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연방공화국



< 스텔라연방공화국 >
Federal Republic of Stella

스텔라기.png
국기
국호스텔라 연방 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tella
상징국가
국화라일락
국조
표어대서양의 중심, 평화의 상징
자연환경면적(영토)3,488km²
인문환경인구1,115,000명 (1940년 추정)
인구밀도320명/km2
공용 언어영어
정치국체공화제
정부형태의원내각제
총리화필
의회장데니 존
경제GDP$14,281(백만)
1인당 GDP$12,808
GDP(PPP)$0000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파운드 스털링
단위
법정연호---
시간대UTC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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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소개 및 상징

* 스텔라연방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tella 은 서아프리카로부터 대서양 쪽으로 700여km 떨어진 오이리제도(가상의 섬)에 위치해있었으며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가까우나 그 외 모든 면에서 유럽과 가까우므로 특이하게 유럽국가로 분류되는 국가였다.


과거, 공화제를 바탕으로 총리대신을 선출하는 의원내각제를 시행했다.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일반 총리를 선출하는 민주공화국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본래 영국의 여왕을 섬겼지만 점차 영국을 배격하고 미국을 신봉하면서 더 이상 섬기지 않게 되었다.

국기스텔라연방기라는 명을, 국장페데럴 리퍼블리카라는 명을 붙였다.]

국가 위치 및 지역도

다음은 스텔리연방공화국의 위치와 간략지역도이다.

  • 사라데네 구 : 사라데네 구는 산악지형으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안 왕국의 문화지구가 들어설 곳이라서 인구가 최근 증가하고 있다.
  • 노스메레니치 구 : 노스메레니치 구는 올리비안 왕국의 메레니치 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역 이름이다. 이 곳에 주택단지가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햇빛이 잘 드는 평야에 있다고 해서 '선라이즈 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스텔리아 구 : 스텔리아 구는 올리비안 왕국의 스텔리아 신도시의 행정, 사무, 금융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옛날 영국의 군사기지가 있었고 영국인들이 형성했던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유럽인들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점차 규모가 증가했고 남쪽의 런던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영국이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안-영국 전쟁 참고) 도시는 꾸준히 성장해 올리비안 왕국의 제 2 도시로 발전했으나 수도의 발전으로 수도로 인구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이후 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되기까지 현대화가 더뎌지게 되었다.

세 구역은 이후 통합되여 스텔라연방공화국을 구성한다.

행정구역

아래는 자세한 행정구역도이다.

올리비안왕국.png

수도 (Capital city)
오이리 (Oiri)
시 (City)
스텔리아 (Stellia)모뷔뭰토 (Movimiento)벤타나 (Ventana)
군 (County)
하빌리다드 (Habilidad)메레니치 (Merenichi)사살라 (Sasalla)그라나 (Grana)

문화

스텔라연방공화국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영국과 미국의 문화를 강하게 받았으며 올리비안 왕국과 다르게 포르투갈 등의 유럽 문화의 영향이 없었기 때문에 왕국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오이리 족의 문화는 모두 남아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언어(1940년)

포르투갈어 영어 오이리어 기타 언어
1% 95% 5% 0%
순포르투갈어 사용자 순영어 사용자 동시언어 사용자
0% 94% 1%

England Flag.jpg

스텔라연방공화국은 포르투갈어 사용자가 거의 없으며 영국인의 유입과 영국 문화의 대대적인 영향으로 영어 사용자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현재 스텔리아 시의 포르투갈어 사용자의 비율은 전체 시민의 40%를 넘어섰다. 이는 두 언어에 대한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1940년)

가톨릭교 개신교 무교 기타종교
27% 62% 9% 2%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올리비안 왕국에 편입되기 전까지 영국의 국교였던 개신교를 신봉했으나 왕국의 영향으로 가톨릭교가 유입되면서 종교비율이 즉흥적으로 변화하였다. 1900년에는 압도적으로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슬람교 등의 기타 종교인은 전혀 없었다.

역사

ㅁ 스텔라연방공화국

2018년 12월, MCAC에서 '연강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스텔리아 시/(구)스텔라연방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1711년 ~

오이리 제도에서의 전염병의 발생으로 오이리 제도에 주둔하던 포르투갈군은 긴급히 본국으로 철수했고 1711년, 전염병이 가고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원주민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오이리제도의 이점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급기야 원주민들을 기존의 마을에서 해안가로 몰아내 원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섬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해안가에 부족한 식수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기술과 문물을 활용하여 오이리 독립군을 조직했다.

