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경종의 제3왕후 헌애대왕태후ㅣ獻哀大王太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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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64년 2월 4일 |
고려 황도 개주 | |
사망 | 1005년 4월 1일 |
고려 개경 만월대 천추전 | |
본관 | 부계 개성 왕씨 모계 황주 황보씨 |
재위기간 | 고려 왕후 |
979년 ~ 981년 8월 13일 | |
고려 왕태비 | |
981년 8월 13일 ~ 997년 11월 29일 | |
고려 왕태후 | |
997년 11월 29일 ~ 1005년 2월 17일 | |
고려 대왕태후 | |
1005년 2월 17일 ~ 1005년 4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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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헌애왕후는 고려 왕조의 창업 군주 태조 왕건의 손녀,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의 제3왕후 그리고 제6대 국왕인 성종의 여동생, 제7대 국왕인 목종의 모후이다.
생전 아들 목종에게 받은 공식 존호는 '응천계성정덕대왕태후(應天啓聖靜德大王太后)'. 그러나 비공식 존호로 관저였던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사후 제8대 국왕 현종이 올린 시호는 '헌애대왕태후(獻哀大王太后)'이다. 남편 경종과 헌(獻)자 돌림 시호를 받았으며 시호를 줄여 '헌애왕후(獻哀王后)'라고도 한다.
고려 역사상 최초로 임조칭제(臨朝稱制)[1]한 왕태후로 이는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태후라고 평가받는다.
생애
고려의 왕후
헌애왕후는 964년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 왕욱과 선의왕후 류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대종과 어머니인 선의왕후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머니인 신정대왕태후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경종 즉위 후에 여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사촌인 경종과 결혼하게 된다. 경종이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를 제 3•4왕후로 맞아들인 이유는 황주의 호족인 황보씨 가문의 영향력이 그때 까지도 막강했기 때문이다.
경종에게는 이미 제1비 헌숙왕후, 제2비 헌의왕후, 그리고 후궁으로 대명궁부인이 있었다. 그런데 헌애왕후만이 경종의 유일한 후손인 아들 목종을 낳았다.
젊은 왕태비
목종이 태어난지 1년 만인 981년 6월에 경종이 붕어하자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동복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된다. 과부가 된 뒤 헌애왕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숭덕궁(崇德宮)에 머물렀는데 이때는 숭덕궁 왕태비라고 불렸다. 이때 헌애왕후와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는 불교의 힘을 빌리고자 화엄종(華嚴宗)을 적극 지원하였다.
당시 헌애왕후가 바라던 것은 당연히 선왕 경종과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즉위였으며 화엄종을 통해 목종의 즉위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990년 목종은 '개령군'으로 봉해졌으며 12월 책봉 의례 때 “성종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를 도와라.”는 교서를 내려는데 이는 목종이 성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997년 성종이 중병에 걸리자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며 헌애왕후의 아들이 목종으로 즉위하면서 '응천개성정덕왕태후(應天啟聖靜德王太后)'로 높여지지만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다고 하여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섭정 왕태후
목종은 갓 성년의 나이였으나 학식이 부족했고 그리하여 제왕교육을 더 받아야 한다고 판단되었기에 왕태후가 된 헌애왕후는 임조칭제(臨朝稱制), 즉 섭정(懾政)을 하게 된다.
그로인해 조정이 둘로 나뉘게 되는데 태후의 임조칭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태인(太人)이라 하고 주요 인물로 중서시랑평장사 박수연과 정당문학 천독고가 있었다. 그리고 태후에게 반하는 세력을 의인(義人)이라고 했는데 문하시랑평장사 정유자가 수장이었고 이들은 정유자의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문하시랑 정유자를 비롯한 의인들이 태후에게 임조칭제를 거두라고 상소하니 왕태후가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남겼따.
충(忠)을 모르고 효(孝)를 몰라 황실의 어른에게 막대하고 성상의 깊은 뜻마저 왜곡하려 든다.
내 이번 한 번은 넘어가는 바이니 대소신료는 성상의 교지를 이행하라.
또한 용손을 능멸한 정중부는 형부에서 포박하여 처벌토록 하라.
이떄 왕태후에게 침을 뱉고 불충한 발언을 하던 백정 정중부는 감옥에 갇힌 이후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의인들이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고 태후와 왕실을 향한 모욕과 막나감이 심해지자 헌애왕후는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리며 문하시랑 정유자를 유배에 처하게 했다.
충(忠)을 모르고 효(孝)를 모르는 자들이 이젠 용손과 황실을 능멸하려 든다.
저자들이 어찌 어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모든게 부덕한 자들의 탓이로다.
그러나 어찌 태후된 몸으로 섭정을 하는데 유능한 신하들을 쳐낼 수 있단 말인가?
부덕한 자로 만든자만이 합당한 형에 처해지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본궁은 모든 대소신료들을 존중하는 바이니 내 어찌 그대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젠 본궁을 도와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집중하라.
문하시랑평장사 판공부사 국대부인 정유자를 해임하는 바이고 국대부인 작위를 폐(廢)하고 승주목으로 유배하는 바이다.
