을 받들지 않는 부족장들을 매질하거나 죽이기까지 하였다. 관리와 수행원들이 대국의 명을 빙자하여 여진 부락에서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족장의 부인이나 딸, 처녀들을 잡아가 시침녀로 삼는 일도 빈번하였다. 여진족의 인구가 늘어나면 군대가 출동하여 부락을 습격해 아이들을 학살했으며, 여진 각 부족들의 반요 정서는 날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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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중기 이후에 생여진의 완안부는 점차 강대해져 생여진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도종 시기에 아골타의 조부 오고내가 요를 도와 여진 오국부의 반란을 토벌한 공적으로 절도사에 임명됐다. 요 군대가 약체화된 것이 여러가지 정황상 확실해지자 자신감이 생긴 여진족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114년 완안부의 추장 완안아골타는 요나라에 망명하던 경쟁 부족장 아소의 인도 요구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요나라는 초반에 발해 유민들을 내세워 완안부를 방어하려 하였으나 대패하여 영강주가 완안부의 수중에 함락되었다. 천조제는 소사선을 도통으로, 소올납을 부도통으로 삼아 10만 군세를 주어 출하점에 집결하도록 명했으나 공을 세울 욕심이 앞서 여진을 얕보던 소사선은 출하점 전투에서 3,700명의 여진족 기병에게 대패하였다. 다른 요나라 장수들도 여진족 군대에 차례대로 괴멸되어 여진은 동북 변경의 강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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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는 여진족이 1만명 모이면 대적해낼 수 없다는 속담이 있었는데 여진이 출하점 전투를 끝냈을 무렵에는 완안부에 충성하는 여진족들이 늘어나 그 병력은 이미 1만명 이상 늘어났다. 여진을 평정하러 출동한 부대들이 전부 패하는 와중에도 천조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여전히 상국을 자처하면서 여진을 복속민으로 보았기 때문에 단지 사신만 파견하면 아골타가 항복할 것이라고 여겼다. 천조제는 아골타의 이름을 직접 들어 책망했고, 사신은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천조제의 믿음은 굳건했다. 아골타는 회신하는 국서에 야율연희라는 이름을 그대로 적어 항복하라고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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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년 완안아골타는 금을 건국하고, 수국으로 건원하여 황제가 되었다. 금나라군이 요나라의 동북 요충지이자 병마사가 있던 황룡부를 함락시켜 요 조정을 충격에 빠뜨렸다. 마침내 천조제는 70만 명의 군사를 모어 친정할 것을 선언했다. 천조제는 단순히 숫자를 앞세워 승전을 거둘 것을 확신할 뿐 내부적인 약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기가 오른 금나라 군대는 날리수에서 천조제의 친정군을 격파했고, 요나라 군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야율장노 등 장수들이 반기를 들어 군을 이끌고 돌아가 천조제를 폐위할 것을 모의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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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년에는 동경요양부에서 발해인들이 동경유수 소보선을 살해하고, 고영창을 중심으로 자립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영창은 스스로 대발해 황제를 칭하고, 융기라고 건원했다. 요의 재상 장림이 2만 군대를 모아 발해인들을 진압하려 움직였다. 고영창은 심주에서 패배해 동경으로 돌아왔는데 곧 금나라 군대가 당도하여 장림의 군대와 고영창의 군대를 격퇴하고, 동경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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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이 금나라의 수중에 들어가자 요동과 요서의 주현들이 일제히 금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천조제는 여진이 코앞까지 쫓아오면 송나라나 서하로 망명해 계속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생각했다. 1118년과 1119년 사이에 요와 금 양국은 잠시 휴전한 채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금은 이때만 해도 요를 멸망시키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실리를 얻을 목적으로 강화 협상에 임했다. 금은 요 황제가 금 황제를 형으로 부를 것과 금에 세폐를 바치고, 중국식 의례에 따라 금 황제를 책봉할 것을 요구했다. 요는 아골타를 동회국 황제로 책봉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마침 송-금 사이의 해상의 맹약이 채결되었고, 금나라는 요가 보낸 국서에 형으로 섬긴다는 말이 없고 대금황제가 아니라 동회국 황제로 책봉한 점 등을 들어 국서를 돌려보냈다. 9월에 요 사신이 새로 고친 책서를 가지고 다시 왔으나 아골타는 이미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전쟁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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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천조제는 야율장노와 야율여도 등 장수들이 잇따라 배반하는 일이 발생하자 더이상 백관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천조제가 무고한 신하들을 사사하는 와중에 금나라 군대는 1120년 요나라 수도 상경임황부를, 1121년에는 중경대정부를 함락시켰다. 천조제는 협산으로 도망쳐 지냈는데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냥을 즐기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인심을 잃고 고립되었다. 1122년에는 야율대석, 소간, 이처온 등 신하들이 남경석진부(현재의 베이징)에서 천조제의 숙부 야율순을 황제로 옹립하고, 천조제를 왕으로 격하시켰다. 역사상 야율순의 정권을 북요라고 일컫는다. 북요가 연주, 운주, 평주, 요서 등을 차지함으로써 요는 둘로 갈라졌으며, 결과적으로 북요의 건국은 금군을 저지할 역량을 분산시키는 일이 되었다. 북요 건립자들은 송에게 화해 국면을 유지할 것을 요청하고, 금에게 휴전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송은 야율순이 즉위한 것은 반역이라면서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고, 북요는 송의 속국이 될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에 야율순이 죽자 신하들은 그의 아내 소씨를 태후로 옹립해 구심으로 삼았다. 발해인 곽약사가 북요를 배신하고 송에 항복하는 등 열악한 상황에서 북요 정권은 동관이 이끄는 10만의 병력을 패퇴시키는 등 분투하였으나 11월에 아골타가 거용관을 함락시키고, 남경을 공략함으로써 북요 정권은 멸망하게 되었다. 1125년에는 천조제가 서하로 도주하는 길에 금나라 장수 완안누실에게 붙잡힘으로써 요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2019년 3월 10일 (일) 16:05 판

