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 사회주의 연방/역사

19세기 이전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웨일즈 및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으며, 1800년 연합법으로 아일랜드 왕국이 연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연합 왕국의 성립과 18세기의 영국

1707년 연합법의 공표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연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던 당시에 웨일스는 이미 1535년 웨일스 법에 의해 잉글랜드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아일랜드 역시 1536년 잉글랜드에 의해 다시 정복되어 아일랜드 왕국의 군주를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가 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만이 별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면서 두 왕국이 한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명예혁명과 재커바이트의 반란

윌리엄 3세가 새겨진 은화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의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전제 정치는 결국 영국 의회의 반발을 가져왔다. 1688년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메리 2세의 남편이었던 윌리엄 3세가 영국 의회의 지원을 받아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 후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스튜어트 왕가의 본향인 스코틀랜드와 가톨릭 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에서는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요구하는 재커바이트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1688년과 1745년에 두 차례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1746년 완전히 진압당하였다.

대영 제 1제국

1897년 당시 영국과 식민지

1756년,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 서인도 제도의 여러 나라와 식민지가 참여한 최초의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인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영국은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 건설을 지속하게 된다.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미국의 독립으로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게 되었으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1770년 제임스 쿡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였으며 그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71년 무굴 제국으로부터 인도에서의 통상권을 획득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 지역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세 차례의 카르나티크 전쟁의 결과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인도는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803년 경 영국은 인도의 거의 전역을 식민 통치하였다.

경제의 발전

18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대량 생산을 위한 공장의 건설이 이루어지는 등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석탄, 철강, 방직과 같은 새로운 산업은 영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1765년 제임스 와트는 증기 기관을 발명하였으며 이후 대량 생산이 도입되어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리카르도, 애덤 스미스와 같은 많은 고전경제학 학자들이 경제학 이론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은 엔클로저 운동에 의한 농민 계층의 몰락과 불결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는 빈민층의 확대, 아동 노동, 공해와 같은 여러가지 문제도 함께 가져왔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과 같이 기계를 파괴하는 과격한 노동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에 의해 사회주의적 인식을 가진 사상가들이 출현하기도 하였으며, 이들의 주장 중 일부는 이후 대영의 사회주의 혁명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19세기

대영 제 2제국

1801년, 아일랜드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써 병합한다. 1840년대 아일랜드에 감자 대역병이 퍼졌고, 아일랜드에 식량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본국 정부가 아일랜드의 밀이나 고기 등을 시중에 풀면서, 대기근 같은 큰 위기 없이 대역병 사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결과 아일랜드의 반영 감정은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고, 그 이후 현재까지도 독립 여론은 OTL에 비하면 크지 않다.

19세기 중후반 대영제국을 건설하고, 산업혁명도 일어나면서 20세기 초인 1920년 즈음이 되자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차지하며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20세기

사회주의 혁명

그러나 20세기 초반 대영에는 다양한 분파의 사회주의자들이 나타났으며, 1920년대 초반쯤부터 전국 곳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전조가 나타났다.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대공황의 영향이 영국에까지 미치자, 결국 그 영향으로 1930년 중반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영 제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통해 대공황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어느 정도의 영향은 존재했고, 대공황으로 인한 일부 혼란과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이라는 사회적 상황이 더해져 혁명이 발생한 것이었다. 잉글랜드 성공회 신도였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 온건파 세력을 중심으로 수많은 분파의 사회주의자들과 무산계급이 연합하여, 혁명을 일으키고 왕궁으로 진격했다. 결국 1936년 8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왕실을 폐지하였다. 혁명 세력의 중심 중 하나였던 온건파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폭력 혁명을 부정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체제 교체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혁명 전 영국의 일부 급진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통해 체제까지 갈아엎고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즉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온건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혁명을 통해서는 왕실 폐지만을 진행하고, 정권 교체/체제 교체는 민주적 방법을 통해 이행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설정상 온건파의 사상은 현대 민주사회주의의 기반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사도행전 4장 32절의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말씀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입각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이하게도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 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현재까지도 기독교 국가의 성향을 지닌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이한 성질을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나 온건파를 비롯한 세력들은 현대 대영의 노동당의 전신으로 여겨지고, 폭력 혁명을 통한 체제 전복을 주장하던 급진주의자들은 현대 대영의 혁명공산당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내용은 대영 사회주의 연방/정치의 3번째 문단 참고.

