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가국련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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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국의 제1대 대막리지

개요

연개소문은

(一) 고구려의 전통이였던 호족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二)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 정책을 세웠으며,
(三)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의 제왕인 당 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 하였으니,

그 선악과 현우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생사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였다.

—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대력적인 평가.

고구려 제국의 초대 대막리지이자 최초의 대막리지이며 권신. 아버지는 5부 중 동부대인인 연태조이며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지위를 계승 받았다.

이후에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영류태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영진태왕을 옹립하였으며 대막리지 라는 관직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후 연개소문이 신라, 당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당나라 사이에는 수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연개소문 생전에는 방어에 성공했고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의 삼국통일의 반은 완성하였다.

먼 훗날 1392년 현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국교는 그대로 불교로 이어갔지만 고구려에 유교 사상이 도입된 후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중화 질서에 거스른 대역죄인 이라는 점이 부각 되었지만 동시에 외세에 맞선 명장이라는 점 역시 높이 평가받는 등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생애

출신과 계보

출생

삼국사기 및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동부대인이였던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닥 한다. 서부와 동부 중 정확히 어느 쪽 출신인지는 알기 힘들지만 동부대인이였다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동부 출신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연개소문의 출생년도에 관한 설에는 590년, 594년, 595년, 601년, 603년, 614년까지 다양하다.

10월 유혈의 쿠데타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임진일, 고려의 사신이 나나와진에 다다랐다,

정미일, 여러 대부들을 나니와부에 보내어 고려국에 바치는 금, 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1]가 죽고 가을 9월에 대왕과 이리코세시 등 180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동성인 츠스루코무루를 대신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4대 고교쿠 덴노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자신이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당연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병(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나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 신당서 권 제220 동이열전 제145

서기 642년 10월 태왕과 대신들이 한통속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과감하게 정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집결시켜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서열식 중에 연개소문이 관할하는 동부의 군사들에 의해 무참히 목숨을 잃었는데 이때 살해당한 인원들이 임금과 대신들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대신들을 어육으로 만들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군사들을 숨겨두었다가 대신들이 도착하는 족족 하나씩 죽여버렸다고 서술되어 있다.

의문점이 있다면 왜 하필이면 고위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적인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사열하는 행사에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에서 그랬는지는 이해하기 꾀 힘든 부분이다. 이는 아무래도 그 행사가 보통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참석해야 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그 행사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의 지위를 내놓는 이임식 행사나 혹은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위해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베푼 송별식일 가능성이 꾀 높아보인다.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 대신들을 제거한 연개소문은 궁궐로 쳐들어갔다. 다른 4부의 군사들이 저지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궁성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궁궐을 향해 달려가면서 일부러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명시 되어있다. 이는 수도 경비병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경비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창고로 달려가는 동안 연개소문의 사병들은 큰 저항없이 태왕이 거처하는 궁전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위해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계략을 짜놓았고 이를 신속히 행동으로 옮겼다.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난입한 연개소문은 마침내 영류태왕을 찾아내고는 그를 시해했다. 신당서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을 시해한 후에 그 시체를 토막내서 시궁창에 내팽겨 처벼렸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스산하게 기록됭 있다. 642년 9월에 대신 이라카스미 즉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대왕을 시해하고 이리코세시 등을 비롯한 180여 명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이어서 태왕의 어린 조카인 강보장을 태왕으로 세우고 동성인 츠스루코무루를 대신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동성이라는 기록이 또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직관적으로 봐도 츠스루코무루보다 이리코세시 쪽이 연개소문과 동성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은 아예 그냥 오기라 하거나 혹은 동성은 같은 부 소속을 의미하기에 츠스루코무루도 연개소문과 같은 부의 인물이였으며 이리코세시는 연씨 가문 내에서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였다고 해석라기도 하는 등 해석이 확립되어있지는 않다.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이처럼 기록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를 포함한 집권 세력들을 도륙내고 영진태왕을 옹립하며 자신의 세력들을 조정 대신으로 임명 했다는 사실은 명확해보인다. 연개소문이 왜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립하고 있다.