카라키타이 울루스
Qara-Khitai
Хар_хятан_улс
大契丹
1800px-Flag of Kara Khitai.png 848px-Coat of arms of the Kara Khitai.png
카라키타이 국기 카라키타이 국장
국가언덕 위에 핀 철쭉
World blank map.png
영토
수도알마티
역사
소비에트 연방으로 부터 독립1991년 8월 31일
 • 카라키타이 성립1993년 8월 31일
지리
면적약 794,633㎢
시간대KGT (UTC+5~+6)
인문
공용어거란어
지역어러시아어, 키르기즈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인구
2019년 조사18,897,247명
인구 밀도약 23.78명/㎢
경제
GDP(PPP)2019년 어림값
 • 전체$약 1,571억 (101위)
 • 일인당$8,318
GDP(명목)2019년 어림값
HDI0.754
통화카라키타이 솜 (QKS)
기타
ISO 3166-1417, QK, QKT
도메인.qk
국제 전화+996

개요

카라키타이(거란어:Хар_хятан_улс)는 8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이며, 수도는 알마티이고, 공용어는 거란어이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다민족국가이다.

- 전자정부 주소 : https://cafe.naver.com/khitan

지리

카라키타이는 내륙국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중국과 국경을 접경하고 있다.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카라키타이의 국토는 지역별로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 타지키스탄, 중국과 접하는 카라 키타이의 동남 지역은 해발 3000m가 넘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물이 많고, 온화한 평원 지역에 동남권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며, 이 지역은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 지중해성 기후에 속해 있다. 중국과의 국경에는 천산 산맥이 펼쳐져 있고,남쪽의 타지키스탄과의 국경에는 파미르 고원이 위치한다. 고산 기후의 동부 산지에는 7,439m의 포베티산과 6,995m의 칸·텡리 봉 등 거친 고산이 존재한다. 시르다리야 강이 국토를 지나 아랄 해로 흘러들며, 이식쿨 호수와 발하슈 호수 등 거대한 호수들이 자리잡고 있다.

오트라르에서 발하슈 호수 일대까지 펼쳐져있는 카라키타이 중부는 광활한 평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옛날부터 대초원을 중심으로 한 유목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초원지대는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며, 총 면적이 804,500㎢로 세계에서 가장 큰 초원지대이다. 초원지대는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겨울에 춥고, 여름에는 더운 날씨가 일년 내내 이어진다. 연평균 강수량이 250㎜,산악지대는 450㎜에 이르며, 서부의 사막은 비가 적게 내린다.

