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국/역사

만화국의 역사
灣華史
고대 만화국
(선사 ~ A.D. 700)
중세
(700 ~ 1700)
근대
(1701 ~ 1945)
현대
(1945 ~ )
선사시대부족국가시대이비광전도시대다마국동서시대중세만화양씨정권대만화국일제강점기만화제1국만화공화국만화제2국
방서개령성사명북위
몽야마아사모출궁조정
운사국
진(辰)씨 왕조 (1100년)
항결전군
공산만화
왜(矮)씨 왕조 (400년)오(吳)씨 왕조 (400년)홍(弘)씨 왕조 (700년)

선사시대와 만화도

이비광과 제 1차 통일왕조

기원전 100년경, 만화도에 청동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족통합으로 인해 여러 소국이 생겨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다마도 남부와 만화도 북부에 걸쳐서 일어난 '이비광'이라는 국가이다. 이비광은 가장 선진화된 청동기 기술로 만화국 전역을 정복해나갔으며, 초기에는 대표적인 지도자가 아닌 그저 여러 소국의 연합체였으나, 정복국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왕조국가로서 변모하였다. 이비광국은 400년 동안 유지되어오며 전쟁이나 반란, 외란없이 통일왕조를 유지 해 왔는데, 이 통일왕조는 뒤이어 발생하는 다마국 왕조와 만화국 통일황조와 더불어 만화사 3대 통일왕조로 불리운다. 이비광국의 왕조는 제 1차 통일왕조로 불리운다.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비광국이 탄생 할 때 까지만 하여도 일본계가 주류였다고 한다. 대부분이 큐슈의 쿠마소와 비슷한 계통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비광국의 왕은 '타카마웨(茶加馬艾)'로 불리었으며, 이후 이어지는 제 2, 3차 통일왕조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 한다. 이비광은 성립 이후 6대 타카마웨인 왜촌찰(矮忖察) 대왕 이전까지 주변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해당 소국의 세력가를 봉건영주로 앉히는 등 초기엔 봉건국가로서 주변을 통일하였으나, 이후 왜촌찰 대왕의 '오세바투' 정책을 통해 스스로가 세운 봉건제를 타파하고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이비광국은 주변국과의 교류가 극히 드물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11대 타카마웨 왜팽칠(矮澎漆)은 제주도를 침공하여 이비광령으로 삼고 탐라 나을(羅乙)을 영주로 임명하여 탐모라나을방(耽牟羅羅乙房)을 세우고 관리하였으며, 9대 타카마웨인 왜즐미무칭(矮櫛未巫秤)은 규슈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서진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말이 통하지 않던 관계로 별 소득은 없었다. 서진은 이비광을 '남만(南蠻)'으로 분류하였으며, 국가 형태가 갖춰졌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모를 정도로 이비광에 무관심 하였다.

이비광에 관련된 정보는 사학계에서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서적이나 유물의 부재에 기인하는데, 다마국이나 전도시대의 유물과 서적은 차고 넘치는데 비해 이비광에 관련된 서적은 이비광의 역사를 기록한 역지(歷紙)와 이비광의 대외 활동 기록을 기록한 교부(交簿)가 전부인데다가 유물은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역지와 교부 마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문법적으로 너무나도 이상한 한문으로 작성되어있기 때문에 암호해독 수준으로 해석이 어려운 것도 문제이다. 이에 대한 원인은 바로 이비광의 한자사용방법에서 기인한다. 이비광에 한자가 전해진 것은 기원후 100년 전후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초기 이비광은 한자가 한 글자마다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그저 중국에서 전래되어오던 때의 음과 형태만이 전해져 내려와 200년대 이후로 한풍이 전해지기 전 까지는 그저 고대 만화어를 한자음을 빌려 음차하여 쓰는 형태로 한자를 활용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역지와 교부에 기록된 음차된 한문 중 유명한 단어나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卵支又尼茶加馬艾矮叱卉何蘿于昻坍沒喇旿値當果古己羅乙旿示緊踏䯬禰娜.
나중에 타카마웨 왜질훼하라우께서 탐모라의 나을방을 시켜 그곳을 지배하게 하셨다.

-교부(交簿) '耽羅邦侵襲期'
浪多紆壘牙逼慤謠諧榛駝据懲吳錄來稱之牙㕧茶加馬艾撒那夭韋辣瓦自㻔
랑다우의 피해가 요해진타(만경)까지 오니 아 타카마웨여 이를 어찌하오까.

-역지(歷紙) '浪多紆催斷期'
瓣擺騖臝揶壘媼里非廣干以窒靑美羅㻔旨勿泥多瓦
판파무라야(사이비 반란군)의 세력이 전 이비광을 위협중이외다.