또한 참지정사 판예부사 박수연을 판형부사로 봉하니 형을 집행하도록 하라.
충(忠)을 알고 효(孝)를 아는 자들도 존재한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니 이젠 그것을 아는 자들이 조정을 이끌어감이 옳을 것이다.
박수연을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부사 판형부사에
천독고를 중서시랑평장사 판공부사 병부상서로
봉하노니 조정을 위해 헌신하고 타 관료들을 가르침에 힘을 써야할 것이니라.
본궁은 모든 대소신료를 아끼고 사랑하느니, 이젠 성상과 나의 뜻을 따라 함께 정사를 돌보자꾸나
역심지시 해석 사건
문하시랑 정유자가 본보기로 유배 당한 이후 조정에서 의인들이 헌애왕후의 임조칭제에 반기를 드는 일은 사라졌으나, 문제는 유배 간 정유자가 시를 쓴 것이 상당히 큰 논란이 되었다는 것이다.
天下主之國
日落以海中
萬烏鳴天地
黑雲動以東
龍出高天內
建世麗靜朝
若開新李花
正柚
이 시를 가지고 조정 각축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당시 판예부사인 중서시랑평장사 박수연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으며 정유자의 시가 역심이 가득한 반란의 시라고 하였따.
天下主之國
하늘아래 주인인 국가(고려)가
日落以海中
태양(고려)이 바다로 지는구나 (망조)
萬烏鳴天地
천지에서 까마귀들이 우니 (흉조)
黑雲動以東
먹구름이 동쪽(고려)으로 움직인다 (흉조)
龍出高天內
높은 하늘에서 용이 내린다 (새 왕)
建世麗靜朝
새로운 시대의 화려한 조정이라 (새왕조)
若開新李花
마치 오얏꽃(전주 이씨)을 피우듯이 (역성)
하니 정유자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天下主之國
천하의 임금의 나라에
日落以海中
내가 바다 깊숙히 들어가니 (어두움을 밝힌다)
萬烏鳴天地
만 까마귀가 천지에 우네 (악이 물러나니)
黑雲動以東
검은 구름이 동쪽으로 사라지고
龍出高天內
용이 높이 하늘을 나니
建世麗靜朝
세상이 세워지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네
若開新李花
새로운 (오얏) 꽃이 피는 날에
그러나 까마귀(烏)와 먹구름(黑雲) 그리고 특히 오얏꽃(李花)이 큰 문제가 되었고 정유자의 지금까지의 행실을 반영하여 조정에선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된다.
충(忠)을 모르고 효(孝)를 모르는 자를 가르쳐 다시 고쳐쓰려했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너무나도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부덕한 자들은 어찌하여 다시 쓸 수 없는 것인가!
문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어찌 역성을 꾀하고 반란을 모의하는 자들이 곤원 폐하의 어지고 깊으신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天下主之國
日落以海中
萬烏鳴天地
黑雲動以東
龍出高天內
建世麗靜朝
若開新李花
세상에 흉조가 들어 하늘에 새로운 용이 내려와 오얏꽃을 피운다는 이야기이니라.
어찌 성상 폐하와 태후 폐하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저런 망측한 소리를 하는 걸 보아 반성이란게 없음이라.
본궁에게 두 번이란 없음이라.
정유자를 사사(賜死) 하고 그 일가를 관비로 삼을지어다.
하여 정유자의 사사를 기점으로 의인(義人) 일파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조정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박수경의 난
고려는 이미 스스로 무너졌고, 왕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니, 이제 누가 이 땅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에 의로운 뜻을 품고 칼을 들었으며, 오직 백성과 나라를 위한 대의를 따라 오늘 새 왕조를 열고자 한다.
금일을 기하여 고려의 어지러운 운명을 끊고, 양주목을 승격하여 새로운 도읍으로 삼으니, 나 박수경이 새로운 대고려국의 대왕으로 즉위함을 선포한다.
이 나라는 더 이상 권신과 간신배의 손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오직 충의와 공정함으로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법은 곧고 강하며, 정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모든 백성은 두려워 말고 새 시대를 맞이하라.
우리 대고려국은 용맹과 의리로 강성할 것이며, 결코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군주가 백성을 버렸다면, 나는 새로운 군주가 되어 그들을 보살필 것이다.
이에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니, 이제부터 이 땅은 대고려국이라 불릴 것이며, 나는 그 초대 대왕으로서 나라를 바르게 이끌 것이다.
문하시랑평장사 박수연의 오빠인 상장군(上將軍) 박수경이 정유자의 사사를 문제 삼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헌애왕후와 목종 그리고 문하시랑 박수연과 중서시랑 천독고를, 태의감 안유빈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북쪽의 서경(西京)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왕태후는 처음에 임조칭제를 거두겠다며 박수경과 협상을 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자, 서경으로 일시적 천도(遷都)하게 된다.
918년 7월 25일 나의 선조이시자 초대 황제이신 테조대왕께서 고려를 세우시고 그의 후손을 용손이라 하사 물려주시니 어느덧 7대에 이르렀다.