카라 키타이 서부는 키질 쿰 사막과 아랄 쿰 사막 등 사막 지대로 이뤄져 있다. 아랄쿰 사막은 비교적 근래에 형성되었다. 한 때 세계 4위의 면적을 가진 호수였던 아랄 해는 1960년대부터 대규모 면화 재배를 위해 아랄 해로 들어오는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의 물을 중간에 차단하고, 관개용수로 사용한 이후부터 강물의 유입이 해마다 줄어들면서 급격히 작아져버렸다. 호수로 들어오는 물이 줄자 염도가 3배 이상 높아지고 수량이 70% 이상 감소해 작아지면서 철갑상어와 잉어 등 토착 어종이 멸종했으며, 어업으로 번성하던 주변 어민들은 생계를 잃게 되었다. 아랄쿰 사막 일대는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이가 극심하며, 비도 적게 내려 인근의 농토도 황폐화되었다. 현재는 카라키타이 정부가 우즈베키스탄과 제휴하여 아랄 해를 복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2019년 현재는 아랄 해가 더 이상 감소하는 것을 막고, 해수도 많이 늘려놓은 상태이다.

문화

카라키타이는 다수민족인 거란족이 전체 인구의 65%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을 정도로 복합민족적인 국가이다. 키르기즈인들이 12%로 소수민족 중에서는 두번째로 많으며, 카자흐, 러시아, 우즈베크, 후이족, 위구르족, 여진족, 고려인 등의 소수민족들이 전국에 고루 분포한다.

거란족은 과거 동아시아의 요하 강 유역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요나라가 여진족에게 멸망한 12세기부터 몽골제국 치하인 14세기까지 대대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거란어는 몽골과 일맥상통하는 동호어 계열의 한 갈래로 몽골어와 근원이 같다. 거란족이 통일하여 요를 세우기 전까지 거란족들은 문자가 없었다. 920년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창제한 거란 문자는 대자와 소자로 이뤄져 있었고, 현재에는 몽골 문자와 키릴문자에 밀려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족은 역사적으로 몽골족, 퉁구스족, 한족 등과 어우러져 지내왔기에 이들과의 관계가 밀접하며, 생활 및 문화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거란족 남자는 여름에 흰색의 천으로 된 마고자를 입고 겨울에는 솜이 든 옷 또는 가죽 도포 등을 입는다. 보통 말 타기에 편리하도록 아래 부분에 트임이 있는 델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옷깃과 모든 가장자리에는 팔보문으로 선 장식을 한다. 남자들은 여름철 밀짚모자를 쓰거나 이마 부분에 흰 천 조각을 수수하게 묶어 장식한다. 겨울철에는 귀 덮개가 달린 가죽 모자를 쓴다.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여미는 델 위에 조끼를 착용하는데 축제에는 여러 색으로 수놓은 명주, 비단으로 만든 큰 옷 위에 조끼를 입는다. 머리는 틀어올려 꽃으로 장식하며, 꽃문양을 수놓은 비단신을 신는다.

거란족은 전통적으로 일부일처제의 혼인습속을 이어왔는데, 전근대에는 자식이 없을 경우 첩을 두기도 했지만 모든 권한은 본부인이 가지고 있었다. 결혼결정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고, 특히 부계가 같은 친족과는 결혼하지 않는 족외혼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거란족은 다른 민족과의 통혼율도 59.3%로 높아 점차 민족간의 구분도 허물어지고 있다.

거란족 사회는 노인을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손님을 환대한다. 장례는 토장 풍습을 지켜왔는데 화장이나 풍장을 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 망자는 씨족 묘지 또는 가족 묘지에 묻으며, 북에서 남으로 먼저 선대를 묻고 그 다음 세대를 묻으며 같은 항렬에서는 형이 왼쪽, 동생이 오른쪽으로 배열된다. 거란족은 과거 중국을 지배하던 시대의 영향으로 전통명절도 중국을 닮아있다. 원소절, 단오절, 중원절, 중추절, 제석 등이 있다. 다만 중국의 춘절은 아열절로 독자적으로 발전했는데 거란족이 중시하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종교

