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왕국

<참고>

  • 대한왕국은 올리비안 왕국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이다. 대한왕국의 설정은 DH님께서 작성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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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왕국
大韓王國 / The Kingdom of Korea

대한왕국 태극기.jpg
국기
대한왕국 국장 오얏꽃.jpg
국장
국호대 한 왕 국
大韓王國
상징국가애국가
국화오얏꽃
국조
표어경국천지(耿國天地):
하늘 아래에서 빛나는 나라
자연환경면적(영토)220,847km²
인문환경인구97,242,518명
인구밀도440명/km2
공용 언어한국어
정치국체입헌군주제
정부형태의원내각제
국왕이 한 (Lee Han)
총리대신문현철 (Moon Hyuncheol)
경제GDP$256,218(백만) (2조5621억)
1인당 GDP$26,348
GDP(PPP)$0000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원화(Won)
단위
법정연호__
시간대GMT +9

역사

  • 1894년 : 동학군이 한양에 입성함으로써 외세로 부터 자주적으로 국가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 1897년 :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광무개혁이 실시되었다
  • 1899년 : 광무개혁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국으로 러시아의 극동남하를 저지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연합을 한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냉각상태가 되었다
  • 1897년 :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
  • 1901년 : 의화단 운동에 파병했으나 패배 (한국군 최초 해외파병)
  • 1902년 : 고종 사망, 순종 재위
  • 1904년 : 러일전쟁 발생
  • 1905년 : 한중러 삼국동맹 결성
  • 1907년 : 대한상회 설립
  • 1937년 : 중일전쟁 발생
  • 1939년 : 2차 세계대전 발생, 중립노선 유지
  • 1942년 : 태평양 전쟁발생 친미 - 연합국 노선으로 변경, 전선에 한국군 파병
  • 1945년 : 태평양 전쟁 종결
  • 1947년 : 대한왕국으로 변경
  • 1950년 : 한국전쟁 발생
  • 1954년 : 휴전협정
  • 1956년 : 간도전투
  • 1968년 : 경제부흥 5개년 계획 실시, 새마을 운동 실시

설정

(한국전쟁) 1948년, 공산권 국가들이 한반도에서 1세계 편으로 기울던 대한왕국과 아시아로 진출하던 서방권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한왕국의 군인이자 공산주의자였던 김일성을 지원하여 세운 테러집단이 서로 대치상황이었다. 중국의 인력지원, 소련의 장비지원으로 준비를 갖춘 김일성과 공산당 세력은 마침내 1950년 6월25일, 평양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선포하여 전쟁(대한왕국에서는 내전으로 규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북부쪽 군부대를 대부분 장악한 김일성은 쿠데타 다음날 조.인.공(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을 선포하고 토지개혁 등 여러가지 정책을 발표한다. 당시만 해도 평범한 군사내란으로 파악하고 있던 정부와 왕실은 대응을 늦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5일째 되는날, 북부지방 대부분이 점령(이나 좋지못한 교통상황으로 일부지역은 늦게 점령되었음)되고 일주일째 되던날, 마침내 조.인.공은 남부지방을 침공하게 됩니다 주력군 대부분을 일본에 파견하고 있던 대한왕국은 본토에 남아있던 일부병력으로 저항 및 남하지연작전을 펼쳤으나 각개격파당하거나 전방에 고립되게 된다. 마침내 개전 12일후, 서울에 도달한 조선인민군과 대한왕국 국군은 치열한 방어전을 치릅니다 그러나 한강철교 폭파후 이승만 총리대신과 국왕이 서울을 탈출하고 며칠후 서울은 함락된다. 그리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국군은 피난민과 뒤섞여서 혼란스럽게 후퇴를 하였고 미군의 스미스 부대까지 패배하게 된다. 대전에서 미24사단이 패배하고 딘 소장까지 포로가 된 혼란스런 상황에서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다시 재개된 전시의회는 만장일치로 항전을 결정하게 되는데 한편 낙동강 전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할 정도로 절망적이던 한국은 일본의 주력군이 귀환하고 유엔군이 도착하면서 역전의 기회를 만든다.