한편 현재 스텔리아 시의 위치에서 영국인은 북쪽과 서쪽으로는 산맥, 동쪽으로는 호수와 강, 남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언덕으로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천혜의 자연군사요새로 판단하여 이곳에 사우스조지아 마을을 건설했다. 영국군의 군사기지도 건설되었지만 포르투갈이 남겨둔 요새를 보수하여 이용하면서 실질적으로 사우스조지아의 군사기지를 이용하는 일은 적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영국인의 마을이 점차 넓게 형성되었다.

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더군다나 군사기지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고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다. 대포 앞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다.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르보니아 출격으로 절반정도가 자리에 없는 상태에서 독립군의 강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항복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항복 이후로도 영국군만 축출되었을 뿐 이 곳에 살던 영국인들은 독립군이 내쫓지 않았는데 이는 후에 영국이 이를 빌미로 또는 영국인의 보호 명목으로 군사를 제도에 주둔시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사우스조지아 혁명(1872년)

오이리 공화국이 입헌군주국 체제로 다시 변화하면서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은 이에 매우 불만적이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화이트필드(Whitefield)는 공화정을 추구했는데 영국의 군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리 왕국의 새로운 왕을 섬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즉각 반대하고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1872년 3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사우스조지아 혁명'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은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했고 영국도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하기에 이르면서 오이리 왕국은 재빨리 사우스조지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브라질이 이를 계기로 군사를 상륙시킬까봐 두려워했고 사우스조지아에 영국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약간의 이질감이 작용했기도 했다. 사우스조지아 사람들은 6일만에 끝난 혁명에 당혹하기도 했지만 오이리 왕국의 독립승인아래 정부를 부랴부랴 꾸리고 1872년 6월, 스텔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때 벤타나 시민의 일부와 북메레니치 구가 스텔라공화국에 참여하면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이 결성되었다. (국명이 본래 사우스 잉글랜드 공화국이었으나 미국이 이를 대놓고 불편해하면서 의회에서 스텔라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또한 당시 영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영국과 동일한 의원내각제로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대통령 중심제로 변화할뻔까지 했다. 이를 두고 미국이 소국을 심하게 간섭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1873년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오이리 왕국의 내륙지역에 있어 발전이 어려웠다. 외국으로부터 물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기술을 배워오기도 힘들었다. 따라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총리인 '화이트필드'는 오이리 왕국의 당시 코스타 하파시 국왕과 오이리 시를 관통하여 오이리 만, 남대서양으로 즉각 연결되는 아랑 리버(Arang River)를 무기한 이용하되 벤타나 시 일부와 북쪽의 모뷔뭰토 군, 사살라 군 영토 일부를 오이리 왕국에 반환하기로 최종합의했다. 이 때 영토의 크기가 4/5로 감소하면서 총리가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야당의 공격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총리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했다. (올리비안-스텔라 영토합의)

이후 오이리 왕국과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서로 견제하지만서도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1875년 ~

1875년 10월, 스텔라연방공화국의 1대 총리인 화이트필드의 총선 패배가 확실시되었을때 여당이었던 자유당(Liberty Party)과 군부(당시 이름은 치안부대)는 쿠테타를 일으켰고 의회를 무력으로 이용하여 헌법을 개정한다. 이를 75 쿠테타라고 한다. 정권을 장악한 화이트필드 총리는 행정부를 전부 여당출신들로 구성하고 의회를 군부를 동원해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 때 국내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스텔라의 월요일(1875년 10월 25일)이라고 한다. 국민들은 스텔라연방공화국이 예전의 민주공화국으로 회귀하고 의회를 원상복귀하기를 희망했는데 화이트필드 총리는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겉으로는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루지 못할 경우 정권에서 총리가 자발적으로 물러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물론 이 약속은 그가 무려 56년을 집권하면서 깨졌다.)

1876년, 의회를 부활시키려는 국민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실패했다. 이는 독재에 대항하는 마지막 시위가 되었다.

1881년, 코스타 하파시 국왕이 스텔라연방공화국을 비난했다. 그는 총리가 그들의 국민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884년, 총리의 경제개발2개년 5차 계획을 통해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스텔라 시(스텔리아 시)는 오이리 제도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1901년, 오이리 왕국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두 국가간 원활한 교류를 약속했으며 자유국경통행에 합의했다. 이때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스텔라홀딩스의 시초인 스텔라굿즈 가 출범했다.

1902년, 올리비안 왕국과 2차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과 스텔라연방공화국 간 화폐통일이 언급되었지만 실패했다. 또한 총리의 집권 30주년을 맞아 미국, 영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축사를 보냈으며 행사를 진행했다.

1903년, 미국과 첫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미국은 스텔라연방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때부터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영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훗날 영국과의 갈등으로 번졌다.