고대에 거란족은 유목민들의 원시적 다신교였던 샤머니즘을 신봉하였다. 다만 요나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거란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918년에는 상경임황부에 사찰들이 지어지면서 불교가 거란족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요 성종 이후부터는 요나라 황제들도 불교를 숭상하면서 불교는 거란인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가 되었다.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요를 멸망하면서 거란족 유이민들이 중앙아시아에 서요 정권을 세운 이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거란인들은 한동안 불교를 숭상하였다. 하지만 당시 서요 인구의 다수는 이슬람을 숭상하는 투르크인들이 다수였고, 지배계층인 거란족에게도 이슬람 교도가 늘어났다. 몽골 제국이 서요까지 세력을 넓히면서 서요의 왕실이 차가타이 왕조로 대체되었다. 거란족이 믿던 불교는 본디 화엄종이 우세했으나 몽골의 영향으로 점차 티베트 불교로 대체되었다. 또한 중원에 거주하던 거란족 및 기타 여러 종교를 숭상하는 민족들이 원나라의 내분을 피해 이주해오면서 중앙아시아는 종교 구성이 매우 다채롭게 변모했다.

현재 카라키타이의 주요 종교로는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교, 러시아 정교회, 탱그리 샤머니즘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다. 만호와 소수민족마다 신봉하는 종교도 다르며, 다수라고 할 만한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카라키타이의 공업은 채광과 야금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요 천연자원은 원유와 천연가스, 우라늄 등이며, 동부의 산악지대에는 물이 풍부해 물이 부족한 인근 국가들에 수출하고 있다. 중부의 대초원에서는 1950년대 이래 많은 토지들이 개간되어 밀, 보리, 옥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었던 역사성에 기인해모직과 견직 산업, 세라믹 타일 제조기술이 발달했다. 또한 유목 문화에서 기인한 목축업 및 유제품 생산도 꾸준히 이뤄져 왔다. 최근부터는 정부의 육성책에 힘입어 화학공업과 기계공업의 발달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카라키타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연간 3~4%씩의 성장세를 보여 왔으며, 이는 40년 동안 발견된 유전과 가스 및 광업 산업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동시에 카라키타이 정부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경제 협력 개발기구(OECD) 국민들에게 비자 면제를 제공했다. 관세제도를 살펴보면 2018년 1월부로 카라키타이 관세법이 개정되면서 카라키타이의 통관 시스템은 전자통관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복잡한 서류 행정절차가 폐지되었고, 서면으로 진행하던 통관 과정들이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신관세법의 효과로 통관에 소요되는 시간이 4시간 가량 단축되었으며, 수입업체가 관세를 바로 납부할 수 없는 경우 분할 납부가 허용되거나 6개월을 초과할시 이자를 내는 조건으로 완납을 미룰 수 있는 제도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자본 유입과 경제 성장이 증가하여 카라키타이는 2018년 7개월동안 약 67억 달러의 해외 직접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으며, 작년과 비교해서 지표는 244% 증가했다.

'순금'을 뜻하는 솜은 카라키타이의 화폐단위이다. 1993년 5월 10일, 카라키타이 중앙은행은 10, 100, 500, 1000 솜 동전을 발행했고, 1000, 2000, 3000, 5000, 8000솜 지폐를 발행했다. 2014년 초 러시아 루블 가치 하락의 영향을 받아 평가절하되었다. 2019년 상반기 연금 및 임금 인상에 따라 민간 소비가 확대되었으나 카라키타이 솜화 가치 하락에 따라 저출 및 인플레이션율이 소폭 증가했다. 카라키타이의 1인당 GDP는 2019년 8,318$로 집계되었다. 이는 2017년 7,924$라는 수치에 비해 상승한 것이며, 이러한 실질GDP 성장은 2차 산업 부분에서 견인된 것으로 알려진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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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 키타이의 행정단위로 8개의 주가 존재하며, 하위개념으로 도시 및 만호 단위로 지방자치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8개의 주는 다음과 같다.