-역지(歷紙) '司比牙荷可卍期'

200년대 이후부터 한풍(漢風)을 받아들이면서 한자의 사용방법, 이름의 형태, 복식의 형태, 관직, 정치, 예법의 형태등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으며, 한풍의 전래과정에서 다마도로 한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다마도로 유입된 한족들은 현재는 다마민족에 완벽히 동화 되었으나, 사학계는 이들의 유입을 이래한인의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제 15대 타카마웨인 몽종왕 왜충포의 시대에 있어서 북부쪽에서 '랑다우'라 불리는 전무후무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이비광은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농지가 파괴되고 수만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등 그 피해가 엄청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지진은 이후 '신의 계시'로 까지 신격화 되어 랑다우의 신을 섬기고 이비광국의 멸망을 외치며 서부에서부터 일어난 '판파무라야의 난'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몽종왕은 이를 요해진타 성의 영기(靈氣)가 다하였기에 악재가 나는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가며 새 궁성을 지어 하늘의 노여움을 잠재우겠다며 나섰고, 이에 따라 새 궁성을 짓기 위해 노동력의 징발과 가렴주구한 세금정책을 통해 백성을 고통받게 하였다.

몽종왕은 신 요해진타 성의 착공에 앞서서 성을 지을 땅에 대한 신의 허락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3000여명을 순장하고, 신에게 공양한다는 명목으로 신하 혹은 장군들의 아내를 삶아 조장하는 등 정신나간 짓거리들을 일삼으며 민심을 잃었다. 신 요해진타 성의 건설이 진행되면 진행 될 수록, 신하들의 반감은 날이 갈 수록 커져갔으며 사정은 더욱더 쇠퇴하여갔다.

이 상황 속에서 반란을 모의하던 세력이 '오장(五將)'이었다. 오장은 판파무라야의 반란을 진압하여 몽종왕으로부터 전 이비광을 5곳으로 나누어 방어와 세력진압을 명받고 군벌을 형성하던 세력들로, 노무군(盧務君), 진새나리(辰새나리), 흑범돌(黑凡突), 양학래(陽鶴崍), 오패천(吾覇薦) 5인의 무관 세력들은 몽종왕의 압제에 대해 계속하여 벼르고 있었으며, 각자의 군벌을 기반삼아 힘을 합쳐 왜씨 왕조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다 301년 몽종왕이 시국을 바로잡아달라며 간청을 온 20인의 의환(義宦)을 궁 내에서 무참히 참하는 사건 (왜씨궁의 변) 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5장의 반란이 일어났다.(五將之反)

5장의 반란을 계기로 몽종왕과 그를 비롯한 왕실은 척살당했으며, '왜(矮)'씨 성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참을 당하였다. 살아남은 왜씨는 중국으로 넘어가 숨을 부지하였으며, 이로서 이비광은 멸망하였다.

이비광의 멸망이후 5장은 새로운 국가를 새우고자 하였다. 동부의 진새나리 장군이 주축이 되어 연합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다마국을 본거지로 두고 있던 오패천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오패천은 5장에서 축출되어 다마도의 독립국가인 다마국을 세웠으며, 나머지 4장은 합께 연합하여 '운사국'을 세웠다.

전도시대

다마국은 이후 다마도를 기점으로 한동안 평화로운 치세를 유지했다. 한편 만화도에서는 운사국을 지배하던 진씨 왕조의 나머지 장군에 대한 심한 차별로 인해 연합이 와해되었으며, 흑범돌 장군이 농(農)나라를 세워 운사국에서 분리되면서 전도시대가 개막되었다. 이후 노무군(盧務君)장군은 남부에 영(靈)나라를 세우고, 양학래(陽鶴崍) 장군은 제(濟)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만화국을 4개의 대국으로 양분하였고, 이후 여기에 다마국과 후이비광이 합해져서 '전도6수국'으로 불리고, 이 6개의 국가들은 전도시대를 이끌게 된다.

341년 규슈에서 은둔중이던 몽종왕의 손자인 '왜태문(矮兌文)'이 만화도로 복귀하여 '후이비광'을 세웠다. 그는 세력을 빠르게 불려 북부를 운사국과 양분하였으며,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300년경 부터 시작된 전도시대는 시간을 지나면서 더욱 심화되어 이곳 저곳에서 산적, 몰락한 귀족, 봉기, 종교등을 통해 수많은 소국이 난립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40여개나 되는 소국들은 서로간의 어떠한 친선이나 우호관계 없이 자국을 제외한 모두를 적대하면서 끝없이 전쟁을 치뤄왔고, 혼란은 가속화 되었다.

