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귀비 성씨(해리 유니버스)

제나라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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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조
황귀비 성씨
대제국 희조의 후궁
성덕임
成德任
황귀비 성씨.jpeg
출생
1753년 8월 6일
재임기간
황귀비
1783년 1월 30일 ~ 1786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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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창녕 성씨
부모
아버지 성윤우, 어머니 부안 임씨
배우자
희조 개로황제
자녀
아들 강급, 강만석

개요

제나라의 마지막 후궁

의붓아들인 제 광조가 즉위한 이후 후궁제도가 폐지되어 제나라에 더 이상 후궁이 존재하지않는다 희조가 총애했던 후궁으로 알려져있으며 태도가 단정하고 총명할 뿐더러 재능·기술·예술까지 갖춘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희조가 내린 승은을 15년간 두 차례 거절하는 등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희조가 하인을 벌주자 비로소 후궁이 되었다.

생애

가계 배경

신분은 낮고 집안은 가난하고 변변하지 못했다 성윤우는 장흥 마씨와 초혼하고 사별 후 부안 임씨와 재혼하고 1756년에 사별하고 나서 단양 지씨와 삼혼 했다.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 따르면 정실부인 세 명 사이에서 5남 3녀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담(成湛), 성협(成浹), 성완(成浣), 성흡(成洽)은 무과에 급제했다.

입궁

황귀비 성씨의 입궁 계기는 풍산 홍씨 가문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1762년 이후에 풍산 홍씨 가문이 의빈 성씨를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 풍산 홍씨 가문은 제나라 황실의 외척 가문으로 자연스럽게 희조와 인연이 생겨 입궁하게 되었다.

비극적인 죽음

황귀비 성씨가 졸하였다.
하교하기를, "황귀비의 상례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제국왕조실록

황귀비는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었는데 곧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안학궁으로 돌아왔다. 희조가 그날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지만 병은 악화 되었다. 결국 1786년 9월 14일에 안학궁에서 사망하였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희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희조에게 “어서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사후

제 희조의 뒤를 이어 황귀비 성씨의 의붓아들인 제 광조가 즉위하였다. 제 광조는 천자의 정실배우자인 황후만 바라볼 수 있게 후궁제도가 폐지되어 더 이상 제나라에 후궁을 거느리는 황제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성덕임이 제나라 왕조의 마지막 후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