-알마티 주
-이식쿨 주
-추이 주
-탈라스 주
-오시 주
-잠빌 주
-오트라르 주
-키질-오르다 주

역사

거란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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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 관한 언급은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거란의 기원으로는 훙노 기원설과 동호 기원설이 존재하며, <위서>에서는 흉노인 우문부에서 분기되었다고 기술되어있고, <구오대사>에서는 거란이 옛 흉노의 종족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반면 원나라 대에 저술된 <요사>에서는 거란이 동호에서 기원했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거란이라는 명칭은 거란인 스스로가 부른 명칭이었다. 우문부에서 기원한 고막해에 복속되어있던 거란은 388년 북위의 정벌로 고막해가 멸망하자 분리되었고, 반세기가 지나면서 안정화하여 북위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378년 거란이 고구려를 공격해 8개의 부락을 빼앗았다고 한다. 6세기 중엽까지 거란은 고팔부의 연맹 단계로 존재하고 있었다. 고팔부는 외적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기 위해 조직된 느슨한 부족 연맹이었다. 당시의 거란은 이웃 세력들에 비해 매우 약소했다. 동쪽에는 일찍이 봉건화를 이뤄 경제와 문화가 발전한 고구려가 있었고, 서쪽에는 초원을 통일한 유연이 있었다. 북부에는 거란과 비슷한 계통의 실위, 해 등의 세력이 존재했다. 479년 고구려가 유연과 연합해 세력을 넓히자 위협을 느낀 거란인들은 북위 효문제에 귀순하였고 다링강 유역으로 이주했다. 553년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공격하자 거란은 돌궐에 복속되었으며, 나머지 1만 호는 고구려에 귀순했다. 돌궐이 동서로 분할된 584년에 거란은 돌궐로부터 독립하였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던 거란인들도 돌아왔다.

수말당초에 거란은 대하 씨족을 중심으로 연맹을 재조직했다. 당나라는 대하 씨족 부락에는 송막도독부를 설치하였고, 나머지부락을 영주도독부와 유주도독부에 예속시켜 거란을 통치했다. 당나라는 거란을 이용해 돌궐을 견제했는데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되면서도 때때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는 일을 반복하면서 민족성을 지켜내었다. 730년 대하 씨족이 요련 씨족에게 밀려나 거란 연맹이 재편성되면서 거란과 당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요련씨 연맹은 연맹의 수장을 가한이라고 칭했다. 각 부의 수장은 이르건이라고 불렸다. 745년 거란은 당에 항복하였으나 평로절도사 안록산이 거란을 약탈하면서 거란은 다시금 반란을 일으켜 위구르에 의탁했다. 100년간 거란은 위구르에 특산품을 공납하고, 변방을 정찰하면서 연명하였다. 위구르에 복속된 기간 동안 위구르의 문화와 제도가 거란에 전파되어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유목 생활을 하던 거란은 원시적인 농업을 시작했으며, 철기주조기술도 발전하여 경제와 군사력도 커지기 시작했다. 씨족 연맹이 공고화하면서 부락 귀족이 형성되었고 노예가 등장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에게 멸망하자 거란은 독립하게 되었다.

요나라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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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년 거란 질랄부의 야율아보기는 요련씨를 대신해서 거란 연맹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실위, 해, 습, 토혼 등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난세에 개입하여 이극용, 유인공 등 세력과 동맹 또는 전쟁을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912년부터 벌어진 거란 내부의 반란을 914년까지 완전히 제압한 야율아보기는 915년 부족장들을 숙청하면서 거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왕족이었던 대하씨족과 요련씨족을 야율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씨족들은 소씨로 편성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정식으로 칭제하면서 국호를 거란으로 정하고 신책이라고 건원했다. 한족이었던 강묵기를 시켜 상경임황부를 건설해 수도로 삼았으며, 한자를 토대로 거란족 고유의 문자인 거란 문자를 창제했다. 돌궐, 당항, 사타, 나이만 등 몽골 고원의 부족들을 친정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여진 부족들을 복속시켜가면서 동북 지역의 패권도 차지하였다. 936년 후당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석경당은 칭신과 칭자를 청했을 뿐 아니라 연운 지역의 16개 주를 할양할 것을 약속했다. 936년 9월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던 야율덕광은 중원으로 친정하여 후당군을 패퇴시켰다. 11월에 석경당이 제위에 오르자 거란은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공납받았다.

이로써 거란은 유주와 운중 일대의 넓은 농업 지역을 점유함으로써 국력을 발전시켰으며, 발해인과 한인을 국가의 주요 구성원으로써 부리게 되었다. 새로 얻어낸 16주의 통치제도는 바뀌지 않았고, 그대로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통치했다. 942년 후진의 석경당이 죽고 석중귀가 제위에 오르자 후진은 더 이상 거란에 칭신하지 않았고, 항거할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에 야율덕광은 군대를 일으켜 개봉을 점령했고, 석중귀의 항복을 받아 후진을 멸망시켰다.

