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뿌리
오스만 2세가 부패해진 예니체리를 해체하려다 실패하여 살해당했다. 이후 200년간 예니체리가 부패한 상태로 지속되어 오스만 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789년, 압뒬하미트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셀림 3세는 오스만 제국을 서구화하기 위해 니자므 제디드 정책을 실시하고, 1797년에는 서구식 군대 또한 창설하였고, 이 부대는 1798년, 프랑스가 이집트를 침공하자 프랑스군과 싸워 일부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등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집트의 맘루크는 대부분 손실되고, 프랑스를 막기 위해 파견되었던 영국군도 곧 철수하면서 이집트는 권력 공백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권력을 장악하려는 총독부와 약해진 맘루크 간의 투쟁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대중들을 선동하고 알바니아인 용병들을 대거 고용하여 주요 적대 인사들을 제거하고, 복속시켜 이집트 내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1805년, 이집트 총독에 올랐다.
그리고 1807년 예니체리는 신식 군대가 러시아 오스만 전쟁과 오스만 영국 전쟁으로 전선에 나간 틈을 타 신식 군대가 계속해서 강력해지면 자신들의 영향력이 약해질 것이란 걸 예측한 예니체리가 반란을 일으켜 셀림 3세를 투옥하고 무스타파 4세를 왕위에 올렸다.
오스만 제국의 정권이 교체되고 혼란이 발생하자 영국은 이집트를 장악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였으나, 무함마드 알리는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오히려 영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도록 하여 이집트 내의 지지도가 상승했다.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의 반란
이후 1808년 8월,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가 반란을 일으켜 셀림 3세를 복위시키려 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스타파 4세가 셀림 3세를 암살하고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자들을 모두 살해하여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가 에스탄불에 도착해도 파디샤를 교체할 수 없게 만드려 했다.
그러나 마흐무드 2세는 끝내 죽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마흐무드 2세의 어머니 나크시딜 술탄은 마흐무드 2세를 톱카프 궁전에 숨기는데 성공했다는 설과 궁정 노예인 체브리 칼파가 암살자들을 방해하여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가 이스탄불에 입성할때까지 마흐무드 2세가 죽지 않았다는 설이다. 이중에서는 체브리 칼파가 마흐무드 2세를 구했다는 설이 유력한데, 이후 체브리 칼파가 오스만 제국의 재무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스탄불에 당도한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는 무스타파 4세를 폐위하고 살아남았던 마흐무드 2세를 파디샤로 추대하고, 자신은 대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 성향이었던 무스타파 알렘다르 파샤는 1808년 11월,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인해 포위되자, 3개월 만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신을 포위한 예니체리 병사들과 함께 자폭했다.
1811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친오스만파 인사들과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맘루크를 학살하고, 본토인 오스만 제국보다 빨리 이집트의 근대화를 시작했다.
마흐무트 2세는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해서는 그리스 일대에서 사실상 독립국 군주에 가까운 수준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이오아니나의 알리 파샤를 축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1820년, 이오아니나의 알리 파샤가 이스탄불로 자객을 보내 자신의 정적인 이스마일 파쇼 베이를 암살하려 하다 발각되어, 마흐무트 2세는 해당 사건을 빌미로 이오아니나의 알리 파샤를 해임하고 이스탄불로 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오아니나의 알리 파샤는 이를 거부했고, 마흐무트 2세는 대군을 보내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오아니아의 알리 파샤는 그리스의 반군들에게 마흐무드 2세에 맞서면 독립시켜주겠다며 반란을 부추겼고, 결국 1821년 4월, 그리스 남부에서 비밀결사를 주축으로 그리스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스 반군과 이오아니나의 알리 파샤의 군대를 혼자서 상대하기 어렵자, 마흐무드 2세는 이집트의 왈리인 메흐메트 알리 파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1825년, 이집트군이 그리스 남부에 도착하였고, 1827년에는 그리스 중부 지역과 아테네 등 주요 도시를 탈환했다.