마침내 인민군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고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점차 북진이 시작되는데 아직 북한군은 강대하였고 사령부는 이대로 올라갈 경우 수많은 시간과 물자가 소모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한편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후방을 치는 작전을 계획하였고 상륙지점을 인천으로 정해진다(인천상륙작전 계획). 그러나 백악관을 비롯한 상부는 5000대 1의 확률의 이 작전을 반대하지만 결과적으로 9월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은 맥아더와 박헌영(한국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며칠 안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고립되었던 국군부대 구출과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연합군이 뒤를 추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10월 쯤 북부에 진입, 나중에는 압록강을 바라보며 조.인.공을 소탕하고 평화를 되찾을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치도 못하게 수십만 중국인민지원군이 내려오게 되고 인해전술에 연합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중공군을 갈아버리며 북진하지만 밤에는 계속 진행되던 인해전술에 미 7기병사단이 고립되고 사령부가 구출을 포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부 산지에서 계속되던 중, 소규모 전투의 지속, 몇 년간의 계속되던 전투에서 수많은 병력이 죽어나가고 물자가 계속 소모되는걸 두고볼 수 없었던 맥아더 장군은 대규모 공세로 만주로 진출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하려 했으나 해임 하루 전 과로로 쓰러지며 마침내 연합군은 한반도 북부에서 공산군을 밀어내고 전장은 만주로 옮겨지게 된다. 만주에서 계속되던 전투에서 장춘전투에서 찍힌 한장의 사진(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어있는 어린아이)이 공개되면서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반전여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1954년 3월, 연합국과 공산군측은 휴전협정을 맺게되고 대한왕국은 한반도로 내려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간도에 틀여박혀 자칭 남조선 해방을 위해 테러나 해대는 테러단체로 전락하게 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한국전쟁 이후 간도에 위치한 반국가단체, 테러단체이며 '남조선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대한왕국에 대한 공격을 일삼고 있으며 주요인물 암살 및 총기난사, 폭탄테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저지르고 있으며 조.인.공의 군대인 조선인민군은 간도에서(대한왕국에서는 휴전선이라 칭함) 한국군과 지속적으로 교전을 벌이는 중이다.

왕국은 근대화, 80년대에 공화정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주도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숙청되었고 현대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사회

대한왕국은 세 단계의 사회적 계급이 있다.

  • 왕족 (최고층) : 국왕을 비롯해 대한왕국의 왕실을 구성한다.
  • 귀족 (준최고층) : 조선시대 정통 양반가나 근대화시기에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 시민 (보통층) : 왕국국민들의 거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음서제가 있었으나 2007년에 폐지됨)

인종

일단 대다수의 인구는 한국인으로 채워져 있지만 다수의 외국계 인구도 거주중이다. 대한왕국 국적을 기준으로 봤을때 국민들 9700만명중 9100만명이 한국인이고 이어서 중국계인 300만명, 일본인 200만명(대전기때 일본에서 넘어온 인구가 많다. 서울에도 리틀 도쿄에 일본인 70만명이 거주중이며 현 문현철 총리대신 비서실장도 일본계이다), 러시아계 50만명 기타 국가 50만명으로 채워져 있다.

경제

대한왕국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번의 전쟁을 겪은 후 폐허로 변해버렸다. 그러자 왕실과 정부에서는 노후된 건물과 시설 등을 현대화하는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였고 해외에 노동자 파견과 경제발전 5개년계획 등으로 급속도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88년 올림픽을 개최하여 전쟁의 폐허에서 당당히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현재는 상당한 규모의 경제강국이나 무리한 경제발전으로 빈부격차와 노동자 인권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있다.

문화

일단 대한왕국의 전통문화는 판소리, 한복 등 현실과 매우 유사하다. 전통음식으로는 비빔밥이나 김치 같은 것들이 있고 현재는 K-pop등 여러가지 문화가 흥행하고있다.

치안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위치하지만 국경 쪽으로 갈수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범죄조직, 밀입국자 등으로 불안정하다.

사법제도

상당히 엄격한 사법체계를 지니고있으며 왠만한 중범죄는 대부분 사형이라봐도 무방하다. 살인, 마약, 일정 금액 이상의 뇌물(그러나 사형 유예라는 것도 있다)등등 여러 중범죄의 경우 사형에 처하고 있으며 국가봉사형이라는 노동형도 있는데 보통 백두산 산림지대나 개마고원쪽에서 노동을 한다. 그리고 추방형은 말 그대로 국외로 추방하는 것이고 21세기까지 단두대, 공개처형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2010년 광화문에서 대규모 공개처형이 있었던 적이 있다 보통 정치범이나 특수한 경우만 단두대로 보낸다.

기념일

  • 한국전쟁 전승절 : 한국전쟁이 끝난 5월 28일,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붉은 리본 뱃지를 맨다.