947년 야율덕광이 직접 개봉에 입성해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고, 중국식 예법에 따라 문무백관을 접견하는 등 중원을 통치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국호는 대요로 정해졌다. 하지만 당시 거란 군대는 군량과 마초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화북을 약탈하고 다녔는데 화북 전역에서 거란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중원은 요나라의 통제를 벗어났다. 요태종 야율덕광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듬해 2월에는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태원에서 칭제하고, 후한을 건립하였다. 이에 중국 각지의 절도사들이 거란 관리를 죽이고 후한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종은 개봉에 입성한 지 3개월만에 북으로 철수했다. 거란 군대가 연운16주로 철군하자 후한은 과거 후진의 영역을 모두 장악했다.

무분별한 약탈과 학살로 중원 통치를 실패했던 경험을 얻은 태종은 개봉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민정과 군정을 체험하면서 중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초보적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4월에 회군 중 태종 야율덕광이 병사하자 장자 야율완이 제위를 이었다. 요세종 야율완은 948년 유목민족의 세도가 뿌리박혀 있던 막북에 북원추밀사를 설치했고, 후진의 신하들을 연운 지역으로 보내 남면관 계통의 남추밀사로 임명하였다. 950년에는 이어 북면관과 남면관에 정사성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남, 북면관 직무의 담당과 역할이 명확해졌으며, 요나라 북, 남면 관제가 확립되었다.

요나라의 치세와 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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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1년 반란이 일어나 세종이 피살되었다. 뒤를 이은 목종 야율경은 변덕스럽고, 주색에 빠져 살았으며, 통치기간 내내 가문의 세도를 넓히려는 거란 귀족들의 내분이 빈번해져 요나라의 질서가 불안정하게 되었다. 969년 행궁에서 요목종이 노비에게 살해당하여 그 아들 야율현이 뒤를 이어 경종으로 즉위했다. 경종은 어린 시절부터 겪은 반란과 암투 등으로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려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982년에는 경종이 죽고, 그 아들야율융서가 즉위해 성종이 되었다. 즉위할 때 성종의 나이가 열두살에 불과해 귀족과 종실로부터 위협받았지만 성종의 어머니였던 예지태후 소작이 성종을 보좌하여 위기를 넘겼다.

예지태후의 섭정시기를 포함한 요성종의 치세는 거란과 한족 출신의 유능한 신료들이 기용되어 황권이 공고히 서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던 남북면관 통치제도와 전장 제도가 완비되어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어진 요나라의 전성기였다. 경종 시기에는 과거제가 완비되었고, 한인 문사들은 물론이고, 포로나 투항한 자들 중에서도 인재를 망라해 관리에 임용되었다. 한족 한지고의 손자 한덕양은 대승상의 자리에 올라 여러가지 개혁들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는데 부세가 줄어들고, 법률이 정비되어 청탁을 차단함에 따라 요나라의 대내적인 통치 기반이 굳건해졌다. 대외적으로는 송과 화약을 채결해 세폐와 비단을 조공으로 받았으며, 고려, 고창회골, 서하 등을 굴복시켜 장기적인 평화를 이룩하게 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덕양은 왕에 책봉되고, 야율씨 성을 하사받았을 뿐 아니라 사후에는 황릉 옆에 배장되는 것까지 허용되었다.

성종 시기에는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여러 차례 법령이 개정되었다. 노비의 범죄에 주인이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관부가 죄를 다스렸고, 거란인이 죄를 저질러도 타 민족들과 차별 없이 법률에 따라 처벌되었다. 983년에는 항소 제도가 생겨났으며, 994년에는 관리의 봉급을 백성들에게 거두던 관습을 중지하고, 내탕을 설치했다. 1012년에는 장자 야율종진이 태자가 되어 장자계승제가 확립되었다. 지방에는 5개의 수도가 설치되었고, 전국은 다섯개의 주로 나뉘었다.

1031년 성종이 죽자 장자 야율종진이 즉위해 흥종이 되었다. 흥종은 문예와 법리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높은 문화소양을 지닌 군주였다. 그는 성종에 이어 법률제도를 보완했고, 문치 방면에서도 발전을 이루었으나 불교에 지나치게 몰두하였고, 태후 소누근에게 구속되어 사치와 쾌락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소누근은 성종의 황후였던 인덕황후를 모함하여 제거하고 태후가 되었으며, 친인척을 요직에 등용했다. 1034년에는 황태후 소누근이 흥종을 폐하고 동생인 야율중원을 새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야율중원의 보고로 적발되어 유폐되었다.