  • 첫째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 개소문열전에 기록되어있듯 영류태왕과 당시의 집권 세력들과 연개소문 사이에 일어난 권력 다툼의 결과라는 설이다. 위에도 여러번 설명 하였듯 연개소문의 가문은 이미 할아머지 대인 연자유 때부터 2대에 걸쳐 막리지 직위를 역임했었고 강력한 무력과 동부대인의 지위를 바탕으로 당대 고구려의 막강한 신흥 귀족 세력으로 부상하던 중이였다. 당시 집권층이였던 고구려 황실과 기존 권력층은 연개소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가 동부대인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한편 천리장성 건축의 감독을 맡긴다는 핑계로 변방으로 몰아내려는 등 그들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한 여러가지의 시도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씨 가문의 힘이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연개소문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려다가 연개소문이 이를 먼저 알고는 먼저 선수를 쳐서 태왕과 집권층을 갈아 엎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 두번째는 당시 연개소문이 영류태왕의 조카인 영진태왕과 결탁하였다는 설이다. 영류태왕은 사실 선태왕인 영양태왕의 배다른 아우였지만 여수 전쟁 당시에 큰 공을 세웠으며 또한 영양태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영양태왕의 또 다른 아우였던 강태양과 그의 아들인 영진태왕이 이에 불만을 품었고 그들 또한 황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에 불타 당시 영류태왕과 대립하던 연개소문과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 세번째는 대당외교 문제와 관련된 설이다. 당시 영류태왕은 당나라에 대해 온건하고 저자세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대당강경파이자 신흥귀족 세력의 대표였던 연개소문이 이에 반대하며 영류태왕과 충돌한 끝에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영류태왕과는 달리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정권을 장악하다

권력 장악

정변을 일으켜 영류태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의 아우인 강태양의 아들 강보장을 불러와 옹립하니 그가 바로 고구려 제28대 태왕 영진태왕이다. 이후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 라는 직책에 올랐다. 막리지 라는 직책은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나라의 군사력과 궁중의 행정을 모두 맡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즉,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력과 궁중의 권력을 모두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이나 연남생의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의 벼슬을 지냈다고 기록 하였는데 정권을 일으킨 이후 어느 정도 세력이 안정되자 제가 회의의 장인 대대로 직위까지 얻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 서기에서 연개소문이 대신 이리거세사 등을 죽이고 도수류금류 등을 대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중앙정계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처형한 후에 자신의 사람드로 그 자리를 메구는 등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연개소문은 태왕을 뛰어넘는 권세를 부리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구당서와 신당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관복을 금으로 장식 하였으며 평소에도 칼을 다섯자루나 차고 다녔고 말을 타고 내릴 때는 장수를 받침 삼았다고 묘사 하였지만 실제로 모든 고구려 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다섯자루의 칼을 가지고 디녔다. 이를 보면 구당서와 신당서의 경우 연개소문의 독재자 라는 이미지를 각색하기 위한 내용일 수 있다. 삼국사기는 구당서와 신당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므로 논외로 한다. 또한 연개소문이 행차를 할 때에는 호위병들로 하여금 엄중하게 대오를 이루어 다녔으며 길을 지날 때에는 행차를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는데 이럴 때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하여 구덩이 라도 마다하지 않고 숨었다고 한다.

전국 장악

당 태종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안시성주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까지 하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양만춘은 이를 잘 막아내었고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 속의 불화는 고당 전쟁 수행에 차질이 있었다는 가설로 설명하거나 반대로 당나라의 패배를 희석하기 위해 삽입된 과장된 풍문이라는 견해가 있는 등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는다. 다만 안시성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647년에 오골성 등의 대성에서 동원되어 지휘를 받는 것을 보면 안시성의 반발은 과장 되었거나 642년 당시엔 실제로 있었으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시기 이전까지 어떻게든 봉합이 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당나라와의 전쟁 때 명확히 알 수 없는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0,000명을 시작해서 중앙의 통제에 따라 각 성에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고 있었던 것과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15만 명, 667년 금산 전투에서 20만명으 동원하고 이후에도 남소성에서 15만과 말갈족 수만명이 당과 당과의 전투를 벌이는 등 이 전력을 백제와 신라에다가 들이부었다.