예니체리의 해체와 근대화의 시작
1826년, 치밀하게 예니체리의 해체를 준비한 마흐무드 2세는 일부 예니체리가 그리스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마흐무트 2세가 신식 부대를 창설하고선 예니체리를 강화하기 위해 시험용으로 만들었다고 포장하여 창설한 뒤, 예니체리에게 자진 해산하라 포고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예니체리가 봉기하자 신군이 막사를 화포로 쓸어버리며(행운의 사건, 길조의 사건이라고도 불림.) 오스만 제국의 근대가 시작되었다.
기독교계 서구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1824년부터 그리스에게 전쟁 물자를 지원하였으며, 그리스 반군이 완전히 패전할 위기에 놓이자, 1827년, 결국 그리스 독립 전쟁에 군대를 파병히였고, 이집트-오스만 해군이 서구 기독교 연합국과의 나바르노 해전에사 참패하고, 이집트군은 1828년, 본국으로 철수했다.
1829년, 패전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에디르네 조약이 체결하여 그리스 남부 지역이 독립하였으며, 해당 전쟁을 기점으로 발칸 반도 곳곳에서 민족주의 봉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마흐무트 2세의 지원 요청에 응해 그리스 전쟁에 참전하였음에도 얻은 것이 없자, 마흐무트 2세에게 이집트 총독직의 세습과 시리아의 이집트 편입을 요구했으나, 마흐무드 2세가 이를 거부하자 1831년, 근대화된 이집트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근대화된 이집트군을 막지 못한 마흐무드 2세는 이집트가 아나톨리아 중부까지 진격하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1833년, 레반트와 아나톨리아를 경계로 나누어 이집트와 종전하였으나, 이집트는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다.
마흐무드 2세는 1839년, 오스만 제국군이 어느 정도 근대화되자, 이집트를 다시 복속시키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으나 이집트군에 패배하고, 마흐무드 2세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사망했다.
그 뒤 갑작스럽게 파디샤가 된 압뒬메지트 1세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영국은 시리아를 경계로 다시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 되라며 이집트를 압박하였으나, 배후에 프랑스가 있던 이집트는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영국이 참전하여 이집트 군과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1841년, 이집트와 수단을 제외한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빈환하게 되었으나,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았다.
탄지마트 시대
마흐무트 2세 대에 오스만 제국의 제도적인 근대화가 시행되었으며, 압뒬메지트 1세의 귈하네 칙령에 의해 탄지마트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며, 각종 근대적 법령을 도입하며, 노예제와 세금 차등제를 폐지하고, 복장 또한 터번을 금지하고 페즈를 장려하기 시작하면서 전체 탄지마트 기간 동안 제도적 근대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
또한 톺카프 궁전의 노후화로 인해 184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궁전인 돌마바흐체 궁전이 건설되기 시작하여 1856년에 완공되었으나, 해당 궁전의 건설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해당 궁전 공사로 인해 발생한 부채가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 붕괴의 시발점이 되었다
러시아가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의 발칸 영토를 압박하고 장악하려 하자,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압뒬메지트 1세는 1853년, 러시아 제국에 선전 포고를 발효하고, 크림 전쟁이 시작되었다.
1854년,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외곽에 상륙한 연합군은 발라클라바에서 러시아 제국군과 교전하였다. 아무런 지원 없이 오스만 제국군은 3시간동안 발라클라바에서 위치를 사수하다 후퇴하였으나,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군이 무능하다 평가하고, "경기병 돌격"을 명령하여 해당 전투에서 주요 병력을 대부분 상실하여 참패했고,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되어 1856년, 50만명이 넘는 인력과 세바스토폴을 상실한 러시아 제국이 파리 조약에 서명하여 끝나게 되었다.
압뒬메지트 1세에 이어 다음으로 파디샤가 된 압뒬아지즈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초로 외교 목적으로 유럽을 순방한 파디샤가 되었으며, 유럽의 루브르 박물관에 인상을 받은 압뒬아지즈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건설을 명령했으며, 이는 압뒬하미트 대에 들어 완성되었다.
