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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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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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오리엔트 정교회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의 일파이다.

명칭

동양 정교회, 중동 정교회 또는 동방 독립교회라고도 부른다.

이에 속하는 교회로는 콥트 정교회 ·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 시리아 정교회 ·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등을 들 수 있다. 주로 서아시아이집트, 에티오피아에 분포한다.

'동방 정교회'로 불리는 칼케돈파 정교회와는 다르다.

오리엔트 정교회를 흔히 '단성론파', '단성론자'라 부르나, 단성론이라는 말 자체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칼케돈파 측의 입장에 가깝기 때문에 이러하게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떠한 표현 방식이던 이들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도 인정하기 때문에 단성론이라는 낙인 자체를 싫어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후술.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를 비칼케돈파 교회나 합성론파로 부르며 이러한 표현이 더욱 중립적이다.

간혹 '오리엔탈' 정교회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영어의 형용사+명사를 그대로 번역한 표기 오류다. '비잔틴 제국', '발틱 해'와 비슷한 오류.[1]

교리와 역사

흔히 단성론 교파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 교파의 그리스도론은 단성론(Monophysitism)이 아닌 합성론(Miaphysitism)이다. 단성론은 예수에게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합성론은 쉽게 말하면 신성과 인성이 합쳐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이들을 단성론자라 부르는 것은 이들에게 모욕이 될 수도 있을뿐더러 신학적으로도 잘못된 명칭이다.[2]

413년 3차 세계 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까지만 인정하며, 4차 세계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부터 결의된 교리를 거부한다. 즉 이들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 안에서 나누이지도 섞이지도 않으면서 서로 간의 속성을 공유한다.'는 교리를 거부하였다. 대신에 이들은 '강생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키릴로스의 주장을 그대로 밀고 나가 하나의 본성이 육신을 취해 두 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뭔가 조금 다른 형식의 표현을 하였고, 결국 그로 인해 갈라서게 된 것이다.[3] 이들은 키릴로스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해석했던 만큼 키릴로스가 논파한 네스토리우스파와는 구분해야 하며, 실제로 오리엔트 정교회에 속하는 많은 교회들은 비칼케돈파이면서 동시에 네스토리우스의 이성론 역시 이단으로 취급한다.[4]

그러나 공의회를 열었다고 해서 로마 제국의 교회가 통일이 된 것은 아니고, 서로마가 망하고 동로마 제국 시대에 이를 때까지 제국의 동부는 합성론파가 많았다. 동로마의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이것을 봉합해 보려고 세르기오스라는 신학자가 주장한 단의론이라는 타협안을 밀어주었다. 초기에는 교황 호노리오 1세도 단의론의 수용을 검토하는 등 잘 나가나 싶었는데, 결국 칼케돈파의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 후 이들 지역이 이슬람 제국에 넘어가면서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슬람의 발흥 때는 정통파와 하도 사이가 나빠서 자진해서 항복했었다.

자진해서 이슬람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이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탈환했을 때는 처음에는 환영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동로마군의 행패가 심해서 민심이 완전히 동로마에서 떠나갔고 이후 이슬람 해군에 대거 입대해 동로마 해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이슬람 지배 초창기 당시에는 아직 이슬람에서 그리스도교, 유대교와 체계적으로 구분, 차별하는 샤리아를 확립하기 전이었고[5], 어느정도 우대를 받았으나 시대가 지나고 샤리아가 개악되면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차별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처음엔 십자군을 해방자로 보았으나 이슬람 통치 때나 마찬가지로 탄압받았기 때문에[6] 십자군을 증오하게 되었고 가톨릭과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다. 당시 남아있던 유일한 독립국 에티오피아를 비롯해서 많은 오리엔트 정교회 신도들이 투르코폴레스라는 현지인 보조부대로 참전하여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으나, 이들은 유럽계 십자군에 비해 열등한 2등 시민 취급을 받았으며 이슬람 측에서도 투르코폴레스 포로들을 현지인 배신자라며 더 가혹하게 다루었다. 하틴 전투에서 승리한 살라딘이 투르코폴 포로들을 남김 없이 즉각 처형을 명령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십자군은 중근동의 오리엔트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황수위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가 되면서 아랍계 그리스도인 인구가 계속 감소하자 오리엔트 정교회의 고유 전통을 보존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여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렇게 교황수위권을 인정해 갈라져 나온 교파는 동방 가톨릭의 일파로 분류되며 오리엔트 정교회로는 분류되지 않는다.