김춘추와의 회담

회담 결렬

한편 642년 겨울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딸과 사위, 손주들을 잃은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 조정에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청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의 일이였는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왕명을 받들어 김춘추를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이처럼 신라와의 회담은 처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다음날에 김춘추가 영진태왕과 만나 논의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영진태왕은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는 조건으로 죽령 서북의 땅을 요구하였다. 죽령은 지금의 충청남도와 경상도를 잇는 길목으로 고구려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영토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는데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태왕 때에는 고구려 영토였으나 이후 신라 진흥왕 때 이를 빼앗았다.

비록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고 있던 김춘추라고 하나 김춘추 입장에서는 난처한 게 이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조건이였다. 그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차단되고 고구려에게 신라로 통하는 진격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영진태왕이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뜻이 되는데 영진태왕의 뜻은 사실상 실권을 움켜쥐고 있던 연개소문의 뜻이였다.

김춘추를 풀어주다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영진태왕과 연개소문은 그를 가두어 억류해버렸다. 그러자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구하도록 조치하였고 곧 김유신이 군사를 이글고 고구려와의 국경 지대로 나아가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에서는 곧 김춘추를 풀어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춘추가 풀려나 귀국하게 된 사연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라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에 나타나 무력 시위를 벌이자 영진태왕이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영진태왕의 측근이였던 선도해가 김유신에게 뇌물을 받고는 '토끼의 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꾀를 내주자 김춘추가 이를 받아들여 영진태왕에게 땅을 내어주기로 약조하고는 정작 국경에 이르자 일을 어기고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도 김춘추 석방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김유신이 고구려 국경으로 군사를 끌고 가 무력 시위를 벌였다고 하였다.

당나라와의 대립

당 태종의 분노

이토록 권위적인 성격의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력자가 된 이후로 당나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차츰 악화되어 갔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당나라가 해동에 대한 영행력 행사 및 고구려 정벌에 대한 준비 등에 걸림돌이 생겼으니 이세민으로서는 분노할만한 일이였다.

거기다 이세민은 당시 내부적으로 태자교체의 후유증으로 인해 꾀나 통티력이 감소해 있었고 장손무기를 필두로 하는 외척의 힘이 강대해져 한참 어지러웠던 시대였다. 심지어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에게 환속해서 자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정치적 어려움이 매구 심각했던 시기였다. 또한 동시에 고구려에 대해 그닥 좋은 감정은 가지지 않았던 것이 당 태종이기 때문에(대표적인 게 진대덕 귀국 후 고구려 공격 의사를 내비친 것) 고구려에 대한 공격도 정국 타개를 위해 고려할만한 옵션이였다. 게다가 당 태종은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군사적 역량을 지닌 먕장이기도 하였으니 고구려 정복이라는 군사적 활동을 통해 당 태종 자신과 막 세운 태자 이치의 권위를 세우고 정국을 안정화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통기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 태종에게는 말 그대로 딱 들어맞는 대의명분인 셈.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당 태종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문란케 하는 역적이라 일컫으며 고구려를 칠 것을 계획하였으나 측근이였던 장손무기는 아직 방비가 단단하니 상황을 지켜봐야 옳다고 만류하자 계획을 보류 하였다.