1870년대 초, 근대화와 교육의 개선으로 인해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지식인 계층이 생겨났다. 민족 반란이 증가하는 와중 압뒬아지즈는 제국의 위상을 강조하는 대형 건축물들을 연신 건축하고, 반란 진압을 위해 막대한 군비를 사용하면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오스만 제국은 심각한 외채 의존에 빠지게 되었고, 지식인 계층은 이런 압뒬아지즈의 경제적 무능함에 불만을 품께 되었다.
1876년, 미드하트 파샤를 주축으로 한 신오스만인은 1차 입헌 혁명을 일으켰다. 5월, 압뒬아지즈가 폐위되었고, 민주화에 대해 긍정적이였던 무라드 5세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가 되었다. 이후 폐위 5일 만에 압뒬아지즈가 의문사했고, 이 사건의 충격으로 무라드 5세의 정신질환이 심화되어 파디샤 직무의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8월, 군부는 무라드 5세를 3개월 만에 폐위하고, 압뒬하미트 2세를 파디샤로 추대한다. 그리고 12월, 오스만 제국 최초의 헌법 카눈-으 에사시가 공포된다.
압뒬하미트의 전제 정치
초기의 압뒬하미트는 개혁에 옹호하였으나, 언론의 개방으로 인해 민족주의가 발달하여 지방에서의 반란이 잦아지고, 러시아 튀르크 전쟁에서 대패한 뒤 1878년 3월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어 동트라키아를 제외한 유럽 영토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상실하자 압뒬하미트는 의회를 정지시키고, 전제군주제 환원을 넘어 이전보다 더 강력한 전제군주정을 구축하고, 미드하트 파샤를 비롯한 신오스만인의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여 크즐(붉은) 술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1878년 7월 베를린 회의를 통해 경계를 조정하면서,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상실한 대부분의 영토 러시아와 슬라브 국가들로부터 반환받음. 그러나 영국은 해당 조약 체결을 지지했단 이유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여 키프로스를 할양 받았다.
이 시기에 할리치의 조선소가 서구화되고, 1886년, 세계 최초의 어뢰 발사 잠수함인 압둘 하미드가 건조되었으며, 히자즈 철도가 건설되는 등의 물질적인 근대화가 탄지마트 기간 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유럽에서 무언가가 발명되었다면, 그게 무엇이든 오스만 제국에도 있어야 한다"라는 압뒬하미트 2세의 어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압뒬하미트는 범이슬람주의 정책을 펼치며, 다민족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을 지원하고, 수마트라의 무슬림들을 보호국화하는 등 제국의 붕괴를 늦췄다.
그러나 압뒬아지즈의 때와 같이 교육과 생활 환경이 개선되어 서구 민주주의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 계층이 다시 생겨났고, 1897년, 오스만 제국이 크레타에서 전쟁을 승리했음에도 열강의 압력으로 실질적인 통제권을 상실하자, 튀르크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였던 청년 튀르크당의 내부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후 11년간 영토 상실이 없었으나, 1908년 영국과 러시아의 마케도니아 개입에 대한 레발 회담으로 오스만 제국을 더욱 분열하려 한다는 사실은 이스마일 엔베르를 비롯한 민족주의 인사들을 자극했고, 압뒬하미트의 균형 외교 정책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오스만 제국은 더 많은 영토를 상실할 것이란 불안감에 한달 뒤인 7월 청년 튀르크당이 2차 입헌 혁명이 일으켜, 입헌군주제로 다시 환원되었다.
2차 입헌 혁명 체제의 수립과 1차대전
혁명 1년 후, 압뒬하미트의 범이슬람주의 정책에 향수를 느낀 일부 군부의 압뒬하미트 2세의 복권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청년 튀르크당은 압뒬하미트 2세를 폐위하고 셸라니크로 유배를 보내고, 허수아비 군주인 메흐메트 5세 레샤드를 파디샤에 세웠다.