태조대왕께서 그의 후손이신 용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 하였고 그것이 곧 천명이었다. 우리 종실이 마땅히 천명을 따라 이를 수행하여 고려를 번성시키니 이것이 홍복이지 무엇이 홍복이겠느냐?
비록 지금 개경을 일시로 떴다만 서경은 태조대왕께서 말하신 가장 중요한 거점이 분명하다. 그럼 누구를 따라야하겠느냐?
반역의 땅 남경을 남향으로 강등시키는 바이니 역도들은 자진해산토록 하라.
이후 목종과 왕태후 그리고 조정 일파는 삼남(三南) 지역을 회유하고, 서경의 막강한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개경(開京)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고 다시 만월대로 복귀하게 된다.
천자(天子)는 그대(民)들을 위하여 존재하고 그대들은 천자를 위해 존재함이 이 세상의 이치라.
태조대왕께서 천명을 받으사 고려가 이어진지 언 100년이 되었는데 이런 중대한 위기가 생긴 것은 결국 천제(天帝)께서 고려의 결집력을 높이려는 뜻을 가지심이라.
그러나 우리의 성상은 용손이라. 절대 저 역도들이 함부로 침할 수 없느니라.
만백정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황실을 지키고자 하고 황실이 그 뜻을 알고 백정을 지키자 하니 어찌 이 용손의 강산에 흔들림이 있겠는가?
역적 박수경은 들으라.
네놈이 비록 역심을 가지고 이런 망측한 일을 버렸음은 분명하나 이로인해 네놈의 군사적 능력이 입증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 그리하여 니놈이 이쯤되어 역적질을 접고 다시 조정의 상장군으로 남는다면 그대의 목숨을 살려줄 생각 역시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제 이만하면 됐으니 포기하고 만년천자(萬年天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술을 올리거라!
목종은 왕태후의 공덕을 찬송하고자 예부(禮府)에게 일러 왕태후를 대왕태후(大王太后)로 높이라는 명을 내렸고 다음날 헌애왕후는 대왕태후로 높여진다.
임조칭제를 통해 성상폐하를 도우신 왕태후 폐하께서 조정의 분열로 인해 과로가 쌓여 건강이 많이 악화되시었다. 하여 늦지않게 존호를 올리라는 성상폐하의 명을 따라 태후께 " 대왕태후 "의 존호를 올리는 바이다.
또한 안유빈 태의감은 대왕태후폐하의 건강을 잘 관리 할것이다.
대왕태후의 말년
대왕태후로 높여진 이후에도 고려 재통일을 위해 노력했던 헌애왕후는 건강이 몹시 나빠지게 된다. 그런 와중 거란의 선전포고로 인하여 위기를 느낀 두 국가는 다시 조정을 합치게 된다.
한편 박수경의 부관이던 양대춘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평소 대왕태후에게 큰 원한을 가지고 있어 자주 무례를 범한다는 지적을 당하던 자였다. 그런 자가 바친 탕약에는 비소가 들어있었고 이를 마신 헌애왕후는 음독(飮毒)으로 인하여 훙하게 된다.
옥체(玉體)가 많이 상해있었던 헌애왕후는 궁인 정씨(宮人 鄭氏)에게 명하여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한 후 유언을 남겼다. 고려의 왕후가 된 지 25년 만의 일이었다.
그대들이 있어 고려가 다시 하나가 되었고, 이제 다시 한 번 태평성대를 열 날만이 남아있다는 것에 본궁은 차마 눈물을 감출 수 없다. 오랜 세월 혼란과 반란 속에서도 끝내 고려의 기틀을 바로 세운 것은 모두 그대들의 충성과 헌신 덕분이니, 곤원은 더 바랄 것이 없다.
고려의 태후로서 일평생을 나라를 위하여 살아왔건만, 그 세월의 대부분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쓰였으니, 나라의 안위를 지키려 했던 내 마음은 늘 무거웠다. 본디 군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요, 어미는 자식을 보살피는 자이건만, 나는 어미로서도, 나라의 어른으로서도 온전히 편한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내 생이 다하는 이 순간에도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이제 내 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여기까지만 사용하려 하심이라. 어찌 감히 그 높은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가고 나면, 그대들은 더욱 강한 의지로 고려를 지켜야 할 것이기에 병든 몸을 이끌고 마지막 교지를 쓴다.
지금, 거란의 침입이 눈앞에 닥쳐 있다. 어찌 너희들이 슬퍼할 겨를이 있겠느냐?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이때, 나 하나 잃은 것에 머무를 수 없다.
슬퍼하지 말라.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장례를 간소히 하라. 하루면 충분하다.
본궁의 유해를 거두고 나면, 다시는 울부짖지 말라. 슬픔에 젖어 허송세월할 겨를이 없다. 고려의 태후로서 한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았으니, 죽어서도 고려의 짐이 될 수는 없다.
모두 성상을 도와 나라를 지키고, 앞으로 천년 고려의 사직을 위하여 애쓰도록 하라. 고려가 있는 한, 곤원의 뜻도 영원하지 않겠느냐?
여담
각주
- ↑ 조회에 임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칭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