도교 우대와 불교 탄압

643년 3월,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에는 유교와 불교는 번성하나 도교가 없다."라면서 영진태왕에게 당나라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나라 조정은 이에 응하여 고구려에 숙달 등을 비롯한 8명의 도사를 파견하여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전해주도록 하였다. 연개소문 역시 이에 화답하여 도사들을 절과 객고나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이미 당시 고구려에서는 도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류태왕 본기에도 당시의 고구려에 도교가 번성 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즘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도 이전에 불교적 색채가 짙었던 것과는 달리 도교적인 요소가 매우 늘어났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도 도교적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상황에 연개소문이 새삼스럽게 당나라에 도교 전파를 요청한 이유는 당시 당나라 이씨 황실ㄹ이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도교를 무척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즉, 연개소문이 당나라 조정이 받드는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에 대한 유화책이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온 도사들에게 절을 숙소로 내준 것은 불교에 대한 탄압책으로 여겨진다[2] 영진태왕 본기에는 650년 6월에 변룡사의 승려인 보덕화상이 나라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다 하여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반발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삼국의 불교가 왕실을 보위하는 호국불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왕실의 친위세력인 불교의 권위를 약화시켜 왕의 위상 자체도 떨어뜨리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스님들은 귀족 가문의 출신들이 많았고, 학문과 무예를 익힌 엘리트였으며, 스님들이 숙식하는 사찰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군사적 기능도 하였기에 그 대항마로 도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교 우선시 정책과 상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한 점 때문에 불교계에선은 연개소문을 수백년 동안 굉장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듯 하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의하면 고구료가 불의를 많이 저질렀으니 제석이 고구려를 멸망 시키기 위해 인간세상에 보낸 괴물 무상대귀가 바로 개금(=연개소문)이라고 쓰고있다. 당시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도 연개소문이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 시키기 위해 환생한 것이라는 전승을 실었다.

신라 공격

한편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643년 9월에 신라를 당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신라의 뱃길을 끊어버렸다"라면서 당에 직접 도움을 청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644년 정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 조정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을 그만 두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여 2개의 성을 격파하고 있던 중이였는데 영진태왕이 사자를 보내 부르자 그제서야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리현장은 개소문에게 신라를 치지말라고 만류 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지난날 수나라와 싸우는 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땅을 빼앗아갔으므로 이를 되찾아야 한다며 듣지 않았다.

사실 이 해에는 이미 양국은 교전 상황에 돌입하였다. 이미 대릉하 일대에서는 고구려와 당이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백금을 보내었으나 당나라의 대신인 저수량은 잉를 고구려 측이 보낸 뇌물이라 주장 하였으므로 당 태종은 이를 받지않았다. 또한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보낸 50여 명의 사신들을 가리켜서 '왕을 죽인 막리지를 섬기는 죄인들'이라 하며 붙잡아 처벌 하였다. 연개소문 역시 당 태종이 보낸 사신 장엄을 인질로 삼고는 굴방에 감금해버렸다.

고구려-당 전쟁

645년 마침내 분노한 당 태종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 하였다. 전쟁 초기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과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을 차례대로 무너뜨리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1차 적인 함락 이래로 진군조차 지지부진 하였고 안시성, 신성, 건안성 등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 방어선을 뚫지못하고 패퇴하고 만다 그 이후로도 당 태종은 이런 저런 전략을 구사하면서 고구려를 공격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 하였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여 병사 하였다.

한편 그 뒤를 이은 아들 당 고종 역시 650년대부터 내공몰과 요서 일대에 고구려와 각축전을 시도 하였으나 뮈로 돌아갔다.

백제 멸망

서기 660년 고구려의 대군이 백제를 침공하여 사비성을 함락 시키고 백제 왕조를 무너뜨렸다.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은 같은 심양 강씨 일족이므로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 했다. 물론 그 후에 백제의 왕족 강풍을 백제 왕으로 옹립하여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죽음과 사후

이 달에 고려의 대신 개금(蓋金, 개소문의 다른 이름)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일본서기 권 27 천지천황 3년 10월

연개소문이 죽은 후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을 계승하고 그 다음 연남건 그 다음 연남산이 사이좋게 계승하고 고구려 제39대 태왕이자 진주 강씨 왕조의 6번째 태왕인 세조 강홍 대에 이르러서야 연개소문이 못다한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만다.

  1. 영류태왕의 동생이자 보장태왕의 아버지인 강태양
  2. 실제로 삽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유기에서는 도교의 도사들을 극악한 무리인 양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