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폴리네시아인의 항해와 이주
하카우타(이스트 쿡 제도)의 역사는 폴리네시아인의 이주와 정착에서부터 시작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대만-파푸아뉴기니-통가를 거쳐 폴리네시아 제도 전체로 퍼졌다. 이들은 주로 카누와 배를 이용하여 바다를 건넜는데, 이들은 상당한 항해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들의 항해술을 꾸준히 발달시켰다.
정착, 그리고 사회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카우타로 들어온 것은 기원후 700년 대로 예상된다. 인근의 쿡 제도, 통가, 타히티, 핏케넌으로 퍼졌던 종족 중 일부가 영토 확장, 기후에 따른 이주, 표류 등으로 하카우타로 유입되었는데, 하카우타는 완만한 지형에, 제도 내의 섬 간 거리가 멀지도 않았으며, 타 제도들에 비해 섬의 크기도 큰 편이었고, 중위도 지역으로 기후가 온난하여 정착하여 어업 및 농경 생활을 하기에 적절하였다. 이 때문에 인구 성장도 빨랐다. 1773년 제임스 쿡 선장이 하카우타를 방문할 때, 제도 북쪽의 주요 섬인 이스트하버(타카항가)의 인구가 6만 여명에 육박했다는 것을 참고하면, 제도 전체적으로 10만 여명의 하카우타 원주민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접촉
쿡 선장과 이스트 쿡
1772년 제임스 쿡 선장이 영국 본 국으로부터 명 받은 남극으로의 탐험을 위해 2차 항해를 나선 지 1년 뒤인 1773년 발견되었다. 쿡 제도를 발견한 뒤 뉴질랜드에서 보급을 채우고 임무를 위해 재차 출항했는데, 이 때 기상악화로 예상 항해로에서 동쪽으로 이탈하였다. 쿡 선장은 우선 주변 섬으로의 피난과 정비를 지시했는데, 이 때 발견되었다. 쿡 선장은 쿡 제도의 동쪽에 있는 제도라 하여 "이스트 쿡 제도(East Cook Islands)"라고 명명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영국 본 국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해 자국 영토로 인식, 1787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부속 영토로 편입된다. 이스트 쿡은 호주, 뉴질랜드와 더불어, 남극과 태평양 탐사의 보급기지 및 경유지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영국을 포함해 세계 각지의 선원들과 물류의 통행이 잦았다. 선원들 중에는 현지 원주민과 결혼하여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영국의 사범들이 강제 이주 오기도 하였다. 이처럼 영국이나 주변 자치령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늘어나며 영국계 인구 및 영국인과 윈주민의 혼혈 인구가 점차 늘어난다.
갈등과 봉합
원주민과 정착민 관계
현지 원주민들은 서양인들의 도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점점 서양인들과 원주민 간 갈등이 생기는데, 주로 원주민의 관습과 질서에 대한 서양인들의 도전과 영역 침범이 주요 이유였다.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 청년들이 영국인 정착촌을 급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847년 2월 9일에 일어난 이 사건을 "핏빛 달의 밤(Blood moon's Night)"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자경단을 포함한 영국인 7명이 죽고 4명이 다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영국 정착민들이 분노하여 뉴질랜드 식민지 총독과 주둔 영국 부대에 도움을 요청한다. 뉴질랜드 총독은 머스킷 소총 1천 정과 주둔 영국 2개 중대를 파견할 것을 약속하였다. 총기 보급이 우선적으로 도착하자, 영국계 주민들은 보급받은 총기로 무장하여 자경단의 규모를 늘려 민병대를 결성했다. 이후 1847년 10월 7일 영국군 2개 중대가 이스트하버 섬의 뉴버지니아 항에 도착한다. 이들은 현지 주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구체적인 습격 작전을 구상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11월부터는 본격적인 무력 개입에 앞서, 섬 내부에 자리잡은 원주민 부락으로 향하는 모든 물류를 차단하고 물길을 돌리는 방식으로 부락으로 향하는 강물을 막는 등 원주민의 전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12월 12일, 원주민 부족장이 보낸 3인의 전령이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민병대장이자 정착촌의 대표였던 존 H. 미들턴이 단호히 거절한다.
타우랑가 조약의 체결
크리스마스가 지난 동년 12월 29일, 9개월 만에 영국군 200명을 앞세운 영국계 정착민 민병대 900명이 인근의 원주민 부족 부락을 습격한다. 무장한 원주민 전사 2천 명이 이들에게 맞서지만 총과 화포를 앞세운 영국군의 부락 약탈을 막기는 무리였다. 인근 부락에서도 지원병이 오며 총 5천명의 원주민 전사가 영국인들에 맞선다. 결국 양 측은 만만찮은 피해를 보고 물러섰다. 영국인들은 총 23명이 죽고 15명이 다쳤으며, 원주민은 6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영국인 정착촌 주변의 2개 부락이 파괴되었다.
이 문제가 영국 내에 보도되자, 일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원주민 부락 소탕과정에서 영국인 민병대의 가혹행위가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뉴질랜드에서의 영국-마오리족 전쟁 등의 사건으로 영국 내에서는 식민지의 현지 원주민에 대한 적대정책이 실용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는데, 이스트 쿡 제도에서의 사건은 이 논란에 더 불을 지폈다. 이는 왕실의 귀에까지 들어가며,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부군인 앨버트 경이 이 문제에 대해 해결을 직접 내각에 주문한다. 정부도 이에 동의, 뉴질랜드 총독을 통해 이 문제의 조기 해결을 지시한다. 당시에는 프랑스, 독일 등의 타 국들이 오세아니아 지역에 대한 세력 확장을 호시탐탐 노리던 때이기도 하여, 현지의 원주민 세력이 미국의 경우처럼 프랑스와 결탁할 가능성을 우려한 영국 정부와 왕실의 발 빠른 대처라고 볼 수 있다.
1848년 7월 15일, 뉴질랜드 북섬 타우랑가에서 회담이 진행된다. 이스트 쿡의 영국계 정착민 대표, 뉴질랜드 주둔 영국군 사령관, 이스트 쿡의 원주민 대표의 3자가 참석하고 뉴질랜드 총독과 뉴질랜드 마오리족 대표가 참관하여 진행된 이 회담에서, 이스트 쿡에서 정착민-원주민 간 무력 충돌 방지를 약속하고 공존과 협력을 명시한 조약이 체결된다. 이것이 "타우랑가 조약(Treaty of Tauranga)"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