왕실 폐지 이후 왕가의 일원들은 특정 국가로 망명한 것이 아닌,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일부는 "'윈저'라는 성을 버리고, 왕족/귀족으로써의 권리를 전면 포기하며, 대영 사회주의 연방의 한 인민으로써 살아가겠다."고 평의회에 맹세한 후 영국에 남기도 했다. 영국에 남기로 한 왕족 중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았던 일부의 경우에는 성뿐만 아니라 그 이름까지 개명해야만 본국에 남을 수 있었다. 왕족 중 누가 어느 나라로 도피했는지, 누가 본국에 남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본국에 남은 왕족의 경우는 주변인들에게는 물론 그 자식들에게까지 왕족 출신임을 알리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출생 이후 혁명이 일어난, 즉 본인이 왕족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던 경우에는 참정권(피선거권가 선거권 모두)이 부여되지 않았다. 물론 혁명 이후에 태어난 왕족 출신의 인민들, 즉 본인이 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에는 다른 인민들에게 보장되는 권리가 모두 똑같이 보장되었다.

​왕실 폐지 이후 의회는 해산되었고, 몇 개월 후 본토에서는 새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노동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고, 혁명공산당이 그 뒤를 이었다. 총선 이후 영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하며 '대영 연방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 이후 1949년에는 국명을 '대영 사회주의 연방'으로 변경하였다. 대영 연방공화국 시절에는 기존 유니언 잭에서 색 배치만 푸른색->검은색으로 바뀐 기를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 출신 일부 국가들에는 여전히 현 대영연방의 기가 아닌 대영 연방공화국의 옛 기가 들어가 있고, 연방공화국의 옛 기는 현재 대영연방의 육해공 통합 군기로도 사용된다. 대영 사회주의 연방으로 국명을 변경한 이후로는 연방공화국 시절의 기의 가운데 부분에 연방의 국장이 추가된 현재의 국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영 연방공화국 선포 이후 고등 평의회는 국가 안정화와 경제 회복을 명분으로 "평의회 비상 결의"를 발동하였고, 사실상의 평의회 독재 체제가 자리잡게 된다.

정권 교체와 체제 교체 자체는 합법적이고 평화롭게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혁명을 통해 왕실과 신분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사회 변화가 일어났고, 국내외로 일시적인 혼란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도르아문을 비롯한 독립 의식이 강했던 몇몇 식민지는 자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물론 본국 정부는 그를 용인하지 않았지만, 연방의 고등 평의회는 국내와 주요 식민지를 안정시키는 것에 힘을 쏟았고, 결국 독립을 선언한 식민지 중 다수가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그 이후 본국 정부에서의 수 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점차 다른 식민지들 또한 대부분 자치령으로 전환됐고, 곧이어 점차 대부분의 식민지를 독립시켰다. 다만, 남아프리카 연방 등은 비교적 최근까지 자치령의 형태로 연방의 지배 하에 있었고, 20세기 최후반에 이르러서야 독립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영국은 상당수의 해외 영토를 가지고 있고, 옛 식민지 지역의 국가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1세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고등 평의회는 수 십년 만에"평의회 비상 결의"를 해제하고, 연방의 구성국들의 자치를 확대하는 법률안을 승인함으로써 약 25년 동안은 좀 더 제대로 된 "연방제"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꾸준한 경제 발전을 통해 유럽의 강국으로써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프랑스 등과 함께 사회주의 진영을 이끌고 있다.

기타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90년간 몇 차례를 제외하면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패배한 적이 없으며, 현재 집권당 또한 노동당이다. 다당제를 채택하고는 있으나 실질적으로 노동당과 혁명공산당의 양당 체제이며, 노동당이 오랜 기간 우위를 점하고 있다.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만 가지고는 경제의 발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였고, 자본주의적 요소도 일부분 도입하였다. 노동당 정권의 사회주의적 정책+자본주의적 요소 일부 도입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경제는 꾸준히 발전했고,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하고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키프로스와 몰타, 약간의 해외영토만 남은 상황에서도 경제 강국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연표

1801년 아일랜드 병합
183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1840년 아일랜드 감자 대역병
~1901년 빅토리아 시대. 산업혁명 진행 및 대영제국 건설
1921년 대영제국 최대 강역 차지
1928년 잉글랜드 일부 지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함
1930년 사회주의 혁명의 전조가 전국 각지에서 나타남
1933년 잉글랜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남
1934년 웨일스, 스코틀랜드 각지에서도 시위 발생
1935년 아일랜드까지 시위가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시위 발생
1936년 8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왕실 폐지 및 의회 해산
1936년 12월 총선 실시. 노동당과 혁명공산당이 압도적인 표차로 여당, 제 1 야당의 자리를 차지
1937년 1월 대영 연방공화국 선포. 고등 평의회 제도 실시
1937년 7월 "평의회 비상 결의" 발동
1949년 "대영 사회주의 연방" 으로의 국명 변경
~1974년 대부분의 식민지 독립. 다만 남아프리카, 키프로스, 몰타는 예외
1984년 남아프리카 독립
1991년 키프로스 및 몰타 본토 편입
2001 고등 평의회, "평의회 비상 결의" 해제 및 "구성국 지방자치에 관한 법률" 승인 및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