사건

  • 2010년 올리비안인 인질사태 : 2010년 7월, 테러단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왕국을 침입한 사건
<2010년 올리비안인 인질사태>


북한군 수개연대급 병력이 국경을 넘어 남하하였으며 국경수비대가 조선인민군에게 사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으나 침입한 인민군은 빠른 기동성(대다수가 기병이였다)을 통해 북부지방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에 대한왕국 정부는 북부지역에 비상계엄령을 발효하는 한편 수십개 사단을 파견해 진압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생각보다 피해가 크게 나는데 이유는 산악전, 게릴라전에 능한 북한군과 무엇보다 침입한 북한군 대다수가 특수부대로 상당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600m 거리에서 저격당한 남한군 병사가 있었는데 문제는 그를 저격할때 쓴 무기는 아무런 장비를 갖추지 않은 평범한 개인화기였다). 수주동안 계속되는 혼전속에 민간인 사상자까지 나게되는데 한국군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사단장까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군은 남한 민간인들과 한국군 포로들을 인질로 잡아 한국군이 쉽게 포격이나 공습을 할 수 없게 하였다. 마침 문제가 생기는데 올리비안인 단체 관광객들이 탄 버스가 통째로 납치당한 것이다(초기에는 2명만 납치되었다고 소문이 났다). 이때 북한군은 데리고 다니기 힘든 노인 2명은 총살해버리고 나머지는 전부 납치해간다. 슬슬 시간이 지나고 '국민을 지킬 수 없는 나라'라는 비난을 받고있던 정부는 마침내 특수부대원들을 동원하여 우리 국민을 구출하는 작전을 (당시 한국 특수부대원들은 어떤 북한군 부대에 잡힌 귀족출신 장교 한명을 구출하기 위해 전부 그쪽으로 몰려간 상황이였다) 개시한다. 45명의 해병대 특수부대원이 한국 군용기를 타고 해당지역에 강하하였다(이때 한국군 몇 개의 사단과 경찰병력이 포위를 형성한 상황이였다). 대원들이 북한초병을 사살하고 작전을 진행하려던 순간, 부대원 2명이 북한이 설치한 클레이모어 폭발에 휘말려 전사하였고 이어 수많은 북한군들이 쏟아져 나와 (최소 200명은 넘어갔다고 한다)(그나마 이것도 한국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줄어든 숫자이다)교전이 시작되었고 위에서 말했듯이 북한군들의 실력은 어마어마했다. 실력에도 차이가 없고 엄청난 물량에 의해 포위당한 특수부대원들은 전멸당하였으나 마침 도착한 한국군 기계화 부대(구출신호를 받고 가는도중 기습을 받아 연대장까지 전사하는 혼전을 치뤄서 도착했다. 다른 5개 사단과 경찰병력은 구출요청을 못 받았다고 한다)가 특수부대원들을 구출하고 재정비후 작전을 계속한던 대원들이 마주친 것은 인질들중 15명의 시체였다(상황이 불리해지니 살해한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한명은 8살짜리 아이였다). 그러나 인질들이 전부죽은 것은 아니었고 북한군 생존병력이 남은 13명의 인질에 폭탄조끼를 입히고 협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 국무부장관이 긴급하게 한국으로와 통역(한국계이다)및 협상에 임하게 되고 북한군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올리비안 측은 인질 우선 석방이라는 요구로 팽팽히 맞서던중 어디선가 총성(쏜사람이 누군지 왜 쐇는지는 아직까지도 불분명하다)이 울리자 진압이 시작된 줄 알았던 북한군 장교가 격발장치를 누르고 결국 인질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파편(국무부 장관도 이마에 파편상 입음)과 폭발에 의해 현장에 있던 북한군 상당수가 전투불능상태에 빠진 틈을 타 한국군이 살아있는 북한군들을 체포한다. 그러나 아군대원 16명 전사 및 인질로 잡힌 우리국민 전원사망이라는 참담한 결과로 작전은 종료됬으며 정부지지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한편 한국군은 2일 후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펼쳐 (한국국왕도 전선에서 직접싸웠다) 북부내에 북한군을 전원 격퇴하고 국제사회의 중재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휴전협정을 맺게된다. 대한왕국은 상당수 병력이 전사하고 (한국군 전사자 458명 장교 21명 민간인 27명 사망) 많은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국왕지지도가 올라가고 대한애국당의 일당체재가 완고해지는 등 상당한 이익을 많이 봤으나 올리비안 왕국은 특수부대원 절반 전사 및 인질 전원 사망으로 총리지지율이 떨어지는 등 피해를 많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