1906년, 국가는 빠르게 발전했지만 정치권 내 비리가 속출했다. 국민들은 이에 분노하여 전국적인 시위를 전개했지만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또한 흑인차별이 본격화되면서 인권문제가 확산되었고 이는 다른 나라들에도 알려졌다.

1908년, 인구가 150만명을 돌파했다. 영국인들의 낙원이라고 불렸고 영국의 국왕은 이 곳을 사우스런던이라고 불렀다.

1909년, 영국의 여왕을 더 이상 군주로 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크게 반발했다.

1910년, 총리가 갑자기 쓰러져 공화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독재자였지만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고 사회를 개선시켰다고 평가받던 총리였기에 총리 지지지와 비지지자끼리 크게 충돌했다. 총리의 건강에는 크게 이상이 없었지만 한때 큰 혼란이 있었다.

1912년, 올리비안 왕국과 5차 회담을 추진했지만 갑작스럽게 코스타 하파시 국왕의 사망으로 실패했다. 이후 즉위한 파타나샤 하파시 국왕이 군사쿠테타를 주도하면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올리비안을 비난했다. 미국, 영국 등의 강국들은 이를 계기로 무력도발을 준비했고 스텔라연방공화국은 급히 미국과 영국 등의 강국들에 서한을 보내 본 공화국과는 관련이 없음을 확인했다.

1913년

영국이 올리비안 왕국을 침략했다. 파타나샤 국왕은 이에 강력히 저항하였는데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올리비안 왕국을 흡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올리비안 왕국이 불리할때 영국의 편에 참전을 결정하여 땅을 분할해 편입하려는 욕심이 있었기에 총리는 이를 위해 급히 미국에서 군사적 지원을 받아냈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이 예상외로 방어에 순조롭자 총리는 이 계획을 포기했다.

한편 민주공화제로 부활하고자 하는 '스텔라민주공화국 임시정부'라는 단체가 생겼다. 임시정부의 탄생 이후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총리저택 폭탄테러(1913년)

소위 민주임시정부라고 짧게 불리는 스텔라민주공화국 임시정부의 해리 토머스는 총리저택에 1913년 9월 13일, 폭탄 2개를 투척했고 이는 저택의 절반을 날려버렸다. 이로 인해 총리의 아내가 큰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고 총리는 귀 한쪽을 잃었다. 해리 토머스는 긴급체포되었고 2일만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총리 비지지자들은 거리에 나와 해리 토머스가 의인이라면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국민들의 대다수가 참여했고 총리는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그의 형을 낮췄다. 그러나 이 시위는 곧 반독재 시위로 변화하면서 총리의 사퇴와 의회의 정상화를 요구했고 결국 총리는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진압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이가 세계에 알려지면서 이때부터 스텔라연방공화국에 대한 좋지못한 소문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미국과 영국 등의 강국들과 회담하는데에 있어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총리는 진압 직후 '아직 이 나라는 강력한 정권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서 정권을 끝까지 유지할 것을 강력히 피력했다.

1916년

파타나샤 국왕이 암살당하고 올리비안 왕국에 민주의회가 들어서면서 스텔라 국민들은 다시한번 시위를 전개했다. 총리는 다시끔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는 스텔라 역사상 마지막 무력시위진압이 되었다.

1917년 ~

1917년, 인구가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올리비안 왕국으로 반독재를 찾아 이동하는 이민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1918년, 인구가 1년만에 30만명이 줄면서 올리비안 왕국간 국경자유통행을 금지했다. 올리비안 왕국은 이에 반발했다.

1919년, 올리비안 왕국이 아랑 리버 사용에 대해 그간 스텔라연방공화국으로부터 받지 않았던 사용비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이에 반대했으나 6개월만에 태도를 바꾸고 국경자유통행을 재허가했다.

1922년, 올리비안 왕국이 민주의회를 성공적으로 구성하자 국민들은 계속해서 올리비안 왕국으로 자유를 찾아 탈출했고 이 해에 스텔리아 시 시민은 100만명 아래로 떨어졌다. 도시에는 빈 집들이 가득했고 경제성장률은 5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국가는 경제위기에 놓였다. 이를 인식한 총리는 집권 50주년 행사도 취소했다.

1924년, 스텔라홀딩스 기업이 스텔라연방공화국을 탈출했다. 이로써 많은 일자리를 잃었다. 엘비 론즈 차기 총리가 부상했다.

1925년, 국가 경제가 크게 기울어 화폐 가치가 급락하자 총리는 긴급히 경제개발방향을 산업에서 관광 레저로 수정했다. 뛰어난 자연요소를 활용한 관광단지를 조성했지만 무리한 토목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되려 경제를 역성장시키게 되었다.