야율중원은 정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유로 황태제가 되어 권세를 휘둘렀으나 1055년 흥종의 아들 야율홍기가 즉위하여 도종이 되자 1063년 병권을 쥐고 있던 야율중원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고 자살하였다. 야율중원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득세한 야율을신은 추밀사로 임명되어 황후 소관음을 사통 혐의로 무고하고, 보복이 두려워 태자를 다시 모함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야율을신의 도당이 황태자와 황후를 감옥에서 암살한 뒤 병사했다고 상주하는 지경에 이르자 요도종은 야율을신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7년만에 죄를 물어 야율을신을 처형했다.

요 황실 권력 암투의 격화와 부패한 정치는 요의 통치 역량을 약화시켰다. 여진 오국부와 부아리부에서 요의 통치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며, 요나라의 남부와 동부에서도 잇따라 반요 투쟁이 벌어졌다. 1092년에는 조복의 추장 마고사가 대규모로 반한을 일으켰으며 요나라 서북부의 유목민들도 이에 고무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1100년 마고사가 사로잡힌 것을 시작으로 피지배 부족들의 반요 투쟁은 하나둘씩 진정되었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전군을 동원하고서도 서하에게 원군을 빌려서 8년이나 걸려 반란을 평정했던 요는 각 부족들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모습이 되었으며, 여진과 몽골의 각 부족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흥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진족의 흥기와 요나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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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년 도종이 죽고, 그의 손자 야율연희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이다. 천조제가 즉위할 무렵의 요나라는 이미 국운이 쇠하였다. 민족간의 사회 모순이 심각해졌고, 벌족주의와 뇌물정치로 유능한 관료와 장수들은 요직에서 배척되었다. 도종 시기 야율을신이 누명을 씌워 축출한 관료들은 재임용되지 않았고, 조정과 사회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천조제는 이런 문제의 중요성을 몰랐을 뿐 아니라 대내외 정세에 관한 인식도 부족해 사냥에만 몰두했다.

천조제를 포함한 요 상류층이 사냥에 몰두하자 사냥에 사용하는 송골매의 수요가 높아졌는데 이는 여진족들에게서 충당했다. 요나라 관리들은 여진 부락에 파견되어 임의로 가격을 내리고, 재물을 끝도 없이 요구하면서 여진족을 능멸했다. 여진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은 파견갈때마다 부락을 수색하고, 명을 받들지 않는 부족장들을 매질하거나 죽이기까지 하였다. 관리와 수행원들이 대국의 명을 빙자하여 여진 부락에서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족장의 부인이나 딸, 처녀들을 잡아가 시침녀로 삼는 일도 빈번하였다. 여진족의 인구가 늘어나면 군대가 출동하여 부락을 습격해 아이들을 학살했으며, 여진 각 부족들의 반요 정서는 날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요 중기 이후에 생여진의 완안부는 점차 강대해져 생여진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도종 시기에 아골타의 조부 오고내가 요를 도와 여진 오국부의 반란을 토벌한 공적으로 절도사에 임명됐다. 요 군대가 약체화된 것이 여러가지 정황상 확실해지자 자신감이 생긴 여진족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114년 완안부의 추장 완안아골타는 요나라에 망명하던 경쟁 부족장 아소의 인도 요구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요나라는 초반에 발해 유민들을 내세워 완안부를 방어하려 하였으나 대패하여 영강주가 완안부의 수중에 함락되었다. 천조제는 소사선을 도통으로, 소올납을 부도통으로 삼아 10만 군세를 주어 출하점에 집결하도록 명했으나 공을 세울 욕심이 앞서 여진을 얕보던 소사선은 출하점 전투에서 3,700명의 여진족 기병에게 대패하였다. 다른 요나라 장수들도 여진족 군대에 차례대로 괴멸되어 여진은 동북 변경의 강적이 되었다.