현대 교회일치운동 시대에 들어와서 칼케돈파 교회(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와 신학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져 칼케돈파-비칼케돈파 교회들 사이에서 많은 분야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합성론이나 칼케돈파나 예수에게 인성과 신성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학적 교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사 교류가 이뤄지지는 않고 있으며, 일부가 동방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교회로 귀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와 에티오피아는 로마보다도 앞서 각각 세계 최초, 세계 두 번째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고, 역사적으로 이슬람 세력, 현대에 와서는 소련 같은 공산 독재나 무솔리니 시절 파쇼 독재에 맞서 민족의 구심적이었다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명분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해당 나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음은 가톨릭과 콥트 정교의 공동 발표인데, 이를 보면 이들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들의 전승에 입각해서, 그리고 처음 세 개의 보편공의회에 준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육화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며 하느님의 말씀이요 성부의 영광의 광채시며 성부 본질의 모상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참된 육신과 이성과 영혼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죄 없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나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이시며 하느님, 구세주, 우리 모두의 왕으로서 신성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으로 치자면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분 안에서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실제로 완전한 방법으로 섞임 없이, 혼합 없이, 혼동 없이, 바뀜 없이, 갈림 없이, 나뉨 없이 결합한다. 그분의 신성은 인성으로부터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영원하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육신을 갖추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 그분 안에서 신성의 모든 전유물과 인성의 모든 전유물이 하나의 참되고 완전하고 불가분한 결합 안에서 온전히 보존된다.
-1973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셰누다 3세Shenouda III가 공동 서명한 "공동 교서"(dichiarazione comune).
우리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인간의 구세주이시고, 육화한 말씀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그분은 자신의 인성을 신성 안에서 섞임 없이, 혼동 없이 하나로 만든다. 그분의 신성은 자신의 인성과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단죄한다.

-1988년 2월 12일. 대화촉진위원회 공동정식

  1. 각각 비잔티움 제국, 발트 해가 옳은 표현이다.
  2. 출처: 박찬희, 《박찬희 교수가 쉽게 쓴 동방정교회 이야기》,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5.
  3. 신성과 인성은 공존한다는 큰 틀에서는 일치하지만, 이것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용어들의 사소한 해석 문제를 가지고 키보드 배틀이 벌어진 것. 실제로는 시리아+이집트와 그리스+아나톨리아 사이의 지역 감정 싸움에 가까웠다.
  4.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옹호론도 있는데, 에페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안티오키아의 주교단은 물론이고 교황의 대표단도 참석하지 않은 공의회였고, 파면된 네스토리우스를 교황이 스카웃하고자 했으며, 칼케돈 신경의 그리스도론은 키릴루스보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네스토리우스가 칼케돈 공의회 전에 사망했고 키릴루스파는 자신들의 주장이 밀려도 어떻게든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찍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게 비판의 요점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 참조. 크리스토프 바우머, 안경덕 옮김, "실크로드 기독교 동방교회의 역사", 서울, 일조각, 2016. 그러나 여기에 대해 반박을 하자면, 칼케돈 신경이 네스토리우스파에 가깝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에게 2개의 πρόσωπον(프로소폰)이 있다고 주장했고, 칼체돈 신경은 하나의 πρόσωπον(프로소폰)과 2개의 φύσις(퓌시스)를 고백했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르다. 만약 "표현은 다르지만 네스토리우스와 느낌이 비슷한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똑같은 원리로 칼케돈 신경은 오리엔트 정교회의 그리스도론하고도 표현이 다르지만 느낌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칼케돈 공의회는 단성론을 이단으로 선언한 만큼, 에우티케스의 단성론(1을 극단적으로 강조)보다는 네스토리우스파(2를 극단적으로 강조)에 조금 더 타협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칼케돈 신경이 키릴로스의 생각과 어긋나는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는 교황 레오 1세가 주도하며 이끌었던 공의회로, 레오 1세의 편지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프로소폰을 가지며 2개의 퓌시스를 가진다고 분명하게 언급한 바이기에, 훗날 오리엔트 정교회로 분리될 성직자들의 역을 칼케돈 공의회에서 과장하여 인식하는 것도 옳지 않다.
  5. 샤리아는 7세기 말에 제정되기 시작하였다.
  6. 약탈과 강간을 자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단이라며 학살당하기까지 했다.