1926년, 54년간 집권했던 화이트필드 총리가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텔라민주화운동(1926년)

1926년 1월 11일, 화이트필드 총리가 사망한 직후 정부는 이를 숨기고 부총리를 세워 독재정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기자들에게 발각당했고 시민들은 곧바로 반독재 시위를 전개했고 무력진압에 나섰지만 경제가 붕괴함과 동시에 총리에 대한 지지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시위 규모는 역대 최대였다. 이를 올리비안 왕국에서 먼저 스텔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끝내 진압에 실패한 후 반독재시위에 함께 가담했던 '엘비 론즈' 총리가 집권하면서 마침내 54년만에 스텔라연방공화국은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엘비 론즈 총리가 나라를 되살릴 것이라는 국민들의 희망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1927년 ~

1927년, 민주화를 이룬 이후 스텔라연방공화국의 경제상황은 급작스럽게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올리비안 왕국과 8차 회담을 진행했다. 알고레이 하파시 국왕은 그의 집권을 축하했고 의회연설을 진행했다.

1928년, 엘비 론즈 2대 총리는 경제개발6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국민들은 이에 크게 환호했다. 이가 경제를 되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텔라홀딩스 기업의 철수는 이미 무너진 경제를 되살릴 수 없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만다.

1930년, 엘비 론즈 2대 총리의 노력에도 경제가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국민들은 실망했다. 화폐가치는 계속해서 하락했고 마침내 우려하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국가가 부도위기에 빠지면서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스텔리아 시에는 빈 집이 전체 주택의 30% 비율로 늘었고 도시는 암흑으로 덮였다.

1931년, 헌법이 갑작스럽게 개정(역민주화 개헌)된다. 엘비 론즈 총리가 6년 단임이었지만 헌법 개정으로 예전의 4년 중임제로 다시 바뀌었고 국민들은 다시 독재로 회귀한다고 의회를 비난, 시위를 전개했다. 엘비 론즈 총리는 경제부활을 국민들에게 감정을 이용해 약속했다.

1932년, 엘비 론즈 총리가 개정된 헌법에서 총리로 재선출되었지만 야권 대권주자에 아주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면서 여당은 딜레마에 빠졌다. 의회는 여당과 야당과의 싸움으로 지저분해졌고 경제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1934년, 전체 인구가 120만명까지 감소했다. 인구가 20년만에 60만명이 감소했다.

1936년, 엘비 론즈 총리가 선거를 앞뒀지만 경제부활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그는 선거에서 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전 총리가 그랬던것처럼 독재계획을 뒤에서 세우게 되었고 이는 스텔라연방공화국의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스텔라의 마지막 날(Last Day of Stella)(1937년)

엘비 론즈 총리가 부정선거를 저질러 선거에서 야권주자를 누르고 당선되자 국민들은 이를 두고 부정선거라며 크게 반발했다. 경제는 계속해서 나아지지 않았고 거기에 독재가 다시 부활하려하자 국민들은 총리를 자리에서 직접 내리려 의회와 총리저택을 차례대로 쳐들어갔고 군인들도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거대한 혼란이 일어났다.

올리비안 왕국의 당시 국왕인 알고레이 하파시는 스텔라연방공화국을 비난하였고 동시에 흡수통일계획을 준비했다.

엘비 론즈 총리는 결국 국민들의 손으로 잡혀 의회 앞에서 난도질 당했고 총리는 사망했다. 이후 정부가 붕괴하면서 국민들은 국민정부 구성에 노력했지만 경제가 빠르게 붕괴하고 국가부도직전에 놓이면서 국민정부는 구성 112일만에 다시 무너졌다. 1938년 4월, 스텔라 시(스텔리아 시)의 당시 시장이던 헨리 마스는 급기야 스텥라 시의 시민들과 시의 영역을 영토로 하는 스텔라민주공화국을 선포했고 국가는 분열에 이르렀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의 군사들이 벤타나 시 쪽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은 결국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스텔라민주공화국이 스텔라연방공화국의 뒤를 잇는 국가라며 헨리 마스가 선언했으며 국민의회가 그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그 외 스텔라 시 밖의 나머지 영토는 올리비안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1939년

스텔라민주공화국은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이 서서히 압박을 가하면서 국내외적으로 힘들었고 스텔라연방공화국의 빚을 그대로 떠안아 헨리 마스 총리가 도망가면서 사실상 국가가 무너졌다.

1940년 2월 12일

마리아 덴 에리치와, 최초의 올리비안 왕국 여성총리는 스텔라 시를 올리비안 왕국으로 편입한다고 발표했고 스텔라 시민들은 이에 환호했다. 이로써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완전히 끝을 맺었다. 이후 스텔라 시는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스텔리아 시로 발음상 편하게 불리우면서 스텔리아 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