전도6수국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만화도를 차지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이었다. 영나라는 5장의 반란의 주역 중 하나였던 노무군(盧務君)이 세운 대돈산 아래에 '대돈부리(臺墩釜鯉)강 주변의 평야에 위치했던 국가로, 타국을 직접적으로 침공하거나 정복활동을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대돈산이라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방어전 중심으로 생존하였다. 농나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도6수국 중 가장 선진적인 농공업기술을 가진 국가로서, 경제적, 군사적 위치에서 가장 유리하였던 국가였다. 운사국은 북부 서쪽에 위치하였던 국가로, 배타적인 성격으로 인한 한계들로 인하여 다마국과 같이 무역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더디었다. 제나라는 현재의 평경성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국가로서, 전도 6수국 중 가장 존재감이 없는 국가였다. 후이비광은 왜씨왕조의 후손이었던 왜태문(矮兌文)이 세운 국가로, 이비광의 부흥을 꿈꾸었고 운사국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다마국은 이후 이런저런 국가들과의 무역과, 섬국가로서의 안전을 발판삼아 눈부시게 성장하였는데, 특히 법흥왕(법흥대군)의 때에는 왕보다 한단계 높은 대군(大君)을 사용 할 정도로 왕권도 높였으며, 문화 또한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그 뒤를 이은 덕천대군은 백제로부터 구결을 도입하여 학문을 일취월장하게 하였으며, 이 때 처음으로 나온 것이 다마국 왕조에 대한 신화인 다마기설(多麻記說)이다.

410년 경 부터 예흥대군의 기나긴 준비 끝에 다마국이 운사국을 침공함으로서 본격적인 전쟁이 전개되었는데, 이 전쟁을 마강전란(麻降全亂)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다마도에 국한되어있던 다마국이 드디어 혼란속에 있던 전도5국 및 그 방정(邦町)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이 전쟁의 결과로 만화도 전체에 다마국의 우등한 문명이 전파되고, 이로 하여금 만화도 전체의 통일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현재도 높이 평가 받는다.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그 동안 휘황대군의 산하에서 다마국군을 지휘하면서 무신의 칭호를 얻은 자가 성산양등환(星産亮藤環)장군이었다. 그는 전설의 영방원정(靈邦遠征)에서 대돈산의 지리적 이점을 영나라 군보다 더 무섭게 파악하면서 그들을 잔혹하게 정벌하였으며, 돌아올 때마다 승전보를 울리며 일약스타가 되었다.

500년경, 영나라와 제나라를 복속하면서 남부를 전부 점령한 다마국은 운사국과 후이비광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신으로 운사국과 후이비광을 공격하는데 다소 무리를 보이던 다마국은 일단 운사국과 농나라와 삼국동맹을 맺고 후이비광을 전적으로 공격하였다. 전쟁은 금방 끝나고 후이비광이 멸망하자, 다마국은 농나라 국왕으로부터 조건없는 항복선언을 받았으며, 이후부터 운사국과 끈질긴 전쟁을 시작하였다. 운사국은 초기엔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다마국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이후엔 자연히 세력이 약화되어 대부분의 세력이 다마국에 복속되었고, 마지막 왕인 진효(辰驍)가 부하들을 이끌고 서울크기의 섬으로 이동하여 운사국을 세우고, 1441년 만화국에 복속되기 전까지 독립국가이자 폐쇄국가로서 특이한 국민성을 형성해갔다.

다마국과 제 2차 통일왕조

531년 통일을 이룩한 다마국은 통일전쟁을 통해 인기를 얻은 성산양등환 장군의 쿠데타로 인해 대군이 왕권을 실추하였으며, 성산양등환 장군은 재상직인 전명대신(傳命大臣)에 앉아 사실상 다마국의 국왕으로서 전권을 행사하였고, 이는 만화국이 멸망 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다마국은 이후 700년까지 200년 동안 통일왕조를 이어오고, 전쟁이나 반란, 재해 없이 온 백성이 편안한 삶을 누리며 번영한다. 그 번영의 절정에 달했을 때가 610년대 부터 시작된 순통명치(順統明治)인데, 만화어로 '모든 일이 잘 되어감'을 뜻하는 '순통'이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712년 닥친 쓰나미인 '야타이'(搖水)에 의해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그 전성기도 끝이 나게 된다. 인구의 1/5를 잃고 국토의 30%가 황폐해지면서, 피해를 메꾸기 위해 조정은 가렴주구한 조세정책을 펼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곳 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장군이었던 승도상수령(承到常秀令)이 722년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만화도 동부에 '몽야마국'을 세우면서 600년간의 동서시대가 열린다.

동서시대

다마국은 이후 740년에 일어난 '역성혁명'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이후 방서국이 세워졌다.

방서국은 만화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공화체제'로, 각 지방에서 뽑은 '현민대장'(賢民臺丈)으로 이루어진 현민여의회(賢民與議會)가 조정역할을 하였으며, 현민여의회에서 뽑은 1인이 종신직인 '민립제'(民立帝)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민립제였던 여상순이 현민여의회를 해산한 후 개령국을 세우면서 방서국은 멸망하였다.