거란에는 여진족이 1만명 모이면 대적해낼 수 없다는 속담이 있었는데 여진이 출하점 전투를 끝냈을 무렵에는 완안부에 충성하는 여진족들이 늘어나 그 병력은 이미 1만명 이상 늘어났다. 여진을 평정하러 출동한 부대들이 전부 패하는 와중에도 천조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여전히 상국을 자처하면서 여진을 복속민으로 보았기 때문에 단지 사신만 파견하면 아골타가 항복할 것이라고 여겼다. 천조제는 아골타의 이름을 직접 들어 책망했고, 사신은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천조제의 믿음은 굳건했다. 아골타는 회신하는 국서에 야율연희라는 이름을 그대로 적어 항복하라고 응수했다.

1115년 완안아골타는 금을 건국하고, 수국으로 건원하여 황제가 되었다. 금나라군이 요나라의 동북 요충지이자 병마사가 있던 황룡부를 함락시켜 요 조정을 충격에 빠뜨렸다. 마침내 천조제는 70만 명의 군사를 모어 친정할 것을 선언했다. 천조제는 단순히 숫자를 앞세워 승전을 거둘 것을 확신할 뿐 내부적인 약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기가 오른 금나라 군대는 날리수에서 천조제의 친정군을 격파했고, 요나라 군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야율장노 등 장수들이 반기를 들어 군을 이끌고 돌아가 천조제를 폐위할 것을 모의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1116년에는 동경요양부에서 발해인들이 동경유수 소보선을 살해하고, 고영창을 중심으로 자립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영창은 스스로 대발해 황제를 칭하고, 융기라고 건원했다. 요의 재상 장림이 2만 군대를 모아 발해인들을 진압하려 움직였다. 고영창은 심주에서 패배해 동경으로 돌아왔는데 곧 금나라 군대가 당도하여 장림의 군대와 고영창의 군대를 격퇴하고, 동경을 함락시켰다.

요양이 금나라의 수중에 들어가자 요동과 요서의 주현들이 일제히 금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천조제는 여진이 코앞까지 쫓아오면 송나라나 서하로 망명해 계속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생각했다. 1118년과 1119년 사이에 요와 금 양국은 잠시 휴전한 채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금은 이때만 해도 요를 멸망시키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실리를 얻을 목적으로 강화 협상에 임했다. 금은 요 황제가 금 황제를 형으로 부를 것과 금에 세폐를 바치고, 중국식 의례에 따라 금 황제를 책봉할 것을 요구했다. 요는 아골타를 동회국 황제로 책봉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마침 송-금 사이의 해상의 맹약이 채결되었고, 금나라는 요가 보낸 국서에 형으로 섬긴다는 말이 없고 대금황제가 아니라 동회국 황제로 책봉한 점 등을 들어 국서를 돌려보냈다. 9월에 요 사신이 새로 고친 책서를 가지고 다시 왔으나 아골타는 이미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전쟁을 재개했다.

이 때 천조제는 야율장노와 야율여도 등 장수들이 잇따라 배반하는 일이 발생하자 더이상 백관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천조제가 무고한 신하들을 사사하는 와중에 금나라 군대는 1120년 요나라 수도 상경임황부를, 1121년에는 중경대정부를 함락시켰다. 천조제는 협산으로 도망쳐 지냈는데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냥을 즐기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인심을 잃고 고립되었다. 1122년에는 야율대석, 소간, 이처온 등 신하들이 남경석진부(현재의 베이징)에서 천조제의 숙부 야율순을 황제로 옹립하고, 천조제를 왕으로 격하시켰다. 역사상 야율순의 정권을 북요라고 일컫는다. 북요가 연주, 운주, 평주, 요서 등을 차지함으로써 요는 둘로 갈라졌으며, 결과적으로 북요의 건국은 금군을 저지할 역량을 분산시키는 일이 되었다. 북요 건립자들은 송에게 화해 국면을 유지할 것을 요청하고, 금에게 휴전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송은 야율순이 즉위한 것은 반역이라면서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고, 북요는 송의 속국이 될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에 야율순이 죽자 신하들은 그의 아내 소씨를 태후로 옹립해 구심으로 삼았다. 발해인 곽약사가 북요를 배신하고 송에 항복하는 등 열악한 상황에서 북요 정권은 동관이 이끄는 10만의 병력을 패퇴시키는 등 분투하였으나 11월에 아골타가 거용관을 함락시키고, 남경을 공략함으로써 북요 정권은 멸망하게 되었다. 1125년에는 천조제가 서하로 도주하는 길에 금나라 장수 완안누실에게 붙잡힘으로써 요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