발칸에서는 이후 청년 튀르크당의 튀르크 민족주의 정책으로 인해 내분이 가속되기 시작하고, 결국 1912년 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였던 청년 튀르크당은 이후 발칸 전쟁에서 참패하고, 지지기반이 흔들리자 1913년 1월 바브알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의회와 헌법은 유명무실해지고, 제말, 엔베르, 탈라트 파샤 3인의 삼두독재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압뒬하미트 2세의 균형 외교 정책이 완전히 파기되고, 친독 노선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채택되었던 친독 정책은 제국을 1차대전에 참전시키고, 튀르크 민족주의 정책은 이슬람으로 결속되어 있었던 오스만 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의 결속점을 제거해버렸다. 범이슬람주의의 빈 자리를 현지 민족주의가 대체하게 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가속화되었으며, 결국 대전기에는 메흐메트 5세의 지하드 선포에도 많은 아랍 부족들이 이에 따르지 않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대전 초기에 페르시아 동부와 시나이 반도 로 진격하는 등 승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915년 1월, 엔베르 파샤가 장교단의 반대에도 겨울에 무리하게 캅카스 산맥을 횡단하는 것을 시도하다 사르카므쉬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후 엔베르 파샤는 해당 전투의 패배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돌리며 1차대전 최악의 전쟁범죄로 꼽히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발발하게 되었다.
1915년 4월, 협상국은 오스만 제국을 1차대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수도 이스탄불을 점령하기 위해 처칠의 주도 아래 차나칼레 해전 후에 겔리볼루에 상륙하여 겔리볼루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지형과 육해군 소통 부재, 케말 파샤의 빠른 대처 등 다중 문제로 인해 패배하고 결국 1916년 1월 퇴각했다.
1915년 12월, 영국군은 메소포타미아의 연전연승에 자만심에 빠져 알 쿠트까지 무리하게 진격했으나, 곧 오스만 제국의 반격으로 수만명의 영국군이 알 쿠트에 포위되었고, 결국 1916년 4월, 영국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 불리는 알 쿠트 전투가 오스만 제국의 대승으로 종결되어 메소포타미아 전선 진격이 지연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전까지 큰 후퇴 없이 전선을 사수하였으나, 1916년 6월, 영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점차적으로 모든 전선이 붕괴하게 되었다.
1917년 3월과 4월, 오스만 제국의 참호가 구축되어 있던 가자에 영국군이 두 차례 돌격공격을 개시하였으나, 10배의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도 오스만 제국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여 남팔레스타인 참호전이 시작되어 팔레스타인 전선 진격이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패전과 공화국의 수립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해 수적으로 굉장히 불리했던 오스만 제국은 결국 1918년 10월 무드로스 정전 협정에 서명하여 협상국에게 항복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영국에게 통제되기 시작했으나, 성지인 메디나에서는 파흐레딘 파샤가 항복을 거부하여 1919년 1월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이스마일 엔베르를 포함한 청년튀르크당 주요 인사들은 오스만 제국을 탈출해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중앙아시아로 가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여 권력에 큰 공백이 생기게 되어 영국의 지원 아래 메흐메트 6세 바히데딘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메흐메트 6세 바히데딘의 지방의 군벌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케말 파샤는 이에 따르지 않고 1919년 삼순에 상륙하여 군벌들을 통합하여 열강의 공격에 맞섬.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메흐메트 6세 바히데딘의 명령이 멸망해가는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든 지켜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민족 자립 지원을 명목으로 지방 지역이 유럽 열강에 의해 분할되고, 레반트와 메소포타미아, 히자즈와 예멘 지역을 전체 상실했다.
1922년 11월, 케말파샤가 이끄는 대국민의회는 메흐메트 6세 바히데딘을 폐위하고, 파디샤는 유보한 채 칼리파직만 압뒬메지트 2세에게 승계했다.
1923년, 종전 조약인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튀르키예 전쟁이 끝나게 되고, 현대의 튀르키예가 형성되었으며, 1924년, 칼리프 위원회의 예산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최종적으로 칼리파제가 폐지되고 압뒬메지트 2세가 폐위되면서 오스만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