개령국은 역사상 최초의 법가주의 군주국으로, 군주인 태굉제왕(泰宏帝王)이 다스리며 법가의 창시자인 한비자를 국수호신으로 섬기는 나라였다. 그러나 역시나 너무나도 엄격한 법가사상에 따른 가혹한 통치와 수많은 암군과 폭군들로 인하여 오래가지 못한 채 929년 멸망하였다. 개령국의 멸망이후 장군인 이상서가 성사명국을 세웠다. 성사명국은 멀리 아랍지역과도 교역하고 중국 복건으로부터 민상(閩商)들이 찾아와 남부에 경항의 모태가 되는 마민항(麻閩港)을 세우면서 무역국가로서 발전하였으며, 원나라의 공격또한 막아내는 등 흥하였으며, 문화적인 발전 또한 일취월장하여 수많은 주변국에 다마화(多麻畵)를 유행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너무나도 잦았으며, 복건지역으로부터 생겨난 민구(閩寇)들 또한 가세하여 남부를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한편 몽야마국은 승도상수령 대왕 이후 14명의 왕이 지나가면서 흥하기 시작했다. 승도상수령 대왕은 중앙집권체제 대신 봉건제를 다시 채택하여 장차용제(將磋用制)라는 군 중심의 봉건체제를 선택하였으며,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유력 군벌이 서로의 영역에 관여하지 않고 각 지역마다의 특색을 살려 성장하였다.

東坪之豊和自我達天王家家營溢寧幸顔卽國之歡
동평의 풍요가 우리 대왕으로부터 시작되니, 집집마다 행복에 넘치는 얼굴이 즉 나라의 행복이다.
-동서대기(東西代記) '몽야마 편'

그러나 몽야마국은 이후 태정천왕(泰晸天王)(971~988)의 때에 들어서부터 20년간의 대기근이 시작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상업을 장려하고 농업을 경시하는 숭상경농 정책을 통해 외부자원으로 버티기를 시도하였으나, 인구의 91%가 농업에 종사하던 농업국가로서 이와 같은 정책은 농민들의 생활수단을 억제하고 몇 안되던 상업계층에 너무나 큰 힘을 실어주는 실책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정천왕을 이은 아혜천왕(亞慧天王)(988~1031)는 숭상경농정책을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상업계층의 힘과 자본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져, 결국 지역의 봉건군벌과의 결탁으로 이어졌다.

이후 1051년, 군벌과 상인세력의 결탁은 너무나 심해져 각 지역마다 아사자가 넘쳐나게 되고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이 때가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정은 이들의 이러한 부당이득 축재에 대해 엄벌 내리려 하였으나, 이미 봉건제 산하에서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군벌방가(軍閥邦家)를 이룬 세력들은 조정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고 각자 국가를 세우는 등 혼란이 커져갔다.

이 때 재상이자 몽야마군의 원수였던 홍승희는 몽야마군을 이끌고 벌벌(閥伐)이라 불리는 군벌통일작업을 직접 이루어내었고, 이 덕분에 몽야마는 군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고,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몽야마의 군주였던 문응천왕(問應天王)은 벌벌을 완수하고 인기를 얻은 홍승희를 시기하였으며, 하여 홍승희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암살이 계속하여 실패하자, 문응천왕은 홍승희를 역적으로 삼아 누명을 씌우고 처형하려 하였으나, 역으로 홍승희를 따르던 수많은 몽야마군이 그의 뜻을 따라 역성혁명을 일으켰으며, 이에 몽야마국은 멸망하고 마(麻)나라가 세워졌다. (1080)

이후 마나라는 국호를 '아사모(亞謝毛)'로 바꾸었으며, 홍승희가 개국대왕으로 올랐다. 개국대왕 때 부터 5대 귀민왕까지 아사모는 군벌의 난동과 대기근으로 혼란스러웠던 국내를 안정시키고 발전의 기틀을 잡았으며, 이 후 명희왕의 대에 들어서부터 서부를 정벌하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성벌론(城伐論)'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319년부터 고비왕이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9년간의 전쟁을 '동서대전(東西大戰)'이라 부른다. 이 전쟁의 결과로 성사명국이 멸망하였으며, 고비왕은 통일 아사모의 국왕이 되어 전 만화를 통일한 2번째 인물이 되었댜.

동서시대가 끝난 이후, 고비왕 홍희래는 1332년 만화국을 성립시키면서 황제국을 표방하게 되는데, 이 때 부터 사용한 국왕의 호칭이 바로 '천제'(天帝)이다. 또한 '만화'라는 호칭이 현재 만화도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민족과 그들이 창달해낸 문화를 아우르게 된 때도 바로 이 때로 '만화민족', '만화어', '만화도' 등의 단어가 정착한 때이다.

무엇보다 이 동서시대를 끝으로 만화국은 700년 가량 동안 통일왕조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만화국의 성립이 만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만화국과 제 3차 통일왕조

이후 만화국은 이앙법과 시비법등의 전래를 통한 농업생산의 발달, 그리고 타국간의 교역을 통한 무역국가로서의 입지, 외부 침략의 빈번한 실패를 비롯한 반란과 봉기의 부재 덕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미 1500년대에 지폐가 통용되고, 3~4층 정도의 높은 건물들이 수도인 타이긴에 들어섰으며, 581년 이후로 1000년동안이나 독자적인 세력을 고수해온 운사국을 드디어 점령함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전국통일을 이루어내었다.

