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既然, 天子가 折騰百姓,陷入混亂,皇帝를皇帝라 稱할 수 있으랴 |
庫爾奇錄 |
청나라 가경(嘉慶) 2년, 계서(雞西)에서 시작하여 아무르강을 거점으로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이다. 당시 청나라는 백련교도의 난이 진행중에 있었고, 내부에선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당시엔 삼대의 봄(강희제-옹정제-건륭제시기. 최전성기를 이른다.)이 막 끝날무렵이었으며 북부지방의 차별과 농민의 삶이 궁핍해지고 대지주의 폭정이 심화되었다.
이에 쿠르치는 계서(雞西)에서 농민의 삶을 개선하고 자급자족의 지상낙원을 건설하고자 현재의 동명공화국 우수리시 지역을 거점삼아 나중에 연해국을 수립한다. 이 봉기로 인해 약 1만명의 사람들이 연해국으로 이주하였으며, 현대 동명공화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전개
1차 계서농민봉기
계서(雞西)의 만주계 농민 쿠르치 하이나라는 청나라 북동부의 지역차별과 관리의 횡포로 인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1796년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고, 척박하고 차별받던 북동부 사람들의 자긍심에 불이 지펴졌다. 그러던 중 1797년 4월 5일, 중촌사건이 일어났다. 중촌사건으로 인해 계서지역의 사람들은 황정에 대한 여론이 극에 치달았으며, 이 기회를 포착한 쿠르치는 당시 차별받던 하층민과 하층민족(한족, 몽골족)의 지지를 받아 약 2천 명이 되는 인구가계서농민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수가 미미하여 곧 청군에 진압되고 만다. 이때 약 900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청나라는 동북부에 대한 규제를 더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한다.
계서농민봉기를 주도한 세력들은 넓은 북동부 땅에서 민심을 하나로 모을 기관을 주최할 것을 논의하였고, 그렇게 동명농민회를 비밀리에 결성하였는데 나중에 동부단합회로 발전한다. 동명농민회는 9월 6일 고을회의에서 신양준과 쿠르치를 필두로 2차 계서농민봉기를 계획하였는데, 내부 밀정을 감시관으로 세워 청 정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동명농민회는 마을마다 연락망을 구축하고 밀정을 고용하여 무기 지급까지 순조로히 진행하였다.
쿠르치 봉기
마침내 1798년 12월 20일, 동명농민회는 민중과 함께 혁명을 진행했다. 계서 중촌지역을 필두로 영화, 동양향, 계동, 해연, 건화, 우수리 등 연해주 지방으로 점차 봉기가 커져갔다. 이때 만주에 거주하건 농민 대다수가 연해주로 건너와 이주하였으며, 현대 동명공화국의 조상격이다.
청군은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황폐한 북동부의 지형과 넓고 광활한 지형에서 들쑥날쑥 튀어나오는 봉기군을 진압하기엔 힘들었다. 쿠르치는 항카호수 근방을 거점으로 진영을 구축하였으며, 산지를 방패삼아 민중을 동쪽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던중, 청군의 기마병과 항카호수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항카호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