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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로스 베로 Thelos Vehlo 베로스 저항군 1대 사령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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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테로스 베로(Thelos Vehlo) |
출생 | 1740년 2월 25일 |
러시아 극동부 충칭 일대 | |
사망 | 1822년 9월 9일 (향년 82세) |
러시아 극동부 충칭 저항군 사령부 | |
직책 | 베로스 저항군 1대 사령관 |
재임기간 | 1768년 ~ 1822년 (54년) |
부모 | 아버지(게티스 베로, 1699~1760) 어머니(?, 1721~1800) |
배우자 | 안나 헤베(1752~1846) |
자녀 | 클라우 베로(1766~1811), 아리안 베로(1769~1810), 니클라스 베로(1772~1816) |
학력 | 모스크바 대학교 군사학 석사 |
종교 | 개신교(개혁교회) |
신체 | 185cm, A형 |
약칭 | TEVE |
개요
베로스 공화국의 GOAT이자 독립운동의 첫 불씨. 베로스 국민들에게 반신반인급으로 추앙받는 역사상 최고의 인물
생애
성장과 대학 생활
테로스 베로는 아버지 게티스 베로가 농부로 있던 충칭구(현재의 충칭특별시)에서 1740년 2월 5일 출생하였다. 이 2월 5일은 이후에 베로스 공화국의 건국일이 되기도 하는데, 사실 테로스 베로는 대학 생활을 하기 전까지 신라국의 존재 자체, 천라국 부흥 운동에 대한 관심을 아예 가지지를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대학에서 군사학을 배우던 도중, 자신의 베로스 민족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다. 사상에 가장 영감을 준 인물은 모스크바 대학의 민족사를 연구하던 카발리 사라예프(1698~1772)인데, 사라예프의 민족사 강의를 통해 베로스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고 한다.
저항군 결성과 초기(1768~1785)
1763년 학위를 수료하고 극동구 충칭 고향으로 귀국한 테로스 베로는 자신과 같은 베로스인들이 러시아와 중국에 굴종하며 사는 모습에 분노하게 되었고, 비밀청년결사대를 이끌어내어 베로스 저항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자 1768년 비로소 최초의 저항 운동인 충칭 저항운동이 펼쳐졌고, 최고사령관 지위에 오른 테로스 베로는 러시아 본국에 저항 선언문을 발표하며 베로스 민족의 독립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 군대는 충칭 저항운동에 참여한 시민들과 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고, 이 과정에서 수 만명의 사람들이 본국의 감옥으로 송환되거나 생체실험을 당하는 등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770년대 후반이 되자 종적을 감춘 테로스 베로는 저술활동에 주력하며 신변을 숨겨 신라국, 천라국의 역사와 베로스 민족의 민족사에 관한 연구를 이어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저서가 바로 그 유명한 베로스 민족사. 베로스 민족사는 충칭을 비롯해 극동지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수십만명의 베로스 민족의 후예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원동력을 제공하게 되었고, 1780년대 중반이 되자 자체적으로 시민군까지 조직될 정도로 저항운동의 불길은 다시 퍼져만갔다.
저항군의 성공과 중기(1785~1800)
저항운동에 대한 시민군의 강력한 지지로 2차 충칭 저항운동이 1785년 6월 발생하면서 저항군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때마침 러시아군은 청군과 아무르 강 일대에 집결하여 전열을 가다듬는 상황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저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무력화 되어 크게 패퇴하게 된다. 저항군의 승리로 아무르 지역의 베로스인들까지 가담해서 1790년대 초반에는 만 명 이상의 저항군이 조직되었는데, 이무렵 충칭과 아무르를 잇는 루트가 대략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항군의 세대교체와 말기(1800~1822)
1800년대가 되자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와 아무르강 유역의 잦은 충돌로 저항군 세력은 더욱 더 강한 무장에 돌입하게 된다. 이무렵, 아무르 출신의 부사령관 이고르 쉐바네프스키가 테로스 베로의 신임을 얻어 활약하게 되는데, 쉐바네프스키는 아무르 시 북쪽에서 일어나던 러시아 제국 정규군과의 충돌에서 모두 승리하며 아무르 지역에 대한 저항군의 지배를 더욱 강화시키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테로스 베로는 70대가 된 말년에도 이고르 쉐바네프스키를 상당히 신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자서전에 가까운 '충칭을 위한 편지'에서도 이고르는 나의 생명, 나의 영원한 동지, 내 독립 열망의 살아있는 표현체라고 까지 표현될 정도.
말년의 테로스 베로는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모두 병으로 잃게 되는데, 너무 슬픔이 컸던 나머지 쉐바네프스키에게 사령관 정무 권한 대부분을 넘기며 저술활동에만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테로스 베로는 자녀들을 모두 잃은 슬픔과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은채 1822년 9월 자신이 창설한 사령부의 사령관 침실에서 숙환으로 별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