또한 일본에서 전래된 '가명'(仮名)문자를 통하여 학문의 발달 또한 일취월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 동아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만화국은 평화로운 정국을 유지했는데, 전란 속에서 안정을 찾아 중국과 한국, 일본, 류큐각지에서 총 7만명 정도가 만화국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를 '이족만화이래'라 부른다. 이족만화이래 이후 만화국의 인구는 1300만명을 웃돌았으며, 초기에는 조중일 모두 각자간의 커뮤니티에서 배타성을 유지하며 지냈으나, 가장 만화민족과 어체나 문화가 비슷하였던 조선인의 동화를 시작으로 모두 만화민족에 동화되었다.

이 때 조선인들의 언문전래를 통하여 한글이 점차점차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전국적으로 통용되지는 아니하였으며 부녀자들과 평민들의 의사소통이나 아동의 한자학습용 주음부호로 널리 이용되었다.

영본군 치국시대와 제국주의

1701년 경도방본영사였던 양정수가 자신을 좌천하려던 정종 대영천제를 암살하고 그와 사돈관계였던 홍판표를 데려와 천제의 자리에 앉혔다.(경진변천) 이후 양정수는 천제의 호위기관인 '천수국'을 세운 후 천수국의 수장인 '영본군'(令本君)의 자리에 앉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제는 실권을 잃었으며 양씨가문의 126년간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양정수는 자신의 세력권이 있던 해동(海洞)(현재 만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신도(新都)'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만경수도권의 시초가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왕대홍주명(王坮泓株命) 장군은 반역 진압을 외치며 제군을 이끌고 신도를 침공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신도침공사건으로 인해 제군을 완벽하게 제압한 영본군의 세력이 더욱 공고해졌을 뿐이었다.

양정수 이후 영본군에 취임한 양성택은 성경에 있던 경세궁을 신도로 옮기고, 기존의 궁을 공궁(空宮)화 하고 어응궁(御應宮)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천제인 동종 부영천제는 이에 군말없이 따랐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성경은 사실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양성택은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공고화하는데는 누구보다 특출났으나,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의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세도정치기간 동안에 일어난 대기근과 신분제 붕괴 및 빈부격차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분제의 대두 등으로 인하여 만화국은 더욱 더 멸망이 가속화되어갔으며,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군웅과 도적이 할거하였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1811년, 영국의 HMS피나포어호가 경항에 불법으로 상륙하였다. 경항에 상륙한 HMS 피나포어호의 선원들은 경항 내에 있던 상인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그곳에 불법으로 영국군의 초소를 세웠으며, 만화국에 강제적인 개항을 요구했다.

양씨정권은 처음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였으나, 점점 경항 주변 상권을 위협하면서 공격적으로 다가오던 영국군 측에서 이들의 무단점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14명의 상인을 무자비하게 죽이자, 이에 이들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결국 HMS 피나포어호는 경항점거 12일만에 돌아갔으나, 이후 레이놀드 제독이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와 만화국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얼마안가 이들의 개항요구를 수용하였다.

개항이 성사되고 난 뒤 경항을 중심으로 서양문물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만화는 새로운 문물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후부터 들어오던 수 많은 불평등 조약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고, 근본적으로 서양에 겁을 먹어 덥썩 개항 한 것에 대해 비판받던 양씨정권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갔으며 이에 전국적으로 양씨정권을 타도하는 움직임이 격화되었다. 이에대한 반사이익으로 지지율을 높여가던 순조 조정은 이 기세를 몰아 양씨정권에 대해 '복궁'을 요구하였고, 이에 양씨정권이 응하고 양씨정권의 마지막 영본군이었던 양강석이 1873년 경세궁으로 돌아가면서 양씨정권은 막을 내렸다. (임신천환)

순조는 이후 주변열강의 입헌군주체제를 본따 정치체제를 개혁하는 '변국'을 실시하였으며, 1881년 제 1차 이제순 내각이 출범하면서 입헌군주제의 시작을 알렸다.

1881년 개혁이 성공한 이후 만화국은 일본의 근대화를 본따 의종과 국무경인 이세민의 주도 아래 '수신자강 운동'을 실시한다. 수신자강 운동은 메이지 유신을 벤치마킹 한 개혁운동으로, 단순한 문물의 수용 뿐만 아니라 만화총헌을 제헌하면서 전제군주제를 버리고 자신의 권력을 희생하는 등 개혁에 최선을 다했다.

제 1차 수신자강 운동의 개혁 내용
황족을 제외한 타 신분의 폐지, 토지, 조세제도의 금납화, 상민학교-중학교-영민학교로 대표되는 의무교육제도 실시, 우편제도 실시 및 체신성 설치, 철도청 설치 및 철도 건설

제 2차 수신자강 운동의 개혁 내용
도서현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산업혁명 실시, 서양양식 수용(습양풍제오), 구어학(歐語學) 의무교육 실시, 경항, 만경, 일모토 개방 및 무역성 설치, 폐번치현을 본따 기존 봉건제도 폐지 후 중앙집권적, 수직적 지방자치 시작(폐국치현)

제 3차 수신자강 운동(1차 개헌)
의회민주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최초의 총선거 실시, 민주주의 정착

수신자강운동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중국의 변법자강운동과 달리 집권층과 황실이 개혁을 주도해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나 권력사수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론이 통일되어 쉽게 개혁을 이루어나갈 수 있었으며, 덕분에 1900년대 초반엔 타 열강을 따라잡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제항전기와 근대국가 설립

일본은 개혁의 과정에서 점점 제국을 표방하고 대만같은 식민지를 넓혀갔으나, 만화국은 개혁이 성공한 이후에도 식민제국을 표방하지 않았다. 물론 만화국 내에서도 제국주의세력은 존재하였으나, 이미 일본이라는 강력한 호적수가 있는데에다가 급격한 개혁개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내치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제국주의적 팽창같은 큰 일은 아직 의논 될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만화국은 빠른 개혁을 통해 국제사회에 그 모습을 과시하던 한편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세력다툼에는 큰 힘을 쏟지 않는 이중적인 외교를 행했다.

1920년 5월 1일 일본제국 해군의 게이오호(경응호)는 다마도 북마국(北麻國)의 삼평항에 경유를 핑계삼아 상륙하였으며, 항사주 미야모토 요시히로가 상륙을 불허하자 게이오호 측은 사령관이던 나카소네 시마다 중좌를 중심으로 삼평항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이 과정에서 삼평항수대에 의해 카와구치 소좌가 사살당했다. 그 후 5일 후 5월 6일, 일본제국은 카와구치 소좌의 사망과 이에 관련한 게이오호 사건에 대한 터무니 없는 금액의 배상 및 삼평항을 포함한 다마도 북부전체에의 영구임대를 요구하였으며, 만화국 정부가 이를 단칼에 거부하자 19일 대만최후통첩을 보낸다.

당시 국무경이었던 김원승은 이러한 일제의 무모한 수에 대한 해결책을 갈구하기 위해 당시 대의원과 참의원 전체와 내각인사, 천제인 수문천제까지 모두 모집하여 '대회의'를 열었고, 전체 500인 중 382명의 의결로 일제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일본이 이러한 터무니 없는 요구를 무시했다고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리란 확고한 믿음 아래 이뤄진 결정이었으나, 이와 다르게 일본은 6월 6일, 바로 한달 전 난동을 부렸던 삼평항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만화국을 공식적으로 침공한다. 이를 '왜제습침(倭帝襲侵)'이라고 한다.

왜제습침이후 일본은 8일만에 다마도 전체를 점령하였고, 이후 4일 후 대화연주(다왜현)까지 점령하였다. 이 때 대화연주에서 만화를 배신하고 일본에 붙은 일본계 만화인들을 '간만왜(奸灣倭)'이라고 부른다. 일본제국은 만화국을 침공한지 1년만에 평경성 전체를 점령하고 나카미야코를 함락하였으며, 나카미야코의 함락이 다가오자 김원승 국무경과 수문천제는 눈물을 머금고 부득이하게 케이미나토로 어가와 조정을 옮기게 되었다. 이를 '수문출궁'이라고 한다.

1921년 5월 20일 케이미나토의 베츠젠코(別御居)에 당도한 김원승과 수문천제 세력은 출궁조정 성립을 선언하였으며, 이후 12월 일제 치하 만경도에서는 간만왜인 김성림 전 국무경(가네코 나리바야시)를 대총통으로 하는 만화국 괴뢰정권을 세웠다.

이후 괴뢰정권과 출궁조정은 도서국 전투와 평경성 전투 등으로 대표되는 '호국전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종왜군광란이나 적경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나 잔혹한 사건 또한 많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출궁조정 외의 '신사상파'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수 많은 민중들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지지층이 있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무송학숙원 정과졸업생들과 임시국군 출신으로 이루어진 '공화파'가 그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블라디미르 삼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자들은 만화국 괴뢰정권을 타도하고자 다왜현에서 일어난 조직으로, 야마토계 만화인이 대다수를 이루었으며, 역대 최대규모의 항일무력시위로 알려진 '5.10 북위대항거'를 배후조종하여 북위정권에 크나큰 손실을 주었다. 또한 이태성으로 대표되는 공화파들은 북위정권과 출궁조정을 가리지 않고 만화국 전역에서 활동하며 항일의군인 '조국공민군(만화항결전군)'을 이끌었으며, 이들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적경현을 침공한 일제가 대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항일세력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으나, 1935년에 일어난 적경대학살 이후 추모의 분위기 속에서 전의를 키운 출궁조정세력이 대돈수호전투에서 대승하면서 부터 역전된 전세는 이후 다마상륙대전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다마상륙대전을 통해 북부를 수복한 만화국은 일본이 연합국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를 노려 만경도를 탈환한다(1940년).

만경탈환 이후 본도를 완벽하게 수복한 출궁조정은 다마도로 망명한 가네코 나리바야시 정권을 끝장내기 위해서 40년부터 44년까지의 긴 시간동안 다마도에서의 장기전을 벌였으며, 이를 '다마장전'이라 부른다. 다마장전은 장기전을 통해 일본군에 적지않은 타격을 주었으며, 결국 운사도로 망명한 가네코 정권을 1945년 7월에 완벽히 처단하고, 1945년 8월 20일 공식적으로 호국전쟁의 종전을 선언하였다.

전후 현대 만화국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만화국 내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모두 떠나게 되었다. 혼란이 정리되고 나자 만화는 일제항전기의 주축이 되었던 세 권력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김원승 재상과 장조 오행천제를 위시한 '만화국세력', 하나는 공화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뭉친 이태성의 '만화항결전군', 다른 하나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등 뒤에서 버티고 있던 '만화극좌대동단결공산주의자민주연합'이었다. 이 중 가상 큰 지지를 받고 있던 세력은 단연 농민이라는 거대한 지지층을 기반으로 한 '만화극좌대동단결공산주의자민주연합' 이었다.

이 중 가장 큰 지지를 받던 세력은 만화극좌대동단결공산주의자민주연합이었다. 인구가 몰려있었던 북위에서 5.10 대항거등을 이끌던 만화공산연합은 남부에서만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만화국세력과는 다르게 전국적으로 큰 지지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만화국 세력과 항결전군 세력에게 적색테러가 많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블라디미르 삼은 이 기세를 몰아 '만화공산당'을 창당하고 중국공산당과 소비에트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아 여러 포퓰리즘 정책을 앞세움으로서 유명세를 넓혀갔다.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에 따라 만화국 복궁조정과 만화항결전군은 반공을 목표로 한데 뭉쳤으며, 이로서 '만화반공연합'이 출범하였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정통성을 앞세워 공산주의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김원승 재상은 '반공선언'을 선언하고 만화국 내 모든 공산주의 활동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중국 소련은 각자간의 사정 탓에 만화공산당에 군사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만화공산당은 약해진 군사력을 가지고 다마도로 망명하였다. 블라디미르 삼은 이후 중, 소가 안정적인 지원을 재개하기 전 까지 다마도에서 자치정부를 꾸려 반공연합에 저항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다마도를 기점으로 '만화공산주의자치정부'를 설립하였으며, 본도에는 '만화공산주의자치정부민맹'을 세워 게릴라전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49년의 국공내전이 끝나고 바로 연이어 6.25가 터지면서,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위치인 공산조선에 온 지원이 가해지면서 오히려 만화공산당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지원에 중심을 두던 만화공산주의자치정부는 슬슬 그 역량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잠정적으로 허용되었던 개인토지 소유권을 빼앗고 스탈린주의적인 전체주의정부로서의 성격으로 점점 변모하기 시작하였고, 다마도민들의 생활 또한 힘들어졌다. 이를 알게된 민맹은 사실상 공산당에서부터 빠져나와 와해되었다.

이후 만화공산주의자치정부도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조직원들은 공산주의 국가로 망명을 가거나 배신하고 반공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결국 블라디미르 삼은 1951년 내란죄로 체포되어 만경도에서 조리돌림당한 끝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만화 반공전선은 김원승 세력이 정, 이태성 세력이 군을 담당하는 형태로 합의를 보았으며, 이에 1952년 김원승을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만화국이 건국되었다.

초대 내각총리대신인 김원승은 1960까지 8년간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임하였으며, 외교적으로는 동아시아 반공연합을 구축하고 한국, 대만과 단독수교를 맺는 등 반공을 중시하는 외교를 펼쳤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뉴딜정책을 벤치마킹하여 '다마노믹스'라고 불리는 국가주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하여 선진국으로 발전 할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도서현의 공장지대를 재개발하여 공업발전을 꾀하였다. 또한 1957년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운사국을 반환받았다.

1960년 김원승 내각총리대신이 사망하자 대의원과 참의원이 공동해산되었다. 이후 2대 총선에서 국민당이 재차 승리함으로서 후임이던 이상섭이 제 4대 내각총리대신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상섭이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한지 2주 후, 당시 만화국군 총사령이던 이태성 장군이 김원승의 사망을 기회삼아 4.4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대의원과 참의원이 해산하였고, 당연히 이상섭 내각총리대신도 해임되었다.

이태성 장군은 4.10 시국선언을 통해 개헌 및 천제제 폐지, 공화국으로서의 전환을 선포하였으며, 1961년 '만화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고 초대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국민당은 해산 이후 김원승의 아들인 김기현(당시 32세)을 주축으로 '복고당'을 결성하여 황가를 보위하고 이태성정권의 타도를 도모하였다.

이태성 총통은 이후 다마노믹스 정책을 철폐하고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신도시에 대한 대규모 개발과 중공업 육성, 그리고 사회 인프라 재조성을 통해 만화국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실제 이태성 정권 8년동안 만화국의 경제성장률은 대한민국에 버금갈 만큼 높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정통성이 전혀 없었으며 국민의 지지또한 받지 않았던 이태성 정권은 그 정권의 말로가 예정되어있었다는 것도 의미하였다. 이태성 정권은 공화국이라고는 하였지만 야당의 창당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며, 주요 요직은 모두 이태성이 이끌던 만화항결전군 출신이 차지하였다. 또한 새국민교육원이라 불리우는 수용소를 운영하면서 김기현, 승민석 등의 야당인사들을 탄압하였으며, 1964년에는 다왜현에서 일어난 봉기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의 사상자를 내는 등 인권의식에 대해 무지하였다.

이태성정권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는 1967년부터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며, 역시 그 중심에는 복고당이 있었다. 이태성의 권위주의적인 통치에 항거하면서 일어난 시위는 1968년 이후 전국적으로 과격화 되기 시작하였으며,1968년 군인들의 명령불복종으로 일어난 '박찬열 사건'으로 인해 군 또한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태성정권의 타도를 외치기 시작하면서 결국 1969년 이태성 총통의 하야선언으로 이태성 정권은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정치세력의 주축이 된 복고당은 장조 오행천제를 다시 천제로 복고하여 공화제체를 종식하였으며, 다양한 세력을 품고 있던 복고당은 크게 국민당, 사회당, 민주당의 3당으로 나뉘어 총선에서 맞붙게 되었다. 한편 이태성은 왕정복고이후 내란수괴로 전락하여 어명에 따라 과거의 공적을 인정하며 가택연금에 처해졌으며,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만화국 정부와의 마찰을 우려하여 전부 거부되었다. 또한 공화국이 붕괴함에 따라 전직 국가원수로서의 어떠한 예우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보안이 지켜지지 않다시피한 자택에서 살해위협과 욕설에 시름하다가 은둔가옥으로 이주하여 1971년 고독사 하였다.

1970년 총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에서 5대 박일산 총리가 취임하였다. 박일산 총리대신은 의료복지계획을 실행하여 만화국을 아시아에서 한국에 버금가는 의료복지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박일산 총리 이후 1974년부터 집권한 사회당 출신 총리인 6대 택영수 총리대신은 사회주의 복지를 모방하여 세금징수를 전보다 더욱 무리하게 진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급격히 안 좋아진 국민경제생활에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왔고 이에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1975년 돌연 사퇴하였다.

택영수 총리의 복지정책 실패로 인해 사회당은 다음 총선에서 과반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국민당에 정권을 넘겨주었으며, 국민당에서는 김원승의 아들인 김기현을 총리대신으로 선출하였다. 김기현총리대신은 대규모 적인 철도사업을 실시하여 경항에서 다마도까지 전국을 일주하는 고속철도인 전국첩속선을 개통하고, '철로동일화사업'을 통해 전국의 철로를 복선 표준궤로 통일하였다. 또한 유성~경항간 고속도로를 개통함으로서 전국일일생활권시대를 열었으며, 리다마노믹스 정책을 통해 이태성 정권 당시 문제되었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1982년 아시안게임의 유치를 성공하였다. 김기현 총리대신은 7대부터 11대 까지 1984년까지 임기를 지냈으며, 이는 최장기간임기 기록으로 아직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1984년을 맞이하여 실시한 총선거는 전 만화를 들썩였다. 원외정당에서 시작하여 줄곧 5석내지는 10석 정도를 점유하면서 유지해오던 '자유혁신당'이 민주당과 국민당이라는 두 정적을 꺾고 당당히 제 1당으로 오른 것이었다. 이에 자유당을 견제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민주당과 국민당은 '제 1차 연정'을 실시하여 자유당보다 8석 많은 의석을 통해 집권하였으며, 연립내각의 총리로서 승민석이 취임했다. 승민석은 옛날 몽야마국을 세운 승도상수령 장군의 후손으로, 90년대 IMF와 일본 버블경제로 인한 경제난의 여파를 유연히 넘기고 경제를 살려낸 총리로서 많은 지지를 얻었으며 1990년까지 총 3번 연임하였다.

17대 총리로서는 최초로 자유혁신당 출신 총리인 민송태가 당선되었는데,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다왜현, 이비광 등의 북부지역를 무리하게 개발하기 위해 2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투자하였다가 대실패하여 그 책임을 물고 사퇴하였다. 민송태의 북부개발은 국고의 낭비와 개발실패로 인한 부동산 거품,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악화등 악재들을 계속하여 불러왔으며, 이 때문에 아직도 최악의 총리로서 기억되고 있다. 이 이후 자유혁신당은 사실상 붕괴하게 되었으며, 노동당과 자유민주연합의 양당체제를 정착시키게 되었다.

18대 총리인 한자와 나오키는 여러 면에서 의미하는 바가 큰데, 연정을 유지하던 자유당과 민주당을 합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출범시킨 장본인이자 최초의 이래왜인 출신 총리이기 때문이다. 특유의 인상과 젊은 나이로 대표되는 그는 '한자와노믹스'를 통하여 김성주 총리의 실책을 메꾸었으며 국가유공자특별법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대우가 좋지 않았던 국가유공자에 대한 지원을 실시하였다. 한자와 나오키총리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재임 및 집권하였다.

이후 최초의 이래한인 출신 총리로서 리하오